35. 상서 막장(莫將)이 남당 원정(南堂元靜)선사를 뵙다
상서(尙書) 막장(莫將)은 자가 소허(少虛)이며, 집안 대대로 예장(豫章)의 분령(分寧) 땅에서 살아왔다. 서촉에서 남당 정(南堂元靜)선사를 찾아 뵙고 심요(心要) 결택하는 법을 물으니 정선사는 그에게 한 곳에만 집중하도록 하였다. 마침 변소를 갔는데 갑자기 풍겨오는 악취에 손으로 코를 감싸쥐다가 드디어 깨친 바 있어 정선사에게 게송을 올렸다.
지난 날 시 읊으며 풍류를 사랑하다가
밖으로만 찾으려 하는 세상 사람을 얼마나 비웃었던가
천차만별하여 찾을 곳 없더니만
원래 있던 코끝에서 얻었구나.
從來姿韻愛風流 幾笑時人向外求
萬別千差無覓處 得來元在鼻尖頭
이에 정선사가 답하였다.
한 법을 통하자 모든 법 두루 통하니
종횡의 묘용을 어찌 다시 구하랴
푸른 뱀이 우리에서 나오니 마귀가 항복하고
파란눈 달마스님이 웃으며 머리 끄덕거린다.
一法纔通法法周 縱橫妙用更何求
靑蛇出匣魔軍伏 碧眼胡僧笑點頭
36. 관상술 잘하던 석가원 묘응(妙應)대사
진주(眞州) 육합현(六合縣) 석가원(釋迦院)의 묘응(妙應)대사는 법명이 백화(伯華)이다. 관상술에 능하여 사대부들과 교류하였는데 화복과 수요(壽夭)를 점치면 이상하리만큼 맞은 일이 많았다. 상서(尙書) 손중익(孫仲益)이 셋째 형 내한(內翰)에게 보낸 서신에, "제가 전주(全州)를 지난는 길에 묘응스님을 만나 한 이불 속에서 밤을 지새며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저는 죽을 날이 멀었다고 하니 그 말이 믿을 만한 것인지는 앞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손상서는 그의 말대로 거의 백살까지 살았다. 스님은 비록 이 방면에 남다른 능력이 있기는 하나 독실히 두타행을 하였다. 장위공(張魏公)과는 더욱 절친한 벗으로서 우연히 스님의 초상화에 제(題)를 썼다.
평탄한 마음자리엔 원래 아무 것도 없고
말쑥한 용모는 속진을 벗어나
날마다 관음보살 염불하고 일장(일장)을 주문하니
그의 수행, 미혹중생을 건진다 해도 무방하겠네.
坦然心地元無物 蕭灑容儀自出塵
日誦觀音呪一藏 不妨功行拯迷津
윤주(潤州) 초산사(焦山寺)에 주지 자리가 비자 스님을 초청하여 동도(東道 : 동부지방)의 종주로 삼으려는 사람이 있었다. 백화는 '나는 참선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감히 그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극구 사양하니 이 말을 들은 사람은 훌륭하다 하였다. 또 참정(參政) 이태발(李泰發)이 그에게 시를 보냈다.
요컨대 눈과 귀가 참된 사다리임을 아노니
불룩 튀어나온 이마 장수할 골격일세
늙어갈수록 매령에 소식 전하지 않으나
살기는 조주선사 만큼 살았네
많고 많은 경론을 항상 마음 속에 돌리고
옛부처의 매서운 수단을 손에 쥐고 계시네
광남 광간 넓은 산천 두루 거쳤으니
이젠 짐꾸러미 싸들고 절강 동서 함께 가세.
要知耳目是眞梯 壽骨穹隆貫伏犀
老去不傳梅嶺信 生年似與趙州齊
恒沙經論心常轉 古佛鉗鎚手自携
二廣山川踏應遍 打包同過浙東西
백화스님은 향년 99세로 서거하였으며 상서(湘西)지방에 그의 부도가 있다. 요즘 세상에 술수로 명예를 도적질하여 부질없이 큰 사찰에 머무는 자들이 백화의 행위를 생각해 본다면 어찌 조금이나마 부끄러운 마음이 없겠는가?
