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해탈의 길
해탈의 길
1. 한 물건[一物]
한 물건이 있으니 천지(天地)가 생기기 정에도 항상 있었고, 천지가 다 없어진 후에도 항상 있다. 천지가 천번 생기고 만번 부서져도 이 물건은 털끝만치도 변동 없이 항상 있다.
크기로 말하면 가없는 허공의 몇억만 배가 되어 헤아릴 수 없이 크다. 그래서 이 물건의 크기를 큰 바다에 비유하면, 시방의 넓고 넓은 허공은 바다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물거품과 같다.
또 일월(日月)보다 몇억만 배나 더 밝은 광명으로써 항상 시방세계를 비추고 있다. 밝음과 어두움을 벗어난 이 절대적인 광명은 항상 우주 만물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이 물건은 모든 명상(名相)과 분별(分別)을 떠난 절대적인 것이다. 절대라는 이름도 붙일 수 없지만 부득이해서 절대라는 것이다.
한 물건이란 이름도 지을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한 물건〔一物〕이란 이름으로 표현하니, 한 물건이란 이름을 붙일 때 벌써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일시에 나타나서 억천만겁이 다하도록 설명하려 해도, 이 물건을 털끝만치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기가 깨쳐서 쓸 따름이요, 남에게 설명도 못하고 전할 수도 없다.
이 물건을 깨친 사람은 부처라 하여, 생사고(生死苦)를 영원히 벗어나서 미래가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것이다.
이 물건을 깨치지 못한 중생들은 항상 생사바다를 헤매어 사생육도(四生六道)에 윤회하면서, 억천만겁토록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중생이라도 다 이 물건을 가지고 있다. 깨진 부처나 깨치지 못한 조그마한 벌레까지도 똑같이 가지고 있다. 다른 것은, 이 물건을 깨쳤느냐 못 깨쳤느냐에 있다.
석가(釋迦)와 달마(達磨)도 이 물건은 눈을 들고 보지도 못하고, 입을 열어 설명하지도 못한다. 이 물건을 보려고 하면 석가도 눈이 멀고 달마도 눈이 먼다. 또 이 물건을 설명하려고 하면 부처와 조사가 다 벙어리가 되는 것이다. 오직 깨쳐서 자유자재하게 쓸 따름이다.
그러므로 고인(古人)이 말씀하기를, "대장경은 모두 고름 닦아 버린 헌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말하노니, "팔만대장경으로써 사람을 살리려는 것은 비상으로써 사람을 살리려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경전 가운데도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이 있으니, 대승경에서는 말하기를 "설사 비상을 사람에게 먹일지언정 소승경법(小乘經法)으로써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승경 역시 비상인 줄 왜 몰랐을까? 알면서도 부득이한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크게 정신차려야 한다.
오직 이 한 물건만 믿는 것을 바른 신심(信心)이라 한다. 석가도 쓸데없고 달마도 쓸데없다. 팔만장경(八萬藏經)이란 다 무슨 잔소리인가? 오로지 이 한 물건만 믿고 이것 깨치는 공부만 할 따름이요, 그 외에는 전부 외도며 마구니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염불해서 죽어 극락세계에 가서 말할 수 없는 쾌락을 받는데, 나는 이 한 물건 찾는 공부를 하다가 잘못되어 지옥에 떨어져 억천만겁토록 무한한 고통을 받더라도, 조금도 후회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오직 이 공부를 성취하고야 만다!' 이러한 결심이 아니면 도저히 이 공부는 성취하지 못한다.
고인은 말씀하기를,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한번 깜짝이지 않는 사람이라야 공부를 성취한다"고 하였다. 나는 말하노니, "청상과부가 외동아들이 벼락을 맞아 죽어도 눈썹 하나 까딱 이지 않을 만한 무서운 생각이 아니면 절대로 이 공부할 생각을 말아라"고 하겠다.
천근을 들려면 천근 들 힘이 필요하고, 만근을 들려면 만근들 힘이 필요하다. 열근도 못 들 힘을 가지고 천근 만근을 들라면,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면 미친 사람일 것이다. 힘이 부족하면 하루바삐 힘을 길러야 한다.
자기를 낳아 길러준 가장 은혜 깊은 부모가 굶어서 길바닥에 엎어져 죽더라도 눈 한번 거들떠보지 않는 무서운 마음, 이것이 고인의 결심이다.
제왕(帝王)이 스승으로 모시려 하여도 목을 베이면 베였지 절대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고인의 지조(志操)이다.
사해(四海)의 부귀(富貴)는 풀잎 끝의 이슬 방울이요, 만승의 천자는 진흙 위의 똥덩이라는 이런 생각, 이런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야 꿈결 같은 세상 영화를 벗어나 영원불멸한 행복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털끝만한 이해로써 칼부림이 나는, 소위 지금의 공부인(工夫人)과는 하늘과 땅인 것이다.
다 떨어진 헌 누더기로써 거품 같은 이 몸을 가리고 심산 토굴에서 감자나 심어 먹고 사는, 최저의 생활로써 최대의 노력을 하여야 한다.
오직 대도(大道)를 성취하기 위하여 자나깨나 죽을 힘 다해서 공부해야 한다.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시키지 않으면 대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한다.
사람 몸 얻기도 어렵고, 불법 만나기도 어렵다. 모든 불보살(佛菩薩)은 중생들이 항상 죄 짓는 것을 보고 잠시도 눈물 마를 때가 없다고 한다.
중생이란 알고도 죄 짓고 모르고도 죄 짓는다. 항상 말할 수 없이 많이 지은 죄보(罪報)로써 사생육도(四生六途)를 돌아다니며,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게 된다. 따라서 사람 몸 얻기란 사막에서 풀잎 얻는 것과 같다. 설사 사람 몸 얻게 된다 하더라도 워낙 죄업이 지중해서 불법 만나기란 더 어렵고 어렵다. 과거에 수많은 부처님이 출현하시어 한량없는 중생을 제도했건만 아직껏 생사고를 면치 못한 것을 보면, 불법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것이다.
