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 물은 물

90. 봉암사 탈출

쪽빛마루 2010. 1. 19. 20:29

90. 봉암사 탈출



한국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봉암사 결사는 6.25를 앞둔 불안한 상황에서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전쟁발발 직전 빨치산들이 백두대간을 타고 남북을 오가며 게릴라전을 벌였으며, 경북 문경 봉암사는 빨치산들이 오가는 깊은 산중 길목에 있었던 탓이다.봉암사 결사에 동참했던 도우 스님의 기억.

"어느 날 빨치산들이 봉암사에 들이닥쳐 깎아 놓은 곶감을 몽땅 가져간 적이 있었죠. 그런데, 무슨 일인지 원주(작은 절의 주지) 를 맡고 있던 보경 스님을 인민재판에 부쳐 처형해야 한다며 잡아갈려고 했어요. 그때 여러가지 경험이 많고, 또 나이도 원만했던 청담 스님이 나서 간곡하게 빨치산을 설득해 겨우 총살을 면할 수 있었지요."

식량도 식량이지만 인명이 훼손될 위기에 직면하면서 수행 분위기가 급속히 흐트러졌다.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성철 스님은 안전한 경남 기장의 관음사로 옮겼다.

다시 경남 고성의 문수암으로 옮겨 수행 중 전쟁이 터졌으며, 성철 스님은 다음해 경남 통영 안정사에 자리 잡았다. 당시 함께 수행했던 원로회의 의장 법전 스님의 회고.

"성철 스님이 안정사 토굴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가 도우 스님 하고 둘이서 모셨습니다. 당시 성철 스님은 안정사 주지에게 양해을 얻어 별도의 토굴, 초가를 이은 세 칸 짜리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천제굴(闡提窟) 이라고 붙였죠."

천제굴이란 '부처가 될 수 없는 집'이란 뜻이다. 득도해 부처가 되기위한 수행을 하는 스님으로서는 매우 역설적인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몇 사람이 모여 살다가 하나 둘 떠나고 남은 사람은 성철 스님과 법전 스님 두 사람이었다.

"성철 스님은 비록 봉암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 결사의 정신만은 한 치의 빈틈 없이 간직하고 계셨지요. 봉암사에서 결의한 그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수행을 계속했습니다."(법전 스님)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 올리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자급자족의 원칙에 따라 두 스님은 아침을 먹고 산으로 가 나무를 하고 밭을 맸다. 성철 스님을 모시는 입장인 법전 스님은 더 바빠야했다. 성철 스님의 생식을 돕기위해 과일즙도 내고, 약탕을 지어 올리기도 했다.

천제굴 시절 얘기를 하자면 반드시 언급해야 할 또 다른 스님이 한 사람 있다. 바로 현재 부산 해월정사에 머물고 있는 천제 스님이다. 성철 스님의 첫번째 상좌, 곧 성철 스님 제자 중 가장 맏상좌인 분이다. 천제 스님이 처음 토굴을 찾아간 것은 6.25 전란중 병을 얻어 숨진 아버지의 천도재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성철 스님은 당시 악신(惡神) 도 천도시킨다는 도인(道人) 으로 알려져 있었다. 천제 스님의 기억.

"천도재를 마친 후 성철 스님이 들려준 자상한 위로의 말씀은 저의 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부친을 떠나 보내고 마음의 부친을 만나는 순간이었지요. 인생의 무상함과 불교에서 보는 죽음의 의미를 쉬운 말로 설명해 주었는데, 그 순간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성철 스님은 재(齋) 를 지낼 때도 봉암사 결사의 정신, 곧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신도들 스스로가 불공을 올리게 했다.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차별없이, 찾아오는 신도들은 모두 부엌에서 직접 밥을 지어 불전에 공양을 올려야 했다.

또 불공은 자신이 직접 해야지 스님들께 부탁해서는 공덕이 되지 않는다며 삼천배(三千拜) 를 하게 했다. 그런 성철 스님의 모습과 가르침은 아직도 천제 스님의 머리 속에 생생하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봉암사 결사가 6.25 전란으로 중도에 그친 일을 못내 아쉬워하셨습니다. 늘 봉암사의 정신을 강조했지요. 비록 몇 사람 안되는 스님들이 같이 사는 천제굴이었지만 공주규약의 원칙을 꼭 지켰습니다. 스님은 범어를 손수 우리말로 음역하고 불교의 예식을 정비해갔습니다. 한국불교 중흥을 위한 집념은 전란 중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