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기초

선사들의 ‘좌탈입망(坐脫立亡)’ 일화와 사진들

쪽빛마루 2010. 10. 26. 06:18
<전등록>으로 본 ‘좌탈입망(坐脫立亡)’ 일화들


 

 
중국 선종의 역사서인 <전등록>에 보면 좌탈입망(坐脫立亡)한 예를 볼 수 있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한 다음 선택한 시간에 열반을 맞이한 선사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자신의 제사를 먼저 치르게 한 화산덕보 선사

먼저 임제종 황룡파의 화산덕보(禾山德普, 1025-1091)선사는 입적하기 직전에 제자들을 모두 불러놓고 자신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스승이 보는 앞에서 미리 스승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니 제수(祭需, 제사음식)가 진수성찬이었음은 물을 필요도 없었다. 한 시간 이상 제자들이 올리는 음식과 절을 모두 받고 나서 “내일 맑은 하늘에 눈이 내리면 가겠다”고 하고는 정말 다음 날 눈이 내리자 향을 사르고 단정히 앉아서 입적했다고 한다.


#제발로 관에 들어가 입적 맞은 보화선사

임제의현(臨濟義顯, ?-- 866)의 도반인 보화(普化) 선사는 입적에 이르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는 관 속에 들어가 열반을 맞이했다. 이 장면이 <전등록>은 물론 <임제록> 37단에도 나온다.
이 선어록에 따르면, 보화 스님이 하루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승복을 구걸했다. 사람들이 모두 승복을 갖다 주었지만, 보화 스님은 웬 일인지 “모두 필요 없다”하고 받지 않았다. 임제선사는 원주를 시켜 관(棺)을 하나 사 오게 했다. 그러고는 보화 스님에게 “내가 그대를 위하여 승복을 한 벌 만들어 놓았소.” 그러자 보화스님은 기분 좋게 곧바로 관을 짊어지고 거리로 나가 “내일 내가 동문(東門) 밖에서 세상을 하직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날 사람들이 동문으로 구름처럼 몰려 가보니 폭삭 속은 거짓말이었다. 다음 날엔 또 남문 밖에서 세상을 하직할 것이라고 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가 보니 역시 또 부도수표를 발행한 것이었다. 이러기를 3일, 4일 째 되는 날엔 그 누구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보화 스님은 혼자 관 속으로 들어가 길 가는 사람에게 뚜껑에 못질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소식이 즉시 시내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다투어 가서 관 뚜껑을 열어보았다. 관을 열어보니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몸 전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다만 공중에서 요령소리만 달랑달랑 울릴 뿐이었다.


#물구나무 서서 입적한 등은봉 선사

등은봉(鄧隱峰) 선사의 일화도 있다. 등은봉 선사는 생몰연대는 미상이지만,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제자다. 등은봉 선사는 평소에도 괴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고래(古來)로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는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꾸로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자 등은봉 선사는 갑자기 물구나무서기를 하더니 그대로 입적해 버렸다. 여러 사람들이 달겨 들어 넘어뜨리고 해도 꼼짝하지 않았다. 다비(화장)를 하긴 해야 하는데 다비를 할 수가 없었다. 이 기괴한 소식은 삽시간에 고을 전체로 번져 나갔다. 마침 비구니스님으로 있던 속가 누이가 이 소식을 듣고 달려 왔다. 누이동생은 “오라버니는 살아 생전에도 괴팍한 행동만 일삼더니 죽어서도 계속 골탕을 먹이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짓이냐?”고 하면서 꼼짝 않고 서 있는 오빠의 시체를 ‘탁’ 치니 그대로 넘어갔다고 한다.
 

 

좌탈한 명허 스님, 12년간 토굴서 장좌불와

 

삶과 죽음이 둘 아니며, 생사가 곧 열반이다

 

미혹되면 생사가 시작되고 깨달으면 윤회가 사라진다.

감산 대사의 <몽유집(夢遊集)>
 


몇 년 전 시작된 웰빙(well-being) 붐이 최근에는 잘 죽어야 한다는 의미의 웰다잉(well-dying)이란 신조어를 낳고 있다. 이러한 웰다잉의 원조가 생과 사를 둘로 보지 않고, 이를 초월해 생사를 자유자재로 누리는 선()에 있다고 하면 지나친 견강부회일까. 생사와 열반의 대립을 초월한 선사들의생사 즉 열반(生死卽涅槃)’이란 깨달음의 삶과 극적인 임종이야말로 수행자들에게 많은 감동과 교훈을 던져주는 말없는 가르침에 틀림없다.