이렇게 얻기 어려운 사람 몸을 얻어 더 한층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났으니, 생명을 떼어놓고 공부하여 속히 이 한 물건을 깨쳐야 한다.
사람의 생명은 허망해서 믿을 수 없나니, 어른도 죽고, 아이도 죽고, 병든 사람도 죽고, 멀쩡한 사람도 죽는다. 어느 때 어떻게 죽을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생명이니 어지 공부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리오?
이 물건을 깨치기 전에 만약 죽게 된다면, 또 짐승이 될는지, 새가 될는지, 지옥에 떨어질는지, 어느 때 다시 사람 몸 받아서 불법을 만나게 될는지, 불법을 만나도 최상 최고의 길인 이 이 한 물건 찾는 공부를 하게 될는지, 참으로 발 뻗고 통곡할 일이다.
이다지도 얻기 어려운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에 공부하여 이 몸을 건지리오?
제일도 노력, 제이 제삼도 노력, 노력 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노력한 그만큼 성공하는 법이니, 노력하고 노력할지어다.
2. 상주불멸(常住不滅)
부처님께서 도를 깨치고 처음으로 외치시되 "기이(奇異)하고 기이하다. 모든 중생이 다, 항상 있어 없어지지 않는〔常住不滅〕 불성(불性)을 가지고 있구나! 그것을 모르고 헛되이 헤매며 한없이 고생만 하니, 참으로 안타깝다"고 하셨다.
이 말씀이 허망한 우리 인간에게 영원불멸의 생명체(生命體)가 있음을 선언한 첫소식이다. 그리하여 암흑 속에 잠겼던 모든 생명이 영원한 구제의 길을 얻게 되었으니,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수 있으랴! 억만겁이 다하도록 예배드리며 공양을 올리고 찬탄하자.
영원히 빛나는 이 생명체도, 도를 닦아 그 광명을 발하기 전에는 항상 어두움에 가려서 전후가 캄캄하다. 그리하여 몸을 바꾸게 되면 전생(前生) 일은 아주 잊어 버리고 말아서, 참다운 생명이 연속하여 없어지지 않는 줄을 모른다.
도를 깨치면 봉사가 눈뜬 때와 같아서 영원히 어둡지 않아, 천번 만번 몸을 바꾸어도 항상 밝다. 눈뜨기 전에는 몸 바꿀 때 아주 죽는 줄 알았지만 눈뜬 후는 항상 밝으므로, 몸 바꾸는 것이 산 사람 옷 바꿔 입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눈뜨기 전에는 항상 업(業)에 끄달려 고(苦)만 받고 조금도 자유가 없지만, 눈을 뜨면 대자유와 대지혜로써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실생활에서 보면, 아무리 총명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도 도를 깨치기 전에는, 잠이 깊이 들었을 때는 정신이 캄캄하여 죽은 사람같이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도를 깨친 사람은 항상 밝기 때문에 아무리 잠을 자도 캄캄하고 어두운 일이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참으로 도를 깨쳤나를 시험하려면 잠을 자 보면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천하없이 크게 깨친 것 같고 모든 불법 다 안 것 같아도, 잠잘 때 캄캄하면 참으로 깨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큰 도인들이 여기에 대해서 가장 주의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명(明)과 암(暗)을 초월한 절대적인 광명이니, 곧 사물의 법성(法性)이며, 불성 자체이다.
상주불멸(常住不滅)하는 법성(法性)을 깨치고 보면, 그 힘은 상상할 수도 없이 커서 비단 세속의 학자들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내가 말하는 법성은 깨치고 보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일시에 나서서 천만년이 다하도록 그 법성을 설명하려 하여도 털끝 하나만큼도 설명하지 못할 만큼 신기하다. 시방허공(十方虛空)이 넓지마는 법성의 넓이에 비교하면 법성은 대해 같고 시방허공은 바다 가운데 조그마한 거품 같다. 허공이 억천만년 동안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있지만 법성의 생명에 비교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하다.'고 하시니, 이것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설명이다. 이렇듯 거룩한 법을 닦게 되는 우리의 행복을 어디다 비유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고인은 이 법문 한마디 들으려고 전신을 불살랐으니, 이 몸을 천만 번 불살라 부처님께 올려도 그 은혜는 천만 분의 일도 갚지 못할 것이다. 오직 부지런히 공부하여 어서 빨리 도를 깨칠 때, 비로소 부처님과 도인스님들의 은혜를 일시에 갚는 때이니, 힘쓰고 힘써라!
3. 위법망구
●혜가대사(慧可大師)
달마가 처음으로 법을 전하려고 중국에 가서 소림사(少林寺) 토굴 속에 들어가 9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었다. 그때 신광(神光)이란 중이 있었는데, 학식이 뛰어나 천하에 당할 사람이 없었다. 학문으로써는 대도를 알 수 없는 줄을 알고 달마를 찾아가서 법을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돌아보지도 않았다. 섣달 한창 추운 계절인데, 하루는 뜰 밑에 서서 밤을 지내니 마침 눈이 와서 허리까지 묻혔다. 그래도 신광은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섰으니 달마가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돌아보며 "이 법은 참으로 무서운 결심을 하지 않으면 도저히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니, 너 같은 보잘것없는 심신으로 무얼 하겠느냐?"고 꾸짖으며 "썩 물러가라" 하였다. 신광은 그 말을 듣자 칼을 들어 팔을 끊어 달마대사에게 바치고 도를 구하는 결심을 표시했다. 달마대사는 그제서야 머물기를 승낙하고 법을 가르치니, 신광은 나중에 법을 전한 유명한 2조 혜가대사(慧可大師)이시다.
