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산 물은 물

93. 뜨거운 학구열

쪽빛마루 2010. 1. 19. 20:31

93. 뜨거운 학구열



성철 스님이 대구 파계사 부속 성전암에 머물던 10년간 스님을 줄곧 모셨던 첫번째 상좌 천제 스님은 그 시절을 '외부와의 철저한 단절', 그리고 '뜨거운 학구열'의 시절로 요약한다.

꼭 필요한 외부와의 창구역은 천제 스님의 몫이었다. 당시 스무살 전후로 행자였던 천제 스님은 필요한 물건을 구하기 위해 대구까지 50여리 길을 걸어다녀야 했다.

그런 행자의 어려움에 아랑곳 않는 성철 스님은 김병용 거사로부터 받은 장서를 독파하는 한편 다른 책과 자료들까지 구해 읽는 학구열을 보였다. 천제 스님이 지켜본 큰스님의 학구열.

"1950년대만 해도 바다 건너 서구 학자들의 학술적 연구성과를 얻어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지요. 성철 스님은 본인이 장서를 보거나 간혹 찾아오는 학자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 새로운 주장을 담은 책이나 자료가 나왔다고 하면 꼭 구해오라고 당부했습니다. 특히 관심을 많이 가졌던 것은 아무래도 불교 교리와 관련된 것들인데, 연줄 연줄로 여러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했지요."

성철 스님은 나아가 영혼의 존재, 불교적 인식론을 담고 있는 물리학적 근거, 전생에 대한 시험을 담은 자료 등에도 관심이 많았다.

또 "불교가 늙은 종교라고 생각하는 일반적 관념은 맞지 않다"며 스스로 국내외의 돌아가는 현실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당시 정부당국의 검열에 따라 한국관련 기사를 모두 도려내 구멍이 뻥뻥 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 '을 수시로 구해 읽었으며, 세계적 시사화보집인 '라이프(Life) '도 사오라고 지시하곤 했다고 한다. 책과 자료에 관한 성철 스님의 애착에 대한 천제 스님의 기억.

"아무래도 불교와 관련된 외국자료는 일본에서 많이 나왔는데, 성철 스님은 아는 사람들에게 그런 자료의 구입을 부탁하곤 했습니다. 한번은 『남전대장경』이란 책을 일본에서 주문했는데, 부산항에서 하역하던 도중 인부들이 실수로 전질을 바다에 빠트려 수장(水葬) 됐지요. 성철 스님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부탁, 결국 그 책을 구해 읽었습니다. 당시 성철 스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불교관련 서적을 지닌 분이었고, 또 가장 많은 책을 읽은 분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성전암에서 10년간 공부한 결과가 이후 해인총림 방장 시절 행한 백일법문(百日法聞) , 나아가 이후 쉬우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법문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성철 스님은 스스로 공부할 뿐 아니라 행자이던 제자들에게도 영어와 같은 세속적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가르쳤다. 천제 스님이 '천재(天才) '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바로 그같은 성철 스님의 교육열 때문이다.

"성철 스님은 불전(佛典) 원전 강독을 위해서는 범어를 알아야 하고, 또 범어 공부를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어떤 교수에게 특별히 부탁해 저에게 영어를 가르치게 했습니다. 잠시 그 교수분에게 배우고, 다음부터는 독학했지요."

동진출가(童眞出家.어려서 출가) 했지만 천제 스님은 영어 실력이 상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천제 스님과 더불어 또 한 분, 10년간 행자로 성철 스님을 모신 스님이 만수 스님이다. 만수 스님은 성정이 어질어 큰스님이 참 좋아했다고 한다. 만수 스님의 그런 성격을 말해주는 일화.

눈이 쏟아진 어느 겨울날, 성철 스님이 산책을 하는데 눈밭에 속옷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빨래하기 싫어 눈밭에 버려놓았나'라고 생각한 성철 스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거 누구 옷이고?"

행자인 만수 스님이 뛰어나왔다.

"제 옷임니더."

성철 스님이 "옷을 와 이래 눈 위에 버려놨노?"고 묻자 대답이 걸작이다.

"이가 많아 간지러워 죽겠는데, 그렇다고 죽일 수는 없고 해서…, 추우면 도망가지 싶어 눈밭에 걸쳐 두었심니더."

성철 스님도 그런 만수 스님을 야단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만수 스님의 별명은 '사전'이다. 성전암에 살면서 '영어공부하라'는 성철 스님의 명에 따라 혼자 사전을 줄줄 외우고다녀 얻은 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