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바로봅시다』참선하는 법
참선하는 법(1981년 음6월15일, 방장 대중법어)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이다"라고 말합니다. 마음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즉심시불이라고도 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는 만큼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다 봐야 할 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
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인가? 팔만대장경
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 심' 한 자에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심'자 한 자 위에 서 있어서, 이
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교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
에 일체 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고 삼세제불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초지종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
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고 하는 것입니
다. 마음의 눈을 뜨면 자기의 본성, 즉 자성을 보는데 그것을
견성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불교에 관심이 있고 참선 좀 한다는 사람
은 참선 시작한 지 한 사나흘도 안 되어 모두 견성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곳에도 견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견성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대승기
신론]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살지가 다하여 멀리 미세망상을 떠나면
마음의 성품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을 구경각이라 한다.
보살이 수행을 하여서 마침내 십지와 등각을 넘어서서
가장 미세한 망상인 제8아뢰야식의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다 떨어져 버리면 진여가 나타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견성이고 구경각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묘각
이라고도 합니다. 또 [열반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상정각을 이루면 부처님 성품을 볼 수 있고
부처님 성품을 보면 무상정각을 이룬다.
위없는 바른 깨달음, 즉 성불이 바로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을 보
는 것이고, 불성을 보는 견성이 바로 바른 깨달음인 성불이라는 말
입니다. 바로 [기신론]에서 말씀하신 '구경각이 견성'이라는 것과
내용이 꼭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열반경]에서는 더 자세하게 말
씀하셨습니다.
보살의 지위가 십지가 되어도
불성은 아직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결국 보살의 수행단계가 십지가 되어도 견성 못 했다는 말입니
다. 그러니 성불해야만 견성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견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유가사지론]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경지보살은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어두운 곳에서는 물건의 바른 모습을 볼 수 없듯이 십지나 등각
위의 구경지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결국 일
체 만법의 본모습인 자성을 보려면,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듯 하
는 수행단계를 지나서 밝은 햇빛 속으로 쑥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즉 구경각을 성취해서 성불하는 것이 바로 견성인 것입니다.
그럼 선종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선종의 스님들 중에서도
운문종의 종조이신 운문스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십지보살의 설법은 구름 일고 비오듯하여도
견성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과 같다
십지보살은 법운지보살이라 하여, 법문 할 때는 온 천지
에 구름이 덮이고 비가 쏟아지듯이 그렇게 법문을 잘한다는 것입니
다. 그렇지만 견성, 즉 자성을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 같
다는 말이니, 비단으로 눈을 가렸는데 어떻게 물체를 바로 볼 수 있
겠습니까
이렇듯 대승불교의 총론이라고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에서는
보살지가 다 끝난 구경각을 견성이라 했고 부처님 최후의 법문
인 [열반경]에서는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인데,
십지보살도 견성 못 했다고 하였고, 유식종의 소의경전인
[유가사지론]에서는 불성을 보는 것은 구경지보살도 어두운
가운데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고, 종문의 조사인
운문스님은 십지보살도 견성하지 못 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선과 교를 통해서 어느 점에서 보든지 간에 견성이
바로 성불이며, 그것은 보살수행의 십지와 등각을 넘어서 구경각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그런데 십지는 고사하고
삼현도 아닌 단계, 비유하자면 층층대의 맨 꼭대기가 견성인데
그 첫째 계단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견성했다고, 도통했다고 합
니다. 그렇게 견성해서 다시 성불한다고 하니 대체 그 견성은 어떤
것인지, 이것이 요새 불교 믿는 사람의 큰 병통입니다.
그렇다면 이 병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하면 보조스님이 지은
[수심결]에서 비롯됩니다. 거기에 돈오점수라 하여
자성을 깨치는 것을 돈오라 하로, 돈오한 후에 오래 익힌 습기
를 없애는 점수를 닦아야 한다고 하였고, 그 돈오한 위치가 보
살의 수행 차제의 십신초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보조스님은 중국의 규봉스님의 사상을 이어받아서 돈오점
수를 주장했습니다만, 규봉스님은 십신초인 보살지를 돈오 즉 견성
이라고 말하지 않았고, 또 그가 주장한 깨침이란 것은 단지 교학상
의 이론을 아는 해오를 말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
조스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돈오는 견성이라 하면서, 그 지위가
십신초라고 [절요]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려시대의 큰스님인 보조스님께서 말씀하셨는
데 잘못되었겠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경이
나 논에서는 분명히 살면, 십지를 넘어선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
을 견성이라 하고 있으나, 결국 보조스님의 [수심결]이 [기신론]보
다 낫고, [열반경]보다 낫고, [유가사지론]보다 낫다는 말인가?