●왕화상(王和尙)
혜통(慧通)스님은 신라 사람이다. 그 당시 선무외(善無畏)화상이 인도로부터 중국에 들어와 법을 편다는 말을 들은 혜통스님은 수륙만리를 멀지 않게 생각하고 신라에서 중국으로 선무외화상을 찾아갔다.
가서 제자로 받아 줄 것을 아무리 간청하여도 거절당하였다. 그렇게 3년 동안이나 온갖 노력을 다하여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시종 거절당하였다.
하루는 큰 쇠화로에다 숯불을 가득 담아 그것을 이고 무외스님의 방 앞에 가서 서 있었다. 화로가 달아서 머리가 익어 터지니 소리가 크게 났다. 무외스님이 놀라서 나와 보고 급히 화로를 내려놓고 "왜 이러느냐?"고 물으니, 혜통이 대답하기를, "제가 법을 배우러 천리만리를 멀다 않고 왔습니다. 만약 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신다면 몸이 불에 타서 재가 되어 날아 갔으면 갔지, 죽은 송장으로 절대로 나갈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무외스님은 그 기개를 인정하여 터진 곳을 손으로 만져 합치고 법을 가르쳐 주기로 승낙하였다. 그리하여 크게 성공해서 신라로 돌아와 많은 사람을 교화하였다. 그후 머리가 나은 곳에 큰 흉터가 졌는데 왕(王)자 모양이 되어 있어서 세상 사람들이 왕화상(王和尙)이라고 불렀다.
●포모시자(布毛侍者)
포모시자 초현 통(招賢通)선사는 당나라 때 사람이다. 젊었을 때 육관대사(六官大使) 벼슬을 하다가 홀연히 지상의 허망을 깨달아 벼슬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 그 당시 나무 위에 새집처럼 집을 짓고 사는 이가 있었으니, 유명한 조과선사(鳥窠禪師)이다. 찾아가 '법을 배우겠다'하니 스님은 절대로 듣지 않았다. 그래도 가지 않고 모든 시봉(侍奉)을 하며 날마다 법 가르쳐 주기만을 지성으로 빌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법을 가르쳐 줄까 기다리다가, 세월이 흘러서 16년이나 되어도 한말도 일러주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그때는 하도 기가 막혀서 그만 가려고 하니 조과스님이 물었다.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
"다른 곳으로 불법을 배우러 갑니다."
"불법 같으면 나에게 조금은 있다."
하며 포모(布毛)를 들고 확 부니, 그것을 보고 초현은 확철히 깨쳤다. 그리고 또 오랫동안 시봉하다가 나중에 출세해서 큰 도인이 되었으니, 그를 세상에서는 포모시자(布毛侍者)라 불렀다.
●자명선사(慈明禪師)
자명선사는 임제종의 대표적인 도인이다. 분양(汾陽)화상 밑에서 지내면서 추운 겨울에도 밤낮으로 정진하며, 밤이 되어 졸리면 송곳으로 허벅다리를 찌르며 탄식하기를, "고인은 도를 위하여 먹지도 아니하고 자지도 않았거늘, 나는 또한 어떤 놈이기에 게으르고 방종하여 살아서는 때에 보탬이 없고 죽어서는 후세에 이름 없으니 너는 무엇하는 놈이냐?" 하였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공부하더니, 후에 크게 깨쳐 분양선사의 도풍을 크게 떨쳤다.
●불등선사(佛燈禪師)
불등선사는 불감(佛鑑)스님 밑에서 지낼 때에 하도 공부가 되지 않아서. 크게 분심을 내어 '만약 내가 금생에 철저히 깨치지 못하면 맹세코 자리에 눕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49일간을 기둥에 기대어 서기만 하고 조금도 앉지도 않고 꼭 서서 공부를 하여 마침내 크게 깨쳤다.
●도안선사(道安禪師)
도안선사는 중국 진(晋)나라 때 사람이니, 천고(千古)에 드문 천재였으나 도를 깨치려고 홀로 20년간 방에 들어앉아서 죽을 힘을 다하여 공부한 끝에 마침내 깨쳤다.
●이암선사(伊庵禪師)
이암 권(伊庵權) 선사는 공부할 적에, 해가 지면 눈물을 흘리며 "오늘도 또 이렇게 헛되이 보냈구나!" 하며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리하여 누구와도 절대로 말을 건네지 않고 지내며 정진하였다.
4. 수도팔계(修道八戒)
억천만겁토록 생사고해를 헤매다가, 어려운 일 가운데도 어려운 사람 몸을 받고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제도할꼬.'
철석 같은 의지, 서릿발 같은 결심으로 혼자서 만 사람이나 되는 적을 상대하듯,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마침내 물러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야만 한다. 오직 영원한 해탈, 즉 '성불(成佛)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한다'는 굳은 결의로써 정진하면 결정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1) 절속(絶俗)
세속은 윤회의 길이오, 출가는 해탈의 길이니, 해탈을 위하여 세속을 단연히 끊어 버려야 한다.
부모의 깊은 은혜는 출가수도로써 보답한다. 만약 부모의 은혜에 끌리게 되면 이는 부모를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이니, 부모를 길 위의 행인과 같이 대하여야 한다.
