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공주규약(共住規約)
89. 공주규약(共住規約)
성철 스님과 도반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산다' 는 취지에 맞춰 개혁불교의 틀을 갖추어가던 봉암사 결사.
그 정신을 오늘까지 생생하게 전해주는 문서가 있다. 성철 스님이 직접 붓을 들어 썼던 일종의 행동지침, 즉 '공주규약(共住規約) ' 이다. 성철 스님은 같은 내용을 써 붙이면서 간혹 '공주강칙(綱則) ' 이라 쓰기도 했다. 모두 같은 의미, 즉 스님들이 공동생활에서 지켜야할 규칙이란 뜻이다.
한가지라도 지키지 않을 경우 성철 스님이 사정 없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몽둥이를 휘두르곤 했다던 규칙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의 두 항목은 총칙이다.
- '삼엄한 부처님 계율과 숭고한 조사의 유훈을 부지런히 닦고 힘써 실행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원만하고 빠르게 이를 것을 기약한다. '
-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사견은 절대 배척한다. '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수행과 득도에 매진하며,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의 모든 사견을 배척한다는 다짐이다. 세번째부터는 구체적인 행동강령이다.
- '생활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은 자급자족의 원칙에 따른다. 물 기르고, 나무하고, 밭에 씨 뿌리며, 탁발하는 등 어떠한 어려운 일도 사양하지 않는다. '
- '소작인(절소유 농토를 개간하는 농민) 이 내는 사용료와 신도들의 특별한 보시에 의한 생활은 단연히 청산한다. '
-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은 열두 시를 지나지 않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
- '앉는 차례는 비구계 받은 순서로 한다. '
- '방 안에서는 늘 면벽좌선(面壁坐禪.벽을 마주보고 앉아 참선) 하고 잡담을 절대 금지한다. '
모두 18개항에 이르는 조항은 모두 한국불교의 현재 모습을 결정지은 원칙들이다. 54년전, 스님들의 삶이 세속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던 당시엔 일대혁신의 규약이 아닐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라는 성철 스님의 한마디가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세속화된 왜색 불교를 혁파하는 파천황(破天荒) 의 변혁인 셈이다.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던 성철 스님이 강조한 개혁의 촛점은 3가지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토속신앙.도교신앙이 뒤죽박죽돼 조선조 5백여년을 내려왔던 불교의 제자리찾기. 법당의 각종 신상을 모두 없애고 부처님과 그 제자의 상(像) 만 남긴 것이 그 대표적인 조치다.
둘째는 스님들의 일상 개혁. 가사와 바리때를 바꾸고, 새로운 모습으로 탁발.동냥하며 검소한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선불교(禪佛敎) 를 바른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삼자는 것, 즉 선불교의 전통을 확립한 것이다. 성철 스님은 항상 선불교 전통에 따른 '참선' 을 강조했으며, 마지막 열반의 순간에도 "참선 잘 하그래이" 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선불교의 전통을 강조해왔다.
이같은 엄격한 규율에 따른 수행의 결과가 오늘날까지 한국불교를 이끌어오는 큰스님들의 무더기 탄생이다.
흔히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들 중에서 '3종정, 5총무원장, 4원로의장' 이 나왔다고 말한다.
종정은 조계종의 최고 정신적 지도자, 총무원장은 불교행정의 수반, 원로의장은 불교계의 상원의장격이다. 다시말해 불교계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들의 자리인 셈이다.
성철 스님외에 도반이었던 청담 스님, 그리고 후배격인 현 종정 혜암 스님이 모두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분들이다.
총무원장을 지낸 분은 청담.월산.자운.성수.법전 스님까지 모두 다섯. 원로의장 자리에는 월산.자운.혜암.법전 스님이 올랐다.
호사다마(好事多魔) . 득도의 열정으로 눈빛이 반짝이던 스님들이 불교계의 면모를 일신하는 수행에 매진하던 봉암사 결사는 오래지 않아 중단되고 만다. 결사에 동참했던 도우 스님의 말씀.
"청담 스님까지 합류해 일이 잡혀 가고 있는데, 왠지 심상치 않은 일들이 그 깊은 산골짜기에서도 가끔 일어났어요.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와서 식량을 약탈해 간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얼마뒤에는 절에까지 찾아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