또 종문의 대표적 스님인 운문스님보다 낫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결국 보조스님이 [수심결]에서 말씀하신 '십신초에서의
돈오가 견성'이라는 사상은 근본적으로 시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지보살이니 구경각이니 하는 그 깨달음의 경지는 어
떻게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표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데
대해서 궁금증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종문에 분명한 표준이 있습니다.
[화엄경] 십지품에 "보살지가 7지가 되면 꿈속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고 공부가 여여하다"고 하였습니다. 차선 공부를 하
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있을 때에도 아무 장애를 받지 않고 공부
가 한결같으면 '7지 보살'이라고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7지
의 보살이 설사 꿈에는 공부가 일여하다 할지라도 깊은 잠에
들면 캄캄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잠이 깊이 들어도 일여한 경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잠을 자는 것 같지만
실지는 잠을 자지 않는다.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어도 정신 상태는 항상 밝아 있어 조금
도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항상 밝아 있는 정신 상태가 올 것 같
으면 8지보살 이상, 즉 자재위라 합니다. 그런데 자재위에는
두 종류가 있어서 깊은 잠, 즉 숙면에서 일여하여도 아뢰야식의 미
세한 망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8지 이상의 자재보살이고, 그 미세
망상까지 완전히 다 끊어져 버리면 그때에는 진여가 드러나고
그것이 견성이고 부처님입니다. 그때는 여래위라 합니다.
불교에서 수행하여 공부하는 단계를 보면, 첫째 동정일여
즉 일상생활에서 가고 오고 할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말을 하
거나 안 하거나, 변함 없이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여여불변
하여야 합니다.
동정일여가 되어도 잠이 들어 꿈을 꾸면 공부는 없어지고 꿈속에
서 딴짓 하며 놀고 있는데, 꿈에서도 일여한 것을 몽중일여
라 합니다.
몽중일여가 되어도 앞에서 말했듯이 잠이 깊이 들면 아무것도 없
습니다. 잠이 푹 들었을 때에도 여여한 것은 숙면일여라 합니다.
숙면일여가 되어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된다 말입니다. 그리하여 깨쳐
야만 그것이 실제 견성입니다.
그런데 참선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숙면일여는 고사하고, 몽중
일여도 고사하고, 더구나 동정일여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견성했
다. 깨쳤다고 인정해 달라고 나한테 온 사람만도 수백 명은 보았습
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무엇인가가 정신을 확 덮
어 버립니다. 그때에는 자기가 깨친 것 같고 자기가 부처님보다 나
은 것 같고, 조사스님보다 나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그런 병이 있
습니다. 이 병에 들게 되면 누구 말도 귀에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설명해 주면 어떤 사람은 잘못된 줄 알고 다시 공부하
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병을 한동안 앓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젊은 스님이 불교를 믿고 참선을 한다는 처사들 모임에 갔
더라고 합니다. 약 백여 명 모인 처사들 중에서 90명은 견성했더라
는 것입니다.
"이럴 것이 아니라 해인사 큰스님게 가서 한번 물어보시오"
"뭐, 큰스님이니 작은스님이니 물어볼 것 있습니까"
큰스님 , 작은스님 소용없다니, 그렇게 되면 부처님도 소용없습
니다. 이리 되면 곤란합니다. 좀 오래 전의 일입니다.
70세 남짓 된 노인이 한 사람 찾아왔습니다. 그때에도 3천 배 절
하고서 내 방에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안 오려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하도 가보라고 해서 왔다고 합니다.
"나이가 70이나 되면서 옆의 사람이 가보라 한다고 쫓아왔단 말
이오, 자기가 오기 싫으면 안 오면 그만이지 대체 무슨 일로 옆에
서는 그렇게 권했소?"
"내가 40여 년을 참선을 하는데 벌써 20년 전에 확실히 깨쳤습니
다 그 후 여러 스님들을 찾아다니면서 물어봐도 별 수 없어 이젠
찾아다니지도 않는데, '성철스님께 가보라'고 하도 이야기해서 할
수 없이 찾아왔습니다"
"그래 어쨌든 잘 왔소 들어보니 노인은 참 좋은 보물을 갖고 있
네요. 잠깐 앉아 있는데 모든 망상이 다 떨어지고 몇 시간도 금방
지나가 버리니, 그런 좋은 보물이 또 어디 있겠소 내가 한가지 물
어보겠는데 딱 양심대로 말하시오 거짓말하면 죽습니다. 그 보물이
꿈에도 있습니까?"
