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품

보현행원품 해설 3 <무비스님>

쪽빛마루 2012. 6. 10. 14:46

이와 같이 살았으면


무비스님의 「보현행원품」 해설

여천 무비如天無比 풀어씀

 

 


  하 등      위 십       일 자       예 경 제 불          이 자      칭 찬 여 래
 何等爲十一者禮敬諸佛이요 二者稱讚如來


 삼 자       광 수 공 양          사 자       참 제 업 장          오 자       수 희 공 덕  
三者廣修供養이요 四者懺除業障이요 五者隨喜功德이요


  육 자       청 전 법 륜          칠 자       청 불 주 세       팔 자       상 수 불 학
 六者請轉法輪이요 七者請佛住世八者常隨佛學이요


 구 자       항 순 중 생           십 자      보 개 회 향       
九者恒順衆生이요 十者普皆廻向이니라


 선 재       백 언         대 성             운 하 예 경           내 지 회 향
善財白言호대 大聖이시여 云何禮敬으로 乃至廻向이니잇고

 

 

 

경문   "그 열 가지 서원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함이요. 둘째는 부처님을 우러러 찬탄함이요. 셋째는 널리 공양함이요. 넷째는 스스로의 업장을 참회함이요. 다섯째는 남의 공덕을 따라 기뻐함이요. 여섯째는 설법하여 주기를 청함이요. 일곱째는 부처님이 세상에 오래 머무르기를 청함이요. 여덟째는 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움이요. 아홉째는 항상 중생들을 수순함이요. 열째는 모두 다 회향함이니라.”
 선재동자가 아뢰었다. "큰 성인이시여. 어떻게 예배하고 공경하오며 내지 어떻게 회향하오리까?"


해설   여기서부터 이 경전의 본론이다. 「보현행원품」에서 주로 이야기 하고자 하는 내용이 열 가지 서원이다. 먼저 그 열 가지 서원의 이름을 열거하였다. 불교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 가장 이상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열 가지 덕목이라 해도 좋다. 다음에서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우선 간단하게 현대적 의미로 풀어서 이해해 보려 한다.

 첫째.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함이란, 먼저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와 남과 가족과 형제자매와 이웃과 직장에서 늘 부딪히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길거리에 걸어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 수없이 부처님, 부처님 하지만 실은 그 사람들 외에는 달리 다른 부처님이 없다. 그리고 그 사람 부처님들은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보다 더 훌륭하고 위대한 존재는 없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이해할수록 부처님이 아니라고 말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리고 사람 외에 달리 어디서 찾을 부처가 없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나면 그 다음 예배하고 공경하는 일은 한결 쉬워진다. 나무나 돌로 깎은 불상에도 예배하고 공경한다. 세 번씩, 일곱 번씩, 백팔 번씩, 천 번씩, 삼천 번씩 어떤 이는 백만 번을 했다고 자랑하는 이도 있다. 나무나 돌은 부처님으로 보면서 왜 사람은 부처님으로 보지 못할까? 간혹 멀쩡한 자연석을 부처님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참 신기하기도 하다. 사람 속에 무슨 물건이 들어있어서 그렇게 볼 줄 아는가? 그 능력을 기울여서 부디 사람을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그 사람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자. 관음보살님께 예배하다 보면 혹 어떤 관음보살님은 예배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합장하고 예배하는 관음상도 있다. 그 관음상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남은 의혹이 풀리리라. 이것이 사람다운 사람, 즉 보살이 실천해야 할 덕목 제1조다.     

 

