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1. 마조, 성병(聖病)을 치료하다
1. 마조, 성병(聖病)을 치료하다
법보신문 | 2012.01.11 | 성재헌
|
성병(性病)도 아니고, 성병(聖病)이라니? 혹자는 별스러운 단어로 현혹시킨다며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사가어록(四家語錄)’의 마조행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당나라 개원(開院,713~742) 연중의 일이다. 소처럼 느릿느릿한 걸음에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빛을 지닌 한 스님이 형악(衡嶽)의 전법원(傳法院)에서 좌선하고 있었다. 마(馬)씨 성에 도일(道一)이라는 법명을 가진 그 젊은 수행자는 어린나이에 출가하여 여러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손짓 하나 말 한마디도 함부로 하지 않고, 수많은 경전을 읽고 이해해 늘 되새기며 살아온 수행자였다. 이른바 모범생이었다.
그런 그가 “성품을 보면 바로 부처가 된다”는 소문을 듣고, 이번엔 남방으로 내려와 불철주야 좌선에 몰두한 것이다. 밤낮만 잊은 게 아니라 아마 추위와 더위, 끼니조차도 아랑곳하지 않았을 게다. 암자 안팎 스님들이 “근래 보기 드문 수행자”라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을 게 분명하다. 헌데 그 암자를 지나던 객스님 한분이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툇마루에 앉아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 다가가 물었다.
“스님은 좌선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객스님은 마당 한구석에 뒹굴던 깨어진 벽돌 하나를 집어다 바위에 갈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여긴 도일 스님이 물었다.
“벽돌은 갈아서 무엇 하시려고요?”
“갈아서 거울 만들려고요.”
아마 기가 찼을 게다. 허나 부처님의 올바른 제자임을 자부하는 도일은 결코 비웃거나 콧방귀를 뀌지 않고 어리석은 객스님을 점잖게 타일렀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벽돌을 갈아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을 한들 어떻게 부처가 되겠습니까?”
메아리처럼 돌아온 반문에 도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객스님의 질문에는 또 하나의 질문이 감춰져 있었다. ‘스님은 중생입니까? 부처입니까?’ 만약 중생이라고 대답하면, 객스님의 비판대로 벽돌과 거울처럼 중생과 부처는 본질적으로 다르니 중생이 부처가 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 된다. 만약 부처라고 대답하면, 부처가 다시 부처가 되려고 용을 쓰는 꼴이니 현재 자신이 하는 수행은 터무니없는 짓이 된다.
벽돌은 갈아도 거울 안돼
평범하고, 그저 그렇고, 흔하디 흔하고, 어수룩 하기까지 한 나그네의 한마디에 스승과 벗들로부터 아낌없는 칭찬과 찬사를 받아온 불가의 모범생이 꼼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도일은 꽤나 충격이 컸을 게다. 아마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만큼 멍했을 게다. 허나 모범생 체면이 있지 곧바로 굴복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날 칭찬만 듣다가 한소리 들었으니, 게다가 그 한소리가 심장을 파고드는 비수처럼 아팠으니, 좋은 심사로 한 질문은 아닐 게다. ‘그럼 어쩌란 거요’ 하고 날을 잔뜩 세워 한마디 툭 던졌을 게다. 그러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 나그네스님은 어려운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아주 쉽게 대답한다.
“소에게 멍에를 채워 수레를 걸었을 때,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합니까, 소를 때려야 합니까?”
수레에 채찍질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멍청하게 안은 돌아보지도 않고 밖으로만 내달린다는 핀잔을 또 들었으니, 이쯤 되면 KO패다. 나그네 스님은 풀이 죽어 한마디도 못하는 젊은이 곁으로 다가가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아마 따듯한 눈길에 포근한 손길도 더했을 게다.
“당신은 앉은뱅이 선[坐禪]을 배웁니까, 앉은뱅이 부처[坐佛]를 배웁니까? 앉은뱅이 선을 배운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앉은뱅이 부처를 배운다면 부처님은 정해진 모습이 있는 게 아닙니다. 머무름이 없는 법에서 취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앉은뱅이 부처를 구한다면 그건 부처를 죽이는 짓이며,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를 통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가르침에 크게 기뻐한 도일은 비로소 옷깃을 가다듬고 나그네에게 정중하게 절을 올렸으니, 그 나그네 스님이 바로 남악 회양(南岳懷讓) 선사이다.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곱씹어 보고 싶은 부분이다. 바로 성스러운 부처님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범적인 수행자 도일’의 모습이다. 훌륭한 말과 행동을 익히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야기하는 모든 욕망을 제거하라고 가르치신 붓다의 가르침에 의거한다면, 일체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표방하는 선사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다면, 성스러움에 대한 욕구 역시 병임에 분명하다.
모범생들은 대부분 ‘박수’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다. 그들이 목표로 삼는 ‘훌륭한 사람’은 많은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으로 설정된다. 따라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누구보다 먼저 누구보다 많이 쟁취하기 위해 욕심을 부리고, 누가 나의 박수를 빼앗아가지는 않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면 우울해 하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을 때는 ‘너보다 나은 나’에 우쭐해하며 교만을 부리고, 박수 대신 손가락질하면 분노한다. 따라서 박수를 갈망하는 모범생에게는 탐욕과 분노와 교만과 의심이 늘 함께 한다.
성스러움에 집착해도 병
부처님은 어리석음에 기인한 욕망이 결국은 아픔과 눈물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갈망을 완전히 제거하신 분이다. 그래서 성스럽다[聖]고 찬탄한다. 헌데 그런 부처님을 ‘성스러운 분’으로 설정하고도 갈망을 제거하기 보다는 ‘성스럽다고 찬탄을 받는 나’를 갈구하는 모범생들이 있다.
동쪽으로 가라는 데 서쪽으로 가고, 염불에는 관심 없이 젯밥에만 눈독을 들이는 짓이다. 벽돌은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될 수 없다는 회양선사의 꾸지람처럼, 아집과 욕망이 그럴싸하게 포장된 그런 수행으로는 결코 해탈과 열반을 맛볼 수 없다.
감기는 인류가 겪는 질병 중 가장 흔하고 단순한 질병이다. 허나 그 감기의 병원체인 인플루엔자에는 다양한 변형체가 있고 홍콩독감, 돼지독감, 조류독감 등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강력하다. 게다가 앞으로는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는 인플루엔자가 등장할 것이라고 과학자들이 경고하고 있다.
아집과 욕망도 인플루엔자처럼 끊임없이 모습을 바꿔가며 마음을 병들게 한다. 성스러움에 대한 욕망, 깨달음에 대한 욕망은 신종 인플루엔자쯤 될 것이다. 선사들이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새로운 처방, 더 강력한 항생제를 제시하셨지만 어쩌면 인간의 욕망은 더 이상 성현의 가르침이 먹히지 않는 복잡한 형태로 진화할 지도 모를 일이다.
성재헌은
경북 김천 출생으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후 해군군종법사를 역임하고, 동국역경위원과 한국불교전서번역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목차 바로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