그러자 눈이 둥그래지는 것입니다.
"꿈에는 없습니다"
"뭐, 꿈에는 없다고? 이 늙은 놈아! 꿈에도 안 되는 그걸 가지고
공부라고 선지식이 있니 없니 하고 있어? 이런 놈은 죽어야
돼. 하루에 만 명을 때려죽여도 괜찮아, 인과도 없어!"
그리고는 실제 주장자로 두들겨 패주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맞
고만 있더군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더니 자기 공
부가 틀린 줄 알고서 다시 새로 공부를 배우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병폐가 실제로 많이 있습니다. 꿈에도 안 되는 이것을 가지
고 자기가 천하 제일인 듯이 하고 다닙니다. 여기 이 대중 가운데서
도 나한테 직접 덤빈 사람도 몇 사람 있습니다. 요새도 보면 그 병
을 못 버리고 무슨 큰 보물 단지나 되는 것처럼 걸머진 사람도 있습
니다. 이상으로 견성이라고 하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떤 방법에 의하면 견성을 할 수 있는가?
불교에서는 성불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관법을
한다. 주력을 한다. 경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운다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고 빠
른 방법이 참선입니다. 견성성불하는 데에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입니다.
참선하는 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 신도나
스님네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부나 수녀도 백련암에 와서 3천
배 절하고 화두 배워 갑니다. 나한테서 화두 배우려면 누구든지
3천 배 절을 안 하면 안 가르쳐 주니까
며칠 전에도 예수교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3천 배 절하고 갔습
니다. 이 사람들한테 내가 항상 말합니다.
"절을 하는 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나님 반대하고 예수
님 욕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라고 축원하고
절하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그들도 참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우리
종교 안 믿는 사람은 모두 다 나쁜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면 그는
점잖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를 욕
하고 나를 해치려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을 더 존경하고 그 사람을 더
돕고, 그 사람을 더 좋은 자리에 앉게 하라고 부처님께서는 항상 말
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닦아야 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교나 다른 종교
인들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가톨릭 수도원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왜관에 있는데, 그 수도원의 독인인 원장이 나
한테서 화두를 배운 지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에도 종종 왔
는데 화두 공부는 해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교를 믿지
않는 다른 종교인들도 화두를 배워서 실제로 참선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마음을 닦는 근본 공부인
선을 알아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화두를 말하자면 또 문제가 따릅니다. 화두를 가르쳐주
면서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옆에서 배
우라고 해서 배운다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은 괜찮습
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하
고는 뭐라고 뭐라고 아는 체를 합니다.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화두, 즉 공안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눈을 떠서 확철히 깨
쳐야 알지 그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여 비록 몽중일여
가 되어도 모르는 것이고 또 숙면일여가 되어도 모르는 것인데 그
런데 망상이 죽 끓듯이 끓고 있는 데서 어떻게 화두를 안다고 하는
지 이것이 조금 전에 말했듯이 큰 병입니다. 그럼 어째서 화두를
안다고 하는가? 껍데기만 보고 아는 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만
보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말 밖에 뜻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예전
종문의 스님네들은 '암호밀령'이라고 하였습니다.
암호라는 것은 본래 말하는 것과는 전혀 뜻이 다른 것이지요 '하
늘 천이라고 말할 때 '천'한다고 그냥 '하늘'인 줄 알다가는 그
암호 뜻은 영원히 모르고 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안은 모두 다 암
호밀령입니다. 겉으로 말하는 그것이 속내용이 아닙니다. 속내용은
따로 암호로 되어 있어서 숙면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야만 알 수 있
는 것이지 그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큰 병통을 가진 이는 일본 사람들입니다. 일
본 구택대학에서 [선학대사전]이라는 책을 약30여 년 걸려서 만
들었다고 하기에 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니 중요한 공안은 전
부 해설해 놓았습니다. 그 책을 보면 참선할 필요 없습니다. 공안이
전부 해설되어 있으니까. 내가 여러 번 말했습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가장 나쁜 책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선학대사전]이야, 화두를 해설하는 법이 어디 있어"
구택 대학은 조동종 계통입니다. 조동종의 종조되는 동산
양개화상이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