지난 1 26오후 1 30, 앉은 채로 입적[坐脫]한 용담당(龍潭堂) 명허(明虛) 스님은 생사가 본래 없는본무생사(本無生死)’의 도리를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2003년 입적한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 스님에 이어 청원 탄공선원의 탄공 스님, 고창 선운사의 기산 스님, 범어사 청련암의 양익 스님에 이은 또 한번의 좌탈 열반상인 것이다.

 

 

 

세수 63, 법랍 38세로 입적한 명허 스님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막동리 해발 1000여미터 고지에 2칸으로 토굴을 지어 12년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 오랜 기간 눕지 않고 하는 참선)와 일종식(一種食: 하루 한 끼만 먹고 오후엔 일체의 곡기를 끊는 수행)으로 용맹정진해 온 숨은 도인으로 알려졌다. 열반하는 날 미리 입적을 감지하고 토굴 500여 미터 아래에 거주하는 홍금선(45) 신도의 부축을 받은 후 앉은 채로 좌탈한 것이다. 홍씨는스님께서 1주일전부터 몸져 누우셔서 시봉을 해드렸는데, 입적 당일 일으켜 달라 하셔서 몸을 앉히자마자 그대로 숨을 거두셨다고 말했다.

예로부터 선가에서는 육신을 소멸해 없어질 껍데기와 같은 존재라 하여 일명똥자루라 부르며 몸을 벗는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해탈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기뻐한다. 특히 선사들은 임종에 이르러 생사로부터 자유로운 경지를 좌탈입망(坐脫立亡: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다)이라는 극적인 모습을 통해 생생한 묵언의 가르침을 보여준 사례가 적지 않다. 삼조승찬 스님은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은 채 서서 열반하였고, 보화 선사는 요령 소리만 남긴 채 허공으로 사라졌으며, 등은봉 선사는 물구나무 선 채로 열반하였다. 관계 선사는 몸을 태울 화장나무를 미리 준비해 그 위에 서서 열반했고, 보조 국사는 제자들과의 백문백답을 마친 다음 법상에서 내려와 마루에 앉아 그대로 입적하기도 했다
.

고승들의 이러한 좌탈입망은 선()의 궁극적 목적이 생사로부터의 해탈에 있음을 일깨우는 마지막 법문이기도 하다. 때문에 생사의 근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무상(無常), (), 무아(無我)의 삼법인을 철저히 요달해야 한다. 모든 존재에 실체성이 없다는 무아와 연기법(緣起法)의 관점에서 보면 생(), ()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꿈과 환상같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생과 사가 모두토끼 뿔’, ‘거북 털과 같이 이름으로만 존재하기에 생과 사가 다를 바가 없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인 것이다
.

따라서 선가에서는 생과 사, 생사와 열반에 대해 분별하는 것을 망념으로 본다.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여 생사는 싫어하면서 열반은 얻어야 할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결코 생사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반의 참뜻은지금 여기에서 생사로부터의 해탈을 그대로 체득하라는 가르침이다. 결국 피안(彼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차안(此岸)이 곧 피안이고, 세간이 바로 출세간이며, 생사가 바로 열반이고, 범부가 곧 성인이라는둘 아닌[不二]’ 이치를 깨달을 때 삶의 현장 속에서 생사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좌탈입망이 그대로 완전한 깨달음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생사에 자재한 그러한 모습만으로도 후학들에게 환희심을 주고 발심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다. 이번에 좌탈한 명허 스님 역시 남이 알아주건 말건 평생을 치열하게 용맹정진한 수좌(首座)로서 소리 소문없이 많은 스님과 신도들의 존경을 받은 스승이었다.

1944년 8월 17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서 전통 유학자이자 한의사인 주천(李柱泉) 거사의 4남으로 태어난 명허 스님은 20세에 43경 등 한학을 통달했다. 5년간 막동리에서 서당훈장으로 43경을 가르치다가 문자와 세속 삶의 무상함을 느껴 지리산 화엄사로 출가해 69년 도광 스님을 계사로, 도천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화엄사 승가대학에서 대교과를 졸업한 스님은 오대산 북대와 상주 선역사 등 제방선원에서 운수안거의 세월을 보냈다. 이후 고향인 막동리에 산중토굴을 지어 장좌불와 수행에 들어갔다
.