37. 불교로 마음을 돌린 태학의 벼슬아치, 태백(泰伯) 이구(李覯)
이구(李覯)는 자가 태백(泰伯)이며 우강(旴江) 사람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큰 유학자라 일컬었고, 황우(皇祐) 2년(1050) 범문 정공(范文正公 : 范希文)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그를 추천하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신(臣)이 살펴보니, 건창군 초택(建昌郡 艸澤)에 사는 이구(李覯)는 지난날 제과(制科)에 응시하여 첫째로 소시(召試)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담당자가 실수로 빠뜨리는 바람에 그는 고향에 물러가 은거하면서 부모 봉양에 힘을 다하고 다시는 벼슬을 하려들지 않으니 그 고을의 준수한 수재들이 그를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그는 육경(六經) 강론에 능하고 해박한 지식과 민첩한 언변으로 막힘없이 성인의 뜻을 간파하며 저서와 문장에는 맹자와 양웅(楊雄)의 기풍이 스며 있어 실로 천하의 선비임에 부끄러울 바 없습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여태껏 그를 거두어 들이지 않아 뜻 있는 자들이 안타까워 하고 있으니 이는 훌륭한 인재를 버리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신(臣)은 오늘 그가 지은 「예론(禮論)」7편, 「명당정제도서(明堂定制圖序)」1편, 「평토서(平土書)」3편, 「역론(易論)」13편 등 모두 24편을 10권으로 편집하고 이를 인쇄하여 올립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비로우신 황제께서 정사를 마친 이경(二更) 여가에 이 책을 한번 보신다면 그 사람의 재주와 학문이 평범한 유학자의 그것이 아님을 곧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 상소를 계기로 조정에 나아가 벼슬 하나를 임명받고 뒤이어 태학(太學) 설서(說書 : 임금에게 經書를 강하던 宋代 벼슬)에 임명되었으며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이에 앞서 태백은 「잠서(潜書)」를 저술하여 세상에 널리 유포했는데 그 내용은 불교를 극력 배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숭 명교(契崇明敎)스님이 자신이 저술한 「보교론(輔敎論)」을 가지고 그를 찾아 가 논변을 벌이니 그는 처음으로 불교 서적을 유의하여 읽은 후에 이렇게 탄식하였다.
"우리들의 교설은 「반야심경」한권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떻게 쉽사리 불도를 알 수 있겠는가?"
그의 제자 황한걸(黃漢傑)이 서신을 보내어 그 사실을 따져묻자 태백이 그에게 답서를 보냈다.
"사람이 선(善)하고자 하는 것은 본성이다. 옛 유학자들은 세상에 등용되면 반드시 교(敎)로써 인도했기 때문에 백성의 이목구비와 심지(心知) 백체(百體)에 모두 주체가 있었으니 어느 틈에 이단이 미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오늘날의 유학자들은 세상에 등용되면 교(敎)로써 인도하지 않기 때문에 백성의 이목구비와 심지 백체에 모두 주체가 없게 되었으니 불교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느냐?"
아! 「반야심경」은 당 태종(太宗)의 명에 의하여 현장법사가 번역한 것으로 54구절 267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반야경(大般若經)」6백권의 궁극적인 이치를 모두 담고 있다. 태백이 스스로 긍정한 바 없다면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었겠는가?
38. 삭발하는 그림에 부친 글[題淨髮圖] / 수앙(脩仰)서기
남민(南閩)의 수앙서기(脩仰書記)는 소흥(紹興 : 1131~1162) 연간에 늑담사(泐潭寺)에서 초당(草堂)화상을 위해 기실(記室) 소임을 맡아 보았다. 그는 정발도(淨髮圖)에 제(題)를 쓴 바 있는데, 글의 형식은 광대놀이를 빌렸으나 내용은 적절하고 타당한 데가 있다.
꾀죄죄 헝클어진 쑥대머리
지공을 성문(聲聞)에 떨어졌다 비웃었고*
깨끗한 곳에 머리 씻으니
암주가 설봉문하에 들어갔음을 탄식하네*
당시에는 유희였지만
후세에는 격식이 된 일
그 누가 아랴, 석문을 꿰뚫어 나가면
또다른 비단을 버리는 수단이 있지
늑담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모두가 안개를 뚫고 가는 발톱이 있기에
더 이상 지난 날 두 사람의 흉내를 내지 않고
곧 바로 이마 위의 하나를 쓰려 하네
칼끝이 움직였다하면
마음과 손이 맞아들어
한 번 내리고 한 번 쳐들 때
장두는 하얗고 해두는 새까만 것이 무슨 상관이며*
잡았다 놓았다 할 때
무슨 오랑캐의 수염은 붉다느니 붉은 수염은 오랑캐라느니 하랴*
한번도 손을 잘못 놀려 칼날을 상한 적이 없으니
눈썹을 치켜들고 눈을 깜박거릴 필요가 없네
광채가 일신하여
티끌하나 없으니
머리 위에서 칠보관을 찾지 말고
정수리 뒤에 만리 뻗치는 빛을 보아라
좋은 벗 한 자리에 모이니
칠일은 좋은 날
법당 앞에는 가지 말아라
그곳엔 뽑을 잡초가 없으니
대지당(大智堂)에 모여 울력을 하여라
그곳엔 사람이 있으니.