황벽 희운선사가 수천 명의 대중을 거느리고 황벽산(黃檗山)에 주석하였다. 그때 노모가 의지할 곳이 없어서 아들을 찾아갔다. 희운선사가 그 말을 듣고는 대중들에게 명령을 내려 물 한 모금도 주지 못하게 하였다. 노모는 하도 기가 막혀 아무 말 못하고 돌아가다가, 대의강(大義江)가에 가서 배가 고파 엎어져 죽었다. 그리고 그날 밤 희운선사에게 현몽하여 "내가 너에게서 물 한 모금이라도 얻어 먹었던들, 다생(多生)으로 내려오던 모자의 정을 끊지 못해서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쫓겨나올 때 모자의 깊은 애정이 다 끊어져서 그 공덕으로 죽어 천상으로 가게 되니, 너의 은혜는 말 할 수 없다"고 하며 절하고 갔다 한다.
부처님은 사해군왕(四海君王)의 높은 지위도 헌신짝같이 벗어던져 버렸으니, 이는 수도인의 만세모범(萬世模範)이다.
그러므로 한때의 환몽(幻夢)인 부모 처자와 부귀영화 등 일체를 희생하여 전연 돌보지 아니하고 오직 수도에만 전력하여야 한다.
또 수도에는 인정이 원수다. 인정이 두터우면 애욕이 아니더라도 그 인정에 끄달리어 공부를 못하게 된다. 아무리 동성끼리라도 서로 인정이 많으면 공부에는 원수인 줄 알아야 한다. 서로 돕고 서로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이것이 생사윤회의 출발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서로 싸운 사람같이 지내라"고 고인도 말씀하였다.
일체 선인악업(善因惡業)을 다 버리고, 영원의 자유와 더불어 독행독보(獨行獨步) 해야 한다. 일반에 있어서 일대 낙오자가 되어 참으로 고독한 사람이 되지 않고는 무상대도(無上大道)는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니 일반인과는 삼팔선을 그어 놓고 살아야 한다. 삼팔선을 터놓고 일반인과 더불어 타협할 때 벌써 엄벙덤벙 허송세월 하다가 아주 죽어 버리는 때를 보내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2) 금욕(禁慾)
욕심 가운데 제일 무서운 것이 색욕(色慾)이다. 색욕 때문에 나라도 망치고 집안도 망치고 자기도 망친다. 이 색욕 때문에 나라를 다 망쳐도 뉘우칠 줄 모르는 것이 중생이다.
그러므로 수도하는 데도 이것이 제일 방해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것이 하나뿐이기 다행이지, 만약 색욕 같은 것이 둘만 되었던들 천하에 수도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색욕이란 무서운 것이니, 이 색욕에 끄달리게 되면 수도는 그만두고라도 지옥도 피할래야 피할 수 없으니, 도를 성취하고 실패하는 것은 색욕을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데 달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 무서운 색욕을 근본적으로 끊으려면 도를 성취하기 전에는 안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도를 성취하기 전에는 네 마음도 믿지 말라"고 하셨다.
만약 '색욕을 끊지 않아도 수도하는 데 관계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자기가 색욕에 끄달리어 남까지 지옥으로 끌고 갈 큰 악마인 줄 깊이 알고 그 말에 절대 속지 않아야 한다.
영가(永嘉)스님 같은 큰 도인도 항상 색욕을 경계하라 말씀하였다.
"차라리 독사에게 물려 죽을지언정 색(色)은 가까이하지 말아라. 독사에게 물리면 한 번 죽고 말지마는 색에 끄달리면 세세생생 천만겁토록 애욕의 쇠사슬에 얽매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되니 피하고 또 멀리하라."
이 얼마나 지당한 말씀인가?
만약 이것을 끊지 못하면 항상 애욕만 머리에 가득 차서 도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하여 무한한 고의 세계가 벌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다.
"색욕을 끊지 못하고 도를 닦으려 한다는 것은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이다."
예로부터 참으로 수도하는 사람이 자기의 생명은 버릴지언정 색은 범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니,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서로서로 멀리하여야 한다. 만약 가까이 하면 결국은 서로 죽고 마는 것이니, 서로서로 범과 같이 무서워하고 독사같이 피하여야 한다.
어떠한 인격자라도 이성(異性)을 믿지 말고 친근하지 말지니, 성과(聖果)를 증득하기 전에는 자신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성들의 호의는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지 사절하여야 한다.
오직 영원한 자유를 위하여 일시적인 쾌락을 끊지 못하면, 이는 인간이 아니요, 금수보다도 못한 것이다.
생사윤회의 근본은 애욕에 있으니 애욕을 끊지 않으면 해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녀가 서로서로 멀리하는 것이 성도(成道)하는 근본이니, 절대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3) 천대(賤待)
천하에 가장 용맹스러운 사람은 남에게 질 줄 아는 사람이다. 무슨 일에든지 남에게 지고 밟히고 하는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은 없다.
천대받고 모욕받는 즐거움이여,
나를 무한한 행복의 길로 이끄는 도다.
남에게 대접받을 때가 나 망하는 때이다. 나를 칭찬하고 숭배하고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나의 수도를 제일 방해하는 마구니이며 도적이다.
중상과 모략 등의 온갖 수단으로 나를 괴롭히고 헐뜯고 욕하고 해치고 괄시하는 사람보다 더 큰 은인은 없으니, 뼈를 갈아 가루를 만들어 그 은혜를 갚으려 해도 다 갚기 어렵거늘 하물며 원한을 품는단 말인가?
나의 공부를 방해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해 주고 참는 힘을 북돋아 주어 도를 일취월장(日就月將)케 해주니,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을까?
칭찬과 숭배는 나를 타락의 구렁으로 떨어뜨리나니 어찌 무서워하지 않으며, 천대와 모욕처럼 나를 굳세게 하고 채찍질 하는 것이 없으니 이 어찌 은혜가 아니랴.
그러므로 속담에도 말하지 않았는가.
'미운 자식 밥 많이 주고, 고운 자식 매 많이 때린다'
참으로 금옥(金玉) 같은 말이다.
항상 남이 나를 해치고 욕할수록 그 은혜를 깊이 깨닫고, 나는 그 사람을 더욱더 존경하며 도와야 한다.