스님은 토굴수행을 하면서도 찾아오는 스님들의 수행을 지도하는 한편 불치병에 걸린 많은 신도들의 병을 낫게 하는 등 남모르게 보살행을 실천해 왔다. 12년전 상주 선역사 일대의 토지 1만여평을 연꽃마을에 기증하는 등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특히 중국 소림사에서도 수련자가 드문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을 수련, 본격적인 참선에 앞선 몸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스님은 <달마역근경>을 번역한 <역근세수(易筋洗髓)의 비결>이란 책을 무료로 보급하기도 했다
.

한편 명허 스님의 다비식을 봉행한 화엄사 문도스님들은 스님의 사리를 화엄사와 상주 선역사의 부도에 봉안키로 했다. 또 스님의 유품인 사고전서, 대장경, 역경집성, 정통도장 등 3천 여권의 유, , , 한학관련 희귀도서는 유언에 따라 화엄사 도서관에 기증했다. 화엄문도회는 2 1일 거행한 여수 흥국사 초재를 시작으로 구례 천은사, 금산 태고사, 고양 선재정사, 고양 상운사, 예천 법흥사, 구례 화엄사 등에서 2재부터 7재를 봉행할 예정이다.

 

여수 흥국사=김성우 객원기자  2007-03-07 붓다뉴스

 

▼ 아래 내용출처 : http://blog.naver.com/gksdka1876?Redirect=Log&logNo=120030048980

 

좌탈입망 [坐脫立亡]

 

앉거나 선 자세로 열반하는 것을 일컫는 불교용어.

 

불교에서는 죽음을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한 최고의 경지인 열반(涅槃)으로 본다. 곧 죽음은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번뇌가 없어지는 적멸(寂滅)의 순간인 동시에 법신(法身:영원한 몸)이 탄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에 예부터 선사나 고승들은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찾아오는 죽음의 순간을 맞아들일 때도 일반인들처럼 누워 죽는 경우, 자신의 몸을

불태워 소신공양(燒身供養)하거나, 앉거나 선 채로 죽는 경우 등 죽음의 형식도 다양하였다. 이 가운데 앉거나 선 채로 열반하는 것이 바로 좌탈입망이다.

 
<범어사 청련암 양익선사의 좌탈입망 모습>
 
*양익스님(1934~2006)은 우리나라 현대 불교무술의 창시자이며, 특히 선무도 불무도 등
불교무술 발전과 전수에 힘쓰다 열반하신 큰스님이다.
젊어서는 범어사 일주문도 경공술로 넘었다 하며, 또한 검도의 고수와
대결에 검도고수는 목검으로 양익스님은 썩은 나무 가지로 대결하였는데,
서로 무기가 마주치자 검도고수의 목검이 부러졌다 한다.
현재 골굴암 주지이며, 선무도를 가르치는 적운스님도 양익스님의 제자라 한다.
또한 스님은 서울대 법대를 나왔으며, 1차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하러 범어사에 왔다가 범어사 조실 동산 큰스님을 만나
출가 하였다.
 

보통 법력이 높은 고승들이 죽을 때 택하는 방법으로,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룬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오가칠종(五家七宗)의 제3조 승찬(僧璨)은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은 채 서서 열반하였고, 당(唐)의 등은봉(鄧隱峰)은 물구나무 선 채로 열반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다비할 땔감을 준비한 후 그 위에서 열반한 관계 선사, 제자들에게 “내 죽으면 시신을 숲 속에 놓고 들불에 타도록 하라”고 유언한 혜안국사, “시신을 벌레에게 주고, 탑이나 부도를 만들지 말라”고 했던 청활스님, 제자들과 백문백답을 마친 후 법상에서 내려와 입적한 보조국사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 대종사의 열반 모습>
 
*서옹스님(1912~1996)은 1912년 10월 10일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連山面)에서 태어나 1932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인생문제와 우주진리에 관해 고민하던 중 우연히 불교서적을 읽다가 깨친 바 있어, 전라남도 장성의 백양사(白羊寺)로 출가해 송만암(宋曼庵) 대종사를 은사로 득도 수계하였다.
 