垢汚蓬首 笑誌公墮聲聞之鄕
特地洗頭 嗟菴主入雪峯之彀
爲當時之遊戱 屬後世之品量
誰知透石門之關 別有棄繻手段
飮泐潭水 總是突霧爪牙
更不效從前來兩家 直要用頂(寧+頁)上一著
鋒鋩纔動 心手相應
一搦一擡 誰管藏頭白海頭黑
或擒或縱 說甚胡鬚赤赤鬚胡
曾無犯手傷鋒 不用揚眉瞬目
一新光彩 迥絶廉纖
休尋頭上七寶冠 好看頂後萬里相
一時勝集七日良期
不須到佛殿堦前 彼處無草
普請向大智堂裏 此間有人
그가 형양(衡陽)에서 대혜(大慧) 노스님을 시봉한 지 얼마 안되어 스님을 따라 매양(梅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군수 사조의(謝朝議)는 관료들에게 대혜스님에 대하여 말하기를, '조정에서 발령한 가운데 장노스님이라 할 수 있는 분은 다만 한 사람뿐이라'고 하였다.
병마사(兵馬司)의 동쪽 모퉁이 빈터에 거처를 정해 주었는데 이윽고 승행일(僧行日)이 되자 몇 백 명이 모여들었다. 앙서기는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괭이와 삽을 가져와 집터를 고르고 대나무를 운반하여 집을 엮으라 하였는데, 모두 지시대로 따르며 감히 게으른 자가 없었다. 군수는 그가 이렇게 힘쓰는 줄은 알았지만 그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으므로 가까운 한 두 사람을 불러 그의 재능과 일하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때마침 앙서기는 대혜스님의 명을 받아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들과 만나 이야기 하는데 논변이 뛰어나고 옛일에 근거하여 지금 일을 헤아리며 무슨 말을 하든 근본에 입각해 있었다. 군수가 다시 앙서기를 불러 물었다.
"그대 일행 중에 또 남다른 재능을 지닌 자가 있습니까?"
"큰 경론(經論)을 짊어진 자, 서사(書史)에 해박한 자, 시사(詩詞)에 절묘한 재능이 있는 자, 서예에 뛰어난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깨치지 못한 것은 오로지 불조의 생사 인연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어려움을 꺼리지 않고 노스님을 따라 시봉하다가 그대의 어진 정사를 의지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행운은 없습니다."
이 말에 군수는 더욱 놀라 대혜스님의 문도들이 모두 법을 위하여 자신을 잊은 자임을 알게되었으며 이때부터 대혜스님을 더욱 더 존경하였다. 그의 아들 순수(純粹)를 보내 불법 깨치는 첩경을 묻도록 하니 대혜선사는 그에게 법어(法語) 8편을 보여 주었다.
양서기는 학문이 풍부하고 재주가 높아 모든 문장에 능하였으나 불행하게도 풍토병으로 조양(潮陽) 광효사(光孝寺)에서 서거하니 그 누가 아쉬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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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공(誌公 : 梁 寶誌)은 봉두난발로 만행을 하고 다녔다. 제의 무제(武帝)는 그가 세인을 홀린다 하여 정치적인 박해를 가했으나 양(梁) 고조(高祖)가 즉위하자, 지공의 겉모습은 티끌 세속에 젖은 듯하나 경지는 성문(聲聞)이라면서 해금시키고 대우해주었다.
* 한 스님이 산에 암자를 짓고는 머리를 깎지도 않고 혼자 살았다. …하루는 설봉스님이 시자에게 삭도를 들려서 데리고 갔다. 그를 보자마자 칼을 들고 "말을 해라! 그러면 머리를 깎지 않겠다"고 하니 그 암주는 얼른 물을 떠다 머리를 감고 설봉스님 앞에 꿇어앉았다. 설봉스님은 그의 머리를 깎아주고 제자로 삼았다.
* 한 스님이 마조(馬祖)선사에게 4구백비를 떠나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달라고 하니 마조스님은 오늘 심기가 불편하다며 지장(西堂智藏)에게 가서 물으라 하였다. 그 스님이 지장에게 물으니 머리가 아프다며 회해(百丈懷海)에게 가서 물으라 하여 회해스님에게 가서 물으니 그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 그 스님이 마조스님에게 돌아와 그대로 고하니 마조스님이 "지장의 머리는 희고 회해의 머리는 검도다"라고 하였다.
* 외국인의 수염이 붉은데서 유래한 말로 "오랑캐 수염이 붉다하더니 정말 붉구나"하는 의미.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뜻을 가진 '侯白侯黑'과 같은 용례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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