한산과 습득스님이 천태산 국청사에 있으면서, 거짓 미친 행동으로써 모든 사람들의 모욕과 천대를 받고 있었다.
그 주위 지사가 성인인 줄 알고 의복과 음식을 올리며 절하니 한산과 습득스님이 크게 놀라 외쳤다.
"이 도적놈아, 이 도적놈아!"
그리고는 도망쳐 달아나서는 다시 세상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옹스님은 남에게 대접받지 않고 미움과 괄시 받기 위해서 일부러 도적질을 다 하였다.
이것이 공부인(工夫人)의 진실방편(眞實方便)이다.
최잔고목(摧殘枯木)!
부러지고 이지러진 마른 나무 막대기를 말함이다.
이렇게 쓸데없는 나무 막대기는 나무꾼도 돌아보지 않는다. 땔나무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땔 물건도 못 되는 나무 막대기는 천지간에 어디 한 곳 쓸 곳이 없는 아주 못 쓰는 물건이니, 이러한 물건이 되지 않으면 공부인이 되지 못한다.
결국은 저 잘난 싸움마당에서 춤추는 미친 사람이 되고 말아서, 공부 길은 영영 멀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인은 세상에서 아무 쓸 곳이 없는 대낙오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영원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 버리고, 세상을 아주 등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버림받는 사람, 어느 곳에서나 멸시당하는 사람, 살아 나가는 길이란 공부 길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불법 가운데서도 버림받은 사람, 쓸데없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영원한 자유를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천태 지자대사 같은 천고의 고승도 죽을 때 탄식하였다.
"내가 만일 대중을 거느리지 않았던들 육근청정(六根淸淨)의 성위(聖位)에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어른 노릇하느라고 오품범위(五品凡位)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지자대사 같은 분도 이렇게 말씀하였거늘, 하물며 그 외 사람들이랴.
(4) 하심(下心)
좋고 영광스러운 것은 항상 남에게 미루고, 남부끄럽고 욕되는 것은 남모르게 내가 뒤집어쓰는 것이 수도인의 행동이다.
육조대사가 말씀하였다.
"항상 자기의 허물만 보고 남의 시비, 선악은 보지 못한다."
이 말씀이야말로 공부하는 사람의 눈이다.
내 옳음이 추호라도 있을 때에는 내 허물이 태산보다 크다. 나의 옳음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라야 조금 철이 난 사람이다. 그렇게 되면 무슨 일이든지 온통 내 허물만 보이고, 남의 허물은 볼래야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상 모두가 '나 옳고 너 그른 싸움'이니, 나 그르고 너 옳은 줄만 알면 싸움이 영원히 그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깊이 깨달아 '나 옳고 너 그름'을 버리고 항상 나의 허물, 나의 잘못만 보아야 한다.
법연(法演)선사가 말씀하였다.
"20년 동안 죽을 힘을 다해서 공부하니, 이제 겨우 내 부끄러운 줄 알겠다."
'나 잘났다'고 천지를 모르고 어깨춤을 추는 어리석음에서 조금 정신을 차린 말씀이다.
뉴튼은 천고(千古)의 큰 물리학자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훌륭하다'고 많이 존경하였으나 뉴튼 자신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자기가 생각해 볼 때는 자신은 대학자는 고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데, 왜 자기를 대학자로 취급하는지 의심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말하였다.
"우주의 진리는 대해(大海)같이 넓고 깊다. 그러나 나는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이나 줍고 노는 어린아이에 불과하여, 진리의 바다에는 발 한번 적셔 보지 못했다."
이 말도 자기의 어리석음을 조금 짐작하는 말이다.
서양의 제일가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항상 크게 외쳤다.
"나는 단지 한 가지만 안다. 그것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볼 때, 세상 사람들은 참으로 저 못난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요, 다 저 잘나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임제종의 중흥조인 법연선사의 말씀을 잊지 말자. 누가 법문을 물으면 항상 말씀하셨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천하의 어리석은 사람들이여,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떠드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상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는 위대한 인물은, 오로지 모든 사람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잘나지 못함을 자각하는만큼 그 사람의 인격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내가 나 잘나지 못함을 철저히 깨달아 일체를 부처님과 같이 섬기게 되면, 일체가 나를 부처님과 같이 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낮고 낮은 곳이 자연히 바다가 되나니, 이것은 일부러 남에게 존경을 받으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남에게 존경을 받을 생각이 있으면, 남이 존경을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내 몸을 낮추고 또 낮추어 밑 없는 곳까지 내려가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더라."
공자(孔子)가 노자(老子)를 보러 가니, 노자가 말했다.
"그대를 보니 살과 뼈는 다 썩고 오직 입만 살았구나! 큰 부자는 재산을 깊이 감추어 없는 것같이 하고 어진 사람은 얼굴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이 하나니, 그대의 교만한 행동과 도도한 생각을 버려라. 무엇을 알기에 그렇게 잘난 척하는가?"
공자가 듣고 크게 탄복하여, 노자를 '용과 같다'고 하였다. 노자가 또 공자에게 말하였다.
"내 부탁하노니 누구든지 총명한 사람이 그 몸을 망치는 것은 다 남의 허물을 잘 말하기 때문이니, 부디부디 조심해서 남의 나쁜 것과 그른 것을 입밖에 내지 말아라."
이 두 분은 지상에서 큰 성인이라 존경하는 바이다. 서로 처음 만났을 적에 이런 말로써 경계하니, 누구든지 일생 동안 지켜도 남을 말들이다.
하심(下心)의 덕목을 몇 가지 적어 본다.
一. 도가 높을수록 마음은 더욱 낮추어야 하니,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과 같이 존경하며 원수를 부모와 같이 섬긴다.
