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법문집 출간 계기
112. 법문집 출간 계기
성철 스님의 많은 가르침을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책으로 펴내는 작업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76년부터였다. 계기는 다소 엉뚱하다. 내가 참선에 본격적으로 들어간다고 서두르다가 상기병(上氣病) 에 걸린 것이 그 출발점이다.
상기병이란 참선 수행자들이 걸리는 일종의 두통. 평소엔 증상이 없다가 참선에 들어가려고 자세를 잡으면 갑자기 머리가 아파지는 고질병이다.
상기경으로 참선을 못하던 나는 대신 성철 스님의 법문을 녹음해둔 것을 듣고 공부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함부로 얘기는 못하고 있던 차에 마침 릴테이프에 녹음된 내용을 카세트테이프로 옮기는 작업을 하게 됐다.
성철 스님이 해인사 방장으로 취임해 백일간 설법했던 '백일법문' 테이프를 하나 얻어 뒷방에서 혼자서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들을 때는 뭘 좀 알 것 같은데 듣고 나면 또 다 흘러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아예 녹음기를 하나 구해 법문을 노트에 받아쓰면서 듣기로 했다. 성철 스님이 알면 불호령이 있을까 걱정돼 뒷방에서 이어폰을 끼고 몰래 들으면서 기침, 웃음, 고함 소리까지 한 마디도 빼지 않고 옮겼다.
한참을 그렇게 두문불출하니 성철 스님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이 마당 저 마당, 이 산 저 산을 오르내리던 놈이 안보였던 것이다. 행자들에게 물어보면 "뒷방에 박혀 있다"는데, 뭐 하느냐고 물으면 묵묵부답이 아닌가. 결국 하루는 직접 뒷방을 찾아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이어폰을 끼고 열심히 뭔가 적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니 지금 뭐 하는데"
자초지종을 말했다. 한참 듣는 모습이 큰 야단을 없을듯 싶었다. 성철 스님이 대충 사정을 듣고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뱉었다.
"니깐 놈이 뭘 알끼라고…."
들키면 어쩌나 조마조마 해왔는데 이상하게 관대했다. 며칠 지난 뒤 호출이 있었다.
"어데까지 받아 적었노?"
백일법문은 다 끝났고 상당법어(上堂法語.방장의 설법) 도 상당히 풀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개당설법(開堂說法.방장 취임 법문) 을 받아적어 와라"고 지시했다. 의기양양한 나는 기침 소리 한자락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었다.
속으로 수고했다는 칭찬을 기대하면서 자신 있게 스님 앞에 내놓았다. 한참 쳐다보던 성철 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며 원고를 방바닥에 내동댕이치셨다.
"어느 놈이 이 글 옮겨 적었노."
어찌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한지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영문을 모르니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꿈벅거리고 앉아 있었다. 호통이 이어졌다.
"꼴도 보기 싫다. 어서 나가."
방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돼 다시 녹음기를 틀어 확인했다. 분명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이틀이 지나자 "새로 정리한 원고 가져오란다"는 전갈이 왔다. 큰스님의 법문을 내 맘대로 고칠 수는 없다. 할 수 없이 그 원고를 다시 가져갔다. 원고를 본 큰스님이 피식 웃는다.
"이 놈아, 이걸 그대로 가져오면 우짜잔 말이고."
결국 그냥 물러나왔다. 안절부절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또 원고를 가져와 보라고 할텐데 원고를 고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그 원고를 세번째로 그대로 들고갈 수도 없지 않는가. 마음만 태우다 이틀이 지났다. 새벽 예불이 끝나자 다시 "원고 가져오란다"는 전갈이 왔다. 죽을 시늉으로 한 자도 고치지 못한 원고를 들고 큰스님 방으로 갔다. 세번째로 똑같은 원고를 받아든 성철 스님이 그제서야 말문을 열었다.
"니라는 놈은 참 실력이 없는가보제. 그만큼 뭐라캤으면 그래도 어덴가 좀 고치와야 할 꺼 아이가. 아무 데도 손 안댄 것 보니, 내가 앞으로 니 실력 믿고 뭐 시키겠노. 내일 새벽 예불 마치고 종이하고 필기도구 갖고 내 방으로 오이라. 내가 직접 말해줄 꺼니까 니는 그대로 받아 적기만 해라."
성철 스님은 10년전 법문을 보고 스스로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날부터 새벽예불을 마치자마자 큰스님 방에 들어가 1시간씩 받아쓰기를 시작했다. 생각치도 않았던 큰스님의 법문집 출간은 이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