 둘째. 부처님을 우러러 찬탄함이란, 먼저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알고 나면 우러러 찬탄할 일은 너무나 많다.
 ‘부처님’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 올리는 것은 3천 년 전 인도의 역사 속에 나타났던 석가모니 부처님을 생각한다. 그도 물론 훌륭한 부처님이었다. 그래서 예불문에는 수많은 부처님 중에서 근본이 되는 스승님 석가모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역사 속에 살다 가신 석가모니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경전에 나타난 무수한 부처님이나 보살들도 아니다. 역사 속에서 명멸해 간 수많은 조사스님들도 아니다.
 다만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우리들과 가깝고 혹은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우러러 찬탄하라는 것이다. 못나고 게으르고 살림도 살 줄 모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마누라도, 돈도 벌 줄 모르고 옹졸하고 무능력하고 고집만 세고 말이 통 먹히지 않는 저 못난 남편도 내가 사람의 본성을 볼 줄 아는 눈만 열리면 무지무지하게 값비싼 보물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때는 이리 보아도 우러러 찬탄할 거리고 저리 보아도 우러러 찬탄할 거리다.
  고려청자의 가치를 모를 때는 개 밥그릇으로 썼으며 때로는 알루미늄그릇과 맞바꾸었지만 가치를 알고 나면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안방에 숨겨두고 애지중지한다. 이리 쳐다보고 저리 쳐다보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까워서 가족들에게까지 잘 보여주지 않는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우러러 찬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불심이 있는 불자로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우러러 찬탄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큰 잘못이다.

 

 셋째. 널리 공양함이란, 사람들을 부처님으로 알고 난 뒤 그 많고 많은 사람 부처님들에게 온갖 것으로 이바지하고 공양 올리는 일이다.
 살펴보면 부처님들에게 공양 올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의식주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 의식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화적인 것과 사람을 대접하는 일도 훌륭한 공양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은 모두가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인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다. 또는 자선단체나 부호들이나 경제를 관장하는 사람들의 일이다. 혹 저급하고 미개한 종교단체에서도 신경을 많이 쓰는 공양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극한 가치를 깨달아 알고 있는 불교에서는 무엇보다 인간의 지극한 가치를 일깨우고 가르치는 법공양을 제일 중요한 공양으로 생각한다. 의식주 문제나 기타 문화적인 공양은 돌볼 겨를이 없다.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법공양을 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예컨대 흙이나 돌멩이를 보시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황금이나 다이아몬드를 가득 쌓아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황금이나 다이아몬드를 보시해야 옳다. 구태여 흙이나 돌멩이를 보시하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할 일이지 황금이나 다이아몬드를 쌓아놓고 사는 사람의 일은 아니다. 

 불교는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불공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다. 그러므로 불공의 내용과 방법과 공양물의 우열을 잘 이해하여 가려가면서 공양 올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엉뚱한 단체가 되고 만다. 불교와 같은 훌륭하고 빼어난 가르침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훌륭한 공양을 올리지 못한다면 어느 종교 어느 단체에서 할 것인가? 불자로서 다반사로 행하는 불공이기에 심사숙고하고 다시 심사숙고하여 해야 할 일이다.

 

 넷째. 스스로의 업장을 참회함이란, 불교가 하는 일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단혹斷惑과 성덕成德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즉 미혹을 제거하고 복덕을 갖추는 일이다. 업장을 참회한다는 것은 미혹을 제거하는 일이다. 미혹으로 업을 짓고 업장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천수경』, 『금강경』, 「초발심자경문」에도 업장을 참회하여 제거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것은 또한 종교가 갖는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다 같은 방법으로 업장을 참회하지는 않는다.
 불교에서는 처음 대하는 『천수경』에서부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죄업이란 독립된 자성이 없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 마음, 하지만 그 마음 또한 본래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알면 죄업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마치 허공에다 세운 건물과 같고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과 같아서 그것은 다만 말만 있을 뿐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니듯이. 그래서 죄업도 없고 마음도 없음을 알아서 두 가지가 모두 텅 비어 없을 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참회다.”라고 하였다.
 스스로의 업장을 참회한다는 것은 그 이치를 이렇게 이해했을 때 제대로 된 참회라고 할 수 있다. 


 3조 승찬僧璨대사는 40대 중반의 거사로서 평생을 앓고 있는 문둥병이 자신의 죄업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2조 혜가慧可대사를 찾아가서 자신의 몹쓸 병이 죄업 때문이니 제발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였다. 2조 혜가 대사는 당신이 죄업을 가져오면 참회시켜 주리라 하여 문둥병 환자인 승찬 거사는 그 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죄업을 찾으려고 하루 종일 골똘히 궁구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죄업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신의 죄업은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라면 이미 다 참회된 것이다.”라고 하여 죄업이 본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몸도 마음도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거사의 몸으로 부처님의 법맥을 이어 오늘에 이른다. 이것이 스스로의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다. 불자로서 이와 같은 이치를 모른다면 불교적 소양에 결함이 많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