一. 어린이나 걸인이나 어떠한 악인이라도 차별하지 말고 극히 존경한다.
一. 낮은 자리에 앉고 서며 끝에서 수행하여 남보다 앞서지 않는다.
一. 음식을 먹을 때나 물건을 나눌 때 좋은 것은 남에게 미루고 나쁜 것만 가진다.
一. 언제든지 고되고 천한 일은 자기가 한다.
(5) 정진(精進)
모든 육도만행(六度萬行)은 그 목적이 생사해탈(生死解脫), 즉 성불(成佛)에 있으니, 성불의 바른 길인 참선에 정진하지 않으면 이는 고행외도(苦行外道)에 불과하다.
정진은 일상(日常)과 몽중(夢中)과 숙면(熟眠)에 일여(一如)가 되어야 조금 상응함이 있으니, 잠시라도 화두에 간단(間斷)이 있으면 안 된다.
정진은 필사의 노력이 필수조건이니, 등한. 방일하면 미래겁이 다하여도 대도(大道)를 성취하지 못하나니, 다음의 조항을 엄수하여야 한다.
一. 네 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一. 벙어리같이 지내며 잡담하지 않는다.
一. 문맹같이 일체 문자를 보지 않는다.
一. 포식, 간식을 하지 않는다.
一. 적당한 노동을 한다.
(6) 고행(苦行)
병 가운데 제일 큰 병은 게으름병이다. 모든 죄악과 타락과 실패는 게으름에서 온다. 게으름은 편하려는 것을 의미하니, 그것은 죄악의 근본이다.
결국은 없어지고마는 이 살덩어리 하나 편하게 해주려고 온갖 죄악을 다 짓는 것이다.
노력 없는 성공이 어디 있는가?
그러므로 대성공자는 대노력가 아님이 없다. 그리고 이 육체를 이겨내는 그 정도만큼 성공이 커지는 것이다.
발명왕 에디슨이 항상 말했다.
"나의 발명은 모두 노력에 있다. 나는 날마다 20시간 노력하여 연구했다. 그렇게 30년간 계속하였으나 한번도 괴로운 생각을 해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의 정법이 두타제일(頭陀第一)인 가섭존자에게로 오지 않았는가?
총림을 창설해서 만고에 규범을 세운 백장스님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고 하지 않았는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편히만 지내려는 생각, 이러한 썩은 생각으로써는 절대로 대도는 성취하지 못한다.
땀 흘리면서 먹고 살아야 한다. 남의 밥 먹고 내 일 하려는 썩은 정신으로써는 만사불성(萬事不成)이다.
예로부터 차라리 뜨거운 쇠로 몸을 감을지언정 신심 있는 신도의 의복은 받지 말며, 뜨거운 쇳물을 마실지언정 신심 있는 신도의 음식을 얻어먹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결심 없이는 대도를 성취하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잊지 말고 잊지 말자.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만고 철칙을!
오직 영원한 대자유를 위해, 모든 고로(苦勞)를 참으로 이겨야 한다.
(7) 예참(禮懺)
일체 중생의 죄과는 곧 자기의 죄과이니, 일체 중생을 위하여 매일 백팔참회(百八懺悔)를 여섯 번 하되 평생토록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행한다.
그리고 건강과 기타 수도에 지장이 생길 때에는 모두 자기 업과이니, 1일 3,000배를 일주일 이상씩 특별 기도를 한다.
또 자기의 과오만 항상 반성하여 고쳐 나가고, 다른 사람의 시비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8) 이타(利他)
수도의 목적은 이타에 있다. 이타심이 없으면 이는 소승외도(小乘外道)이니, 심리적, 물질적으로 항상 남에게 봉사한다.
자기 수도를 위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남에게 봉사하되, 추호의 보수도 받아서는 안 된다.
노인이나 어린아이, 환자나 빈궁한 사람을 보거든 특별히 도와야 한다.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는 10대 제자 가운데서도 가장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 한다. 아무리 착하고 좋은 일이라도 귀신도 모르게 한다. 오직 대도를 성취하기 위해서 자성(自性) 가운데 쌓아 둘 따름, 그 자취를 드러내지 않는다. 한푼 어치 착한 일에 만냥 어치 악을 범하면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만 손해볼 뿐이다.
예수도 말씀하지 않았는가.
"오른손으로 남에게 물건을 주면서 왼손도 모르게 하라."
세교(世敎)도 그렇거늘, 하물며 우리 부처님 제자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지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
천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행(實行), 실행 없는 헛소리는 천번 만번 해도 소용이 없다. 아는 것이 천하를 덮더라도 실천이 없는 사람은 한 털끝의 가치도 없는 쓸데없는 물건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고인은 말하였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나니, 말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다."
또 말했다.
"옳은 말 천 마디 하는 것이 아무 말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니 오직 실행만 있을 뿐 말은 없어야 한다.
5. 참선궁행(參禪窮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설사 억천만겁 동안 나의 깊고 묘한 법문을 다 외운다 하더라도 단 하룻동안 도를 닦아 마음을 밝힘만 못하느니라."
또 말씀하셨다.
"나는 아난과 멀고 먼 전생부터 함께 도에 들어왔다. 아난은 항상 글을 좋아하여 글을 배우는 데만 힘썼기 때문에 여태껏 성불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와 반대로 참선에만 힘써 도를 닦았기 때문에 벌써 성불하였다."
노자도 말씀하였다.
"배움의 길은 날마다 더하고, 도의 길은 날마다 덜어 간다. 덜고 또 덜어 아주 덜 것이 없는 곳에 이르면 참다운 자유를 얻는다"
옛 도인이 말씀하였다.
