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한국전쟁 피난 시절
60. 한국전쟁 피난시절
불필스님(성철스님의 딸) 은 아버지 얼굴을 처음 본 그 날, "가라" 고 호통치는 아버지 대신 자신을 "내 딸" 이라며 자상하게 달래주었던 향곡(香谷) 스님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 날은 불교와의 첫 만남이기도 했다.
먹을 것을 내주며 얘기를 시키던 향곡스님이 수경(불필스님의 속명) 에게 물었다.
"니는 앞으로 크면 뭐가 되고 싶노?"
향곡스님도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수경은 어릴 적부터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을 좋아했다.
"발명가가 되고 싶습니다. "
그렇게 시작된 문답인데, 어떻게 얘기하다 보니 "발명가 중에서도 사람을 연구하는 발명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를 연구해 보고 싶다" 는 식으로 얘기가 흘러갔다. 그러자 향곡스님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철(徹) 수좌보다 더 큰 사람이 되겠는데. "
향곡스님은 성철스님을 '철수좌' 라고 불렀다. 성철스님과 가까운 노스님들이 흔히 그렇게 불렀다. 여기서 '수좌' 란 선승(禪僧) 이란 말이고, 앞의 수식어인 '철' 이란 성철스님의 법명 중 뒷글자를 따서 부른 것이다. 향곡스님이 어떻게나 다정스레 대해주는지 늦게까지 얘기를 나눴다. 끝내 눈 큰 스님, 아버지 성철스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묘관음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절 아래로 내려다보니 끝 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더구만. 그 때 바다를 처음 봤지.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나 절집의 낯설음도 모두 바다 속에 묻힌 듯…. "
그렇게 아버지와의 첫 만남, 절집에서의 첫 밤은 짧고 가벼운 기억으로 끝났다. 향곡스님이 손에 쥐어준 차비로 좋은 필통을 사 오래도록 사용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다음해 6.25전쟁이 터졌다. 서울이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포소리, 총소리에 숨을 죽이고 지하실에서 이불을 덮고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탱크와 인민군이 열을 지어 서울로 들어왔다. 한 달을 머물다가 더 이상 서울에 있을 수 없겠다 싶어 수경은 고향집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피난민 행렬에 가세했다.
3백여 명의 일행이 한 무리를 이뤄 남쪽으로 걸어갔다. 비행기가 보이면 콩밭이나 숲 속에 엎드려 숨었다. 멀쩡히 옆에 있던 사람이 일어나지 못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죽고 헤어지고, 산 넘고 물 건너 마침내 대구에 도착했다. 다음날 국회의원인 친척 이병홍씨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간신히 마산행 열차를 탈 수 있게 해주었다.
잿더미로 변한 진주에 도착해 아는 분을 만나 묵곡 소식을 들으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눈물을 삼켜가며 고향집에 도착하니 할아버지는 살아계셨다. 소를 끌고가는 인민군을 혼내다 이를 말리는 동네 사람에 업혀 나갔던 것이 잘못 소문난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살아온 손녀를 다시는 서울로 보내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수경은 진주사범 병설 중학교에 다니게 됐고, 졸업후엔 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시절이었다. 친구의 권유에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스님이 된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 이 적지않게 작용한 결과였다고 한다. 할머니가 아버지를 생각해서인지 자꾸만 "잘 생각해봐라" 는 말씀을 했다.
한편 성철스님은 묘관음사에 있다가 전쟁이 나자 남쪽으로 내려와 경남 고성 문수암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갈 즈음 통영 안정사 옆 골짜기에 초가집을 짓고 '천제굴(闡堤窟) ' 이라 이름 붙이고 들어 앉았다.
묵곡 근처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 할머니(성철스님의 어머니) 와 가까웠던 비구니 성원(性原.현 해인사 국일암 감원) 스님이 그 소식을 듣고 할머니를 모시고 천제굴로 갔다.
큰스님은 어머니를 보자마자 "와 우리 어무이를 이리 데려왔노?" 라며 성원스님을 꾸짖기 시작했다. 어찌나 엄하게 꾸짖는지 성원스님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러고 얼마 지난 후 수경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 보니 어떤 스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의 해인사 방장이신 법전스님이다.
"큰스님이 한 번 오라고 하신다. "
생각지도 않던 아버지 성철스님의 호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