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덕산거사
121. 덕산거사
성철 스님이 항상 아쉬워하던 대목, 안타까워했던 사람이 있다. 아쉬워하던 대목은 인재양성을 위해 스님들이 다니는 정규대학을 만드는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같이 일을 추진했던 재가불자(在家佛子.출가 않은 불교신도) 이한상(李漢相.1917~84) 씨의 좌절을 안타까워 했다.
덕산(德山)이란 호(號)를 따 '덕산거사' 라 불렸던 이한상씨는 해방직후 풍전건설을 설립한 이후 60년대까지 상당한 규모의 사업을 벌였던 사업가. 건설업자로 남긴 대표적인 건물이 세종로 정부종합청사다.
성철 스님이 그를 만난 것은 60년대 중 후반 청담 스님과 함께 정규 승가대학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무렵이다.
독실한 불자인 덕산거사는 이미 여러 방면에서 불교계에 기여하고 있었다.
재가불자 모임인 달마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64년에는 조계종 기관지인 '대한불교'를 인수해 제대로 된 신문의 모양을 갖췄으며,
무엇보다 66년부터 대학생불교연합회 총재로 젊은 지식인 불자의 후원을 맡았다. 덕산거사의 활동 역시 성철스님의 '인재양성'과 맞아 떨어진 것이다.
성철 스님이 안타까워 하는 대목은 60년대 말 중앙신도회장 출마 때부터 시작된 덕산거사의 불행이다.
덕산거사가 오래 전부터 의욕을 지녀왔던 신도회장 자리에 당대의 실력자인 이후락(李厚洛) 대통령비서실장이 출마했던 것이다. 성철 스님이 덕산거사를 불렀다.
"덕산거사가 아무리 신심 깊고, 또 나를 돕겠다고 하지만 사람이 설 자리, 앉을 자리를 살펴야 하는 거라. 이번 전국신도회장 자리는 덕산거사가 나설 자리가 아닌 것 같데이."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지닌 덕산거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큰스님, 아닙니다. 제가 이만할 때 신도회장해서 승가대학 세우시려는 큰스님 뜻도 따르고 불교신도회의 면목을 일신해 보고 싶습니다."
"덕산거사 뜻이야 누가 모르나. 그래도 그 사람(이후락)하고 겨루가지고 좋을 것 뭐 있겠노. 대통령 비서실장까지 한 사람이 뭐가 모자라 신도회장 할라 카겠노. 다 우리 모르는 뜻이 있을 거라."
덕산거사는 기어이 신도회장에 출마했지만 예상대로 낙선했다.
그 후 어쩐 일인지 덕산거사의 사업마저 기울게 되고, 결국 덕산거사는 국내에 있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 대목을 늘 아쉬워하던 큰스님이다.
"그 때 내 말 듣고 신도회장 출마 안 했으면 사업은 안 망했지. 덕산거사는 그런 사람이 아인데…, 그 때는 영 본디 사람이 아인 기라."
신도회장이 된 이후락씨가 성철 스님의 생각을 모를 리가 없다. 덕산거사를 물리친 이후락씨가 하루는 성철 스님을 찾아왔다.
"큰스님, 덕산거사 하고 추진하시던 강원의 정규대학 문제는 제가 해결해 드릴테니 저하고 일하시죠."
성철 스님이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다. 성철 스님은 '나는 덕산거사하고 일했지, 이실장하고는 일 안 했은께 그냥 그만 둡시다' 며 거절했다고 한다.
큰스님으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던 이한상씨를 내가 직접 본 것은 80년대 초다. 미국에 머물던 그가 잠시 한국에 들러 백련암에 큰스님을 뵈러 온다기에 내가 마중 나갔다.
백련암에 도착한 그는 큰스님 방에서 두어 시간 얘기를 나누곤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산밑까지 배웅하는 일도 내가 맡았다. 오솔길을 내려가던 이 씨가 말을 걸어왔다.
"스님, 스님은 내가 얼굴을 모르는 분이네요. 내가 사업을 정리하면서 정신이 없어 동생한테
'인천 월미도 땅을 큰스님께 드려서 원하시는 정규대학 만들도록 해드리라'고 신신당부하고 떠났는데 이제 와 보니 큰스님께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구만요.
내가 그 때 큰스님 말씀 듣고 앞뒤 잘 살폈더라면 지금 해인사 강원이 정규대학이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큰스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셨을텐데…."
이씨는 하산하는 길에 몇 번이나 말꼬리를 흐리며 지난 일을 회고했다. 그 말끝 마다엔 탄식과 회한, 그리고 큰스님에 대한 송구스러운 마음이 절절히 묻어나왔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몇 해 지나지 않아 운명을 달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