"마음은 본래 깨끗하여 명경(明鏡)과 같이 밝다. 망상의 티끌이 쌓이고 쌓여 그 밝음을 잃고 캄캄 어두워서 생사의 고를 받게 된다. 모든 망상의 먼지를 다 털어 버리면 본래 깨끗한 밝음이 드러나 영원히 어두움을 벗어나서 대자유의 길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학문을 힘쓰는 것은 명경에 먼지를 자꾸 더하는 것이어서 생사고를 더 깊게 한다. 오직 참선하여야 먼지를 털게 되어 나중에는 생사고를 벗어나게 된다."
또 말씀하였다.
"학문으로써 얻은 지혜는 한정이 있어서 배운 그 범위 밖은 모른다. 그러나 참선하여 마음을 깨치면 그 지혜는 한이 없어, 그 지혜의 빛은 햇빛과 같고, 학문으로 얻은 지혜의 빛은 반딧불과 같아서 도저히 비유도 안 된다."
육조대사는 나무 장수로서 글자는 한자도 몰랐다. 그러나 도를 깨친 까닭에 그 법문은 부처님과 다름없고, 천하없이 학문이 많은 사람도 절대로 따를 수 없었다.
천태(천台)스님이 도를 수행하다 크게 깨치니, 그 스승인 남악(南岳)이 칭찬하며 말했다.
"대장경을 다 외우는 아무리 큰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너의 한없는 법문은 당하지 못할 것이다."
과연 그래서 천고에 큰 도인이 되었다.
역선사(易禪師)는 고봉(高峰)선사의 법제자이다.
출가해서 『심경(心經)』을 배우는데, 3일간에 한 자도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 스승이 대단히 슬퍼하니, 누가 보고 "이 사람은 전생부터 참선하던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여 참선을 시키니, 과연 남보다 뛰어나게 잘하였다. 그리하여 크게 깨쳐 그 당시 유명한 고봉선사의 제자가 되어 크게 법을 폈다. 99세에 입적하시어 화장을 하니, 연기는 조금도 나지 않고 사리가 무수히 쏟아져서 사람들을 더 한층 놀라게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방세계에 가득 찬 음식, 의복, 금은보화로써 시방세계의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천만년 예배를 드리면 그 공덕이 클 것이나. 그러나 이 많은 공덕도 고(苦) 받는 중생을 잠깐 도와준 공덕에 비하면 천만 분의 일, 억만 분의 일도 못된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다.
부처님 제자로서 자기 생활을 위하여 부처님의 본의(本意)를 어기고 부처님 앞에만 '공양 올려라'한다면, 이는 불문(佛門)의 대역(大逆)이니 절대로 용서치 못할 것이다.
중생을 돕는 법공양을 버리면, 광대무변한 부처님의 대자비는 어느 곳에서 찾겠는가? 탄식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큰 법공양도 화두만 참구하는 자성공양(自性供養)에 비교하면, 또 억만 분의 일도 못 된다. 참으로 자성공양을 하는 사람 앞에서는, 백천제불이 칭찬은 감히 꿈에도 못하고 3천리 밖으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영명(永明)선사가 말씀하였다.
"널리 세상에 참선을 권하노니, 설사 듣고 믿지 않더라도 성불의 종자는 심었고, 공부를 하다가 성취를 못 하여도 인간과 천상의 복은 훨씬 지나간다."
이러한 말씀들은 내 말이 아니라 시방제불과 조사들이 함께 말씀하신 것이다.
악은 물론 버리지만, 선도 생각하면 안 된다. 선. 악이 모두 생사법(生死法)이어서 세간의 윤회법이지, 출세간의 절대법은 아니다. 선. 악을 버려서 생각지 말고 오직 화두 하나만 의심하는 것이 참다운 수도인이다.
그러므로 고조사(古祖師)가 말씀하였다.
"대자비심으로써 육도만행, 곧 남을 돕는 큰 불사를 지어 공부를 성취하려는 사람은 송장을 타고 큰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과 같나니라."
조주(趙州) 스님이 말씀하였다.
"너희들이 총림에 있으면서 10년, 20년 말하지 않고 공부하여라. 그래도 너희를 벙어리라 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공부하여도 성취 못하거든 노승의 머리를 베어 가라."
과연 그렇다. 공부하는 사람은 입을 열어 말만 하게 되면 공부가 끊기는 때이니, 이런 식으로 공부해서는 천만년 하여도 소용없다. 오직 항상 계속해서 간단이 없어야 한다.
일본의 도원선사(道元禪師)는 일본에 처음으로 선을 전한 사람이다. 중국 송나라에서 공부를 성취하고 환국하여 처음으로 외쳤다.
"일본은 불법이 들어온 지 벌써 800년이 되어 각종 각파가 전국에 크게 흥성하지만 불법은 전연 없다. 고려는 조금 불법을 들었고, 중국은 불법이 있다."
이 무슨 말인가?
팔만대장경으로써 온 우주를 장엄하여도 그 가운데 자성을 깨친 도인이 없으면, 그것은 죽은 송장의 단장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법의 생명이 자성을 깨치는 데 달렸기 때문이다.
자성을 밝히는 선문에서 볼 때에는 염불도 마구니이며, 일체 경전을 다 외워도 외도이며, 대자비심으로써 일체 중생을 도와 큰 불사를 하여도 지옥귀신이다. 모두 다 생사법이지 생사를 벗어나는 길은 되지 못하니, 필경 송장 단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자성을 밝히는 길만이 살 길이다.
그러므로 앙산(仰山)스님이 말씀하였다.
"『열반경』 40권이 모두 마설(魔說)이니라."
『열반경』은 최상승경인데, 이것을 마설이라고 하면 일체 경이 전부 마설이 아닐 수 없다. 오직 자성만 믿고 닦아야 한다.
동산(洞山) 스님이 말씀하였다.