1962년 동국대학교 선학원 원장을 지내고, 1965년부터 1974년까지 도봉산 무문관(無門關), 대구 동화사(桐華寺), 백양사, 문경 봉암사(鳳岩寺) 조실을 역임하였다.
 
1974년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에 추대되었고, 같은 해 스리랑카 국립프리베다대학교에서 명예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대한불교총연합회 회장을 지내고, 1978년 종정에서 물러난 뒤에도 백양사 조실(1981), 수국사(守國寺) 백운암 조실(1984), 백양사 운문선원 조실(1990),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1996) 등으로 주석하면서 한국불교 발전에 힘썼다.
 
성철(性澈)·서암(西庵) 등과 함께 한국 현대불교계의 대표적인 선승으로 꼽히며, 수행방법 가운데서도 참선을 으뜸으로 삼아 항상 '본래 자비심이 있는 참 모습을 깨닫기 위해 수행할 것'을 역설하였다.
 

한국의 근현대 고승들 가운데서도 밧줄을 붙잡고 화두를 외며 죽음을 맞은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효봉(曉峰) 외에 오대산 상원사의 한암(寒巖), 백양사의 만암(曼庵), 순천 송광사의 초대 방장 구산(九山), 조계종 5대 종정을 지낸 백양사의 서옹(西翁) 등이 모두 좌탈입망하였다.

 

선가(禪家)에서 좌탈을 중시하는 이유는 마지막 죽는 순간의 의식 상태가 다음 환생(還生)과 관련된다고 보는 사생관(死生觀) 때문이다. 좌탈을 했다는 것은 죽는 순간에도 각성(覺醒) 상태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상태가 다음에 태어날 때의 의식수준이나 육체적 조건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공포와 혼돈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그 상태가 이월되어서 환생할 때에도 비각성(非覺醒) 상태로 태어나지만, 죽음을 바라보면서 죽는 죽음은 다시 환생할 때 각성 상태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좌탈입망은 요즘 이야기 되는 ‘웰 엔딩(Well Ending)’의 최고 수준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조계종 초대 종정 한암선사의 열반 모습>
 
*한암선사(1876~1951)는 1951년 2월 오대산 상원사 법당에서 사시불공을 드린 후,
평상시 좌선하는 상태로 열반(76세) 하였다.
그의 제자 탄허를 비롯한 많은 제자가 있었으나, 6.25 전쟁으로 모두 피난을 가고
나이 어린 시자 한명이 모시고 있었다. 제자들이 같이 모시고 피난을 가려고 하였으나,
스님은 한사코 오대산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한다.
한암스님 회하에 참선을 지도 받으며 거쳐간 스님들은,
효봉, 동산, 운봉, 동산, 전강, 서옹 등..우리나라의 기라성 같은 최고의 선사들이 거쳐갔다.
한암은 선방의 조실로서 수좌들에게 경을 가르치며, 선을 지도하며, 언제나 그들과 함께 있었다 한다.
가르치는 일 외에는 늘- 말없없이 좌선삼매에 있었다 한다.
언제나 그렇게 좌선삼매에 있었으니, 죽음도 평소 일상 그 모습 그대로
열반에 들었지 않나 싶다.
모시던 시자도 한암스님의 열반하신 것을 몰랐다 한다.
위 사진은 평소 존경하던 6.23 종군기자가 한암스님을 뵈러 상원사에 들렀다가
스님의 열반을 모습을 보고 시자에게 알리고 사진으로 담았다 한다.
열반한지 처음 몇시간은 참선하는 상태로 있었다 한다.
그후 시간이 지나자 고개가 위로 저절로 넘어 갔다 한다.
열반 사진의 뒷 배경은 법당이라서 시자가 천으로 가린 모습이라 한다.
어디 벽에 기댄 모습도 아니고, 일반 선사들처럼 고개를 떨군 모습도 아니다.
스님은 경허선사에게 깨침을 인가 받고,
평생을 그렇게 참선을 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다 평소의 모습대로 가사와 장삼입고,
부처님 앞에서 제자 답게 꼿꼿이 좌선삼매 상태로 홀로 그렇게 갔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마음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