"부처와 조사 보기를 원수와 같이 하여야만이 바야흐로 공부하게 된다."
또 고조사(古祖師)가 말씀하였다.
"비로자나의 머리 위에 있는 사람이 되어라. 아니, 누구나 다 비로자나부처님의 머리 위에 앉아 있지 않은 사람이 없나니라."
또 말씀하였다.
"장부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운이 있나니, 어찌 부처의 가는 길을 가리오. 올빼미는 다 크면 그 어미를 잡아먹나니, 공부인도 필경은 이와 같아야 한다."
곧 부처와 조사를 다 잡아먹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때가 부처님의 은혜를 갚게 되는 때이다.
그러므로 적수단도(赤手單刀)로 살불살조(殺佛殺祖)라 한다. 이것이 대낙오자(大落伍者)의 일상생활이며 대우치인(大愚痴人)의 수단 방법이다.
6. 인과역연(因果亦然)
만사가 인과의 법칙을 벗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어, 무슨 경과든지 그 원인에 정비례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은 우주의 원칙이다.
콩 심은 데 팥 나는 법 없고 팥 심은 데 콩 나는 법 없나니, 나의 모든 결과는 모두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를 맺는다.
가지씨를 뿌려 놓고 인삼을 캐려고 달려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미친 사람일 것이다. 인삼을 캐려면 반드시 인삼씨를 심어야 한다.
불법도 그와 마찬가지로, 천만사가 다 인과법을 떠나서는 없다. 세상의 허망한 영화에 끄달리지 않고 오로지 불멸의 길을 닦는 사람만이 영원에 들어갈 수 있다.
허망한 세상 길을 밟으면서 영생을 바라는 사람은 물거품 위에 마천루를 지으려는 사람과 같으니 불쌍하기 짝이 없다.
이것이 생사윤회하는 근본 원칙이니, 대도를 닦아서 불멸을 얻으려는 사람은 모든 행동을 이 원칙에 비추어, 일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영원을 위해서 악인과(惡因果)는 맺지 않아야 한다.
모든 일이 다 내 인과 아님이 없나니, 추호라도 남을 원망하게 되면 이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며 이같이 못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모두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인데 누구를 원망한단 말인가? 만약 원망한다면 명경을 들여다보고 울면서, 명경 속의 사람보고는 웃지 않는다고 성내는 사람이다. 또 몸을 구부리고 서서 그림자 보고 바로 서지 않았다고 욕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어리석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천만사가 전생이건 금생이건 다 내 인과인 줄 깊이 믿어 남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가 더욱더 노력하여야 할 것이니, 이래야 인과를 믿는 수도인이라 이름할 것이다.
털끝만큼이라도 남을 해치면 반드시 내가 그 해를 받는다. 만약 금생이 아니면 내생, 언제든지 받고야 만다. 그러므로 나를 위하여 남을 해침은 곧 나를 해침이고, 남을 위하여 나를 해침은 참으로 나를 살리는 길이다.
부처님께서 전생에 누더기를 깁다가 모르고 바늘로써 누더기 속에 들어 있는 이 한 마리를 찔러 죽였다. 이 인과로써 성불하여서도 등창이 나서 오랫동안 고생하셨다. 그러므로 부처님도 정업(定業)은 면하기 어려우니, 자기가 지은 죄업은 꼭 재앙을 받고 만다.
인과의 법칙은 털끝만치도 어김이 없다. 그러나 출가한 불자로서 수도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해태굴(懈怠窟)에 빠져서 시주물만 헛되이 소비하는 무리는 하루에 천 명을 때려 죽여도 인과가 없다 하였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오직 부지런히 정진해야 할 것이다. 비극 가운데서도 비극은 스님이 가사 입은 몸으로서 공부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게으름만 부리다가, 죽어도 악도(惡途)에 빠져 사람 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지금 불자로서 사람 몸을 잃지 않을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는지 걱정하고 걱정할 일이다.
7. 이계위사(以戒爲師)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최후로 부촉하셨다.
"내가 설사 없더라도 계(戒)를 스승으로 삼아 잘 지키면 내가 살아 있는 것과 같으니, 부디부디 슬퍼하지 말고 오직 계로써 스승으로 삼아 열심히 공부하라. 너희가 계를 지키지 못하면 내가 천년 만년 살아 있더라도 소용이 없나니라." 지당한 말씀이다. 계는 물을 담는 그릇과 같다. 그릇이 깨어지면 물을 담을 수 없고, 그릇이 더러우면 물이 깨끗하지 못한다. 흙그릇에 물을 담으면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흙물이 되고 말며, 똥그릇에 물을 담으면 똥물이 되고 만다. 그러니 계를 잘 지키지 못하면 문둥이 같은 더러운 사람의 몸도 얻지 못하고 악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니 어찌 계를 파하고 깨끗한 법신을 바라리오. 차라리 생명을 버릴지언정 계를 파하지 않으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장율사(慈藏律師)는 신라 귀족의 아들로서 사람됨이 하도 훌륭하여, 국왕이 속인으로 환속케 하여 대신으로 삼으려고 자주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아무리 간청하여도 오지 않으니 왕이 크게 노하여 사신에게 칼을 주며 '몰을 베어 오라'고 하였다. 사신이 가서 전후사를 자장스님께 알리니, 스님은 웃으며 말하였다.
"나는 차라리 하룻동안이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계를 파하고서 백년 동안 살기를 원치 않노라." 사신이 이 말을 듣고 차마 죽일 수 없어 왕에게 돌아가 사실대로 아뢰니, 왕도 노기를 거두고 더욱 스님을 존경하였다.
고인이 말씀하였다.
"알고서도 죄를 지으면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지나니라."
수도인은 더욱 명심하고 명심해야 할 것이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서니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퇴옹당 성철선사의 '오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