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3. 남전, 살림살이를 걷어치우다
[성재헌의 ‘선사, 애물단지를 깨다’]
3. 남전, 살림살이를 걷어치우다
고통과 눈물만 남는 싸움의 시작은 ‘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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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짓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와 안기던 개가 주인을 물 경우가 있다. 하나는 새끼를 배었을 때이고, 또 하나는 먹던 밥그릇을 찼을 때이다. 개만 그럴까? 새끼와 밥그릇 앞에서 사나워지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생명체의 행동을 지배하는 기본적인 욕구, 즉 본능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한 것은 자기보존욕구와 종족보전욕구이다. 먹을거리 앞에서 으르렁거리고, 매혹적인 암컷 앞에서 염치불구하기는 사람이건 짐승이건 매 일반이다.
해서 동물세계도 인간세계도 식욕과 성욕의 충족을 위한 싸움은 그치질 않는다. 붓다는 젊은 시절 이런 생존경쟁의 비열함과 아픔을 목격하고, 이를 혐오해 싸움판을 떠난 사람이다. 그리고 깊은 성찰을 통해 고통과 눈물만이 남는 이 싸움의 시작이 무지(無知)였다는 걸 발견한 사람이다.
무지, 과연 뭘 몰랐을까? 그렇게 보존하고 싶어 안달인 ‘자기’와 ‘종족’ 즉 ‘나’와 ‘우리’라는 것이 착각에 근거한 터무니없는 관념이란 걸 몰랐던 것이다. 보존하고, 확장해야 할 ‘나’와 ‘내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붓다는 싸움과 눈물로부터 자유를 성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평생 온 인도를 떠돌며 “여러분, 안달하고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고 평생을 외쳤다. 허나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기울여 듣고, 수긍하고, 마음에 새긴 사람이라 해도 정작 ‘나’와 ‘내 것’으로 가꿔온 살림살이를 걷어치우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귀한 식량 축내도 그저 볼 뿐
‘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남전 보원(南泉普願) 선사가 외떨어진 암자에서 화전을 일구며 홀로 살 때였다. 깊숙한 골짜기 두툼한 솔가리 밑에 꼭꼭 숨어도 꾼들은 귀신같이 송이를 찾아내듯, 범상치 않은 한 수행자가 남전을 찾아왔다. 보통사람이면 꽤나 부산을 떨었을 게다.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겼으니, 게다가 꼭꼭 숨은 곳까지 물어물어 찾아왔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허나 마조(馬祖)의 발굽에 밟히고 또 짓밟혀 속기(俗氣)가 완전히 문드러진 남전이었다.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가르침을 청하는 젊은 수행자에게 그가 던진 한마디는 스승을 닮아 평상하기 그지없다.
“나는 산에 올라가야 하네.
밥 때가 되거든 당신 먼저 먹고, 한 몫은 산으로 보내주게.”
산마루 위로 아침 해가 한 뼘쯤 올랐을 때였나 보다. 살가운 인사 한마디 없이 괭이를 지고 털레털레 오솔길을 오르는 남전, 보통사람이었다면 아마 바로 발길을 돌렸을 게다. 그리고 뒤통수에 한마디 던졌을 게다.
“저런 예의도 모르는 사람을 짚신 닳아가며 찾아온 내가 바보지.”
허나 그 스님은 범상치 않았다. 툇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등에 진 바랑을 휙 던지고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고갯마루를 넘고 또 넘었으니, 꽤나 고단했을 게다. 그렇게 한참을 비비적거리다 후다닥 일어났다. 꼭두새벽 아랫마을에서 죽 한 그릇 얻어먹은 게 전부니, 꽤나 시장했을 게다. 그 스님은 부엌으로 들어가 넉넉하게 쌀을 안치고,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맛깔스런 반찬을 몽땅 꺼내고 싱싱한 재료를 골라 지지고 볶았다. 소금에 간장, 귀한 참기름도 팍팍 뿌렸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질펀하게 한 상 차려서는 고슬고슬한 밥을 솥 채로 먹어치웠다.
하루 세끼 기름지게 먹고, 쌀에 양념까지 넉넉한 지금 사람들이야 “뭐, 그럴 수도 있지” 싶겠지만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장 회해(百丈懷海) 선사에 의해 선종 승려들만 따로 거주하는 총림(叢林)이 설립되기 전에는, 선종 승려들이 대부분 큰 사찰에 부속된 율원에서 생활하였다. 그래서 선종의 승려들은 승가의 규율에 누구보다 엄격하였다.
계율에서는 이른 아침에 먹는 죽과 정오 무렵의 한 끼 식사 외에는 어떤 음식도 금지한다. 헌데 겨우 아침볕 가실 무렵에 배가 터지도록 밥을 먹었으니, 당시 선사들의 눈으로 보면 수행자 자격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스님, 설상가상이다. 제 배가 부르자 밥상을 걷어차고 숟가락을 휙 던지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코를 드르렁거리며 곯아떨어진 것이다.
굶주린 사람에게 밥 한 끼야 누군들 허용하지 않겠나. 허나 먹더라도 눈치를 봐가면서 먹고, 먹었으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먹고 나서는 설거지라도 하는 것이 손님의 예의다. 헌데 주인도 없는 집에서 그리 퍼먹고, 퍼질러놓고, 퍼잤으니, 요즘 사람 눈으로 봐도 사람 됨됨이가 틀려먹었다.
짧은 골짜기 해가 서산머리에 닿도록 땀을 뻘뻘 흘리며 괭이질하던 남전은 밥을 기다리다 지쳐 암자로 돌아왔다. 아마 가관이었을 게다. 궁색한 산골에서 귀한 양식이 바닥나고, 살림살이가 흙바닥에 나뒹굴고, 먹다 남은 밥 가져다 달라는 부탁마저 잊은 채 안방을 차지하고 누웠으니, 보통사람이었으면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을 게다.
허나 남전은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괭이를 내려놓고 손을 턴 남전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염치없이 퍼질러 자는 그 스님 곁에 가만히 누웠다. 인기척을 느끼고 벌떡 일어난 그 스님은 이렇다 저렇다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버렸다. 그래도 남전은 원망하지 않았다. 도리어 훗날 회상의 제자들에게 이날의 일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남전은 내 것 네 것 다툼 떠나
“내 지난날 암자에서 살 때 영리한 스님 하나가 찾아왔었는데,
지금까지 소식을 알 길이 없구나.”
쓸고 닦으며 소중히 간직하는 살림살이도, 몸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양식도, 백년을 살고도 하루를 더 유지하고 싶은 이 몸마저도 간밤에 보았던 꿈속의 여인처럼, 햇살아래 길어졌다 짧아지는 그림자처럼 무상하고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깨달음이 안으로 성숙해 ‘나’와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안달하던 마음을 쉬고, ‘너’와 ‘너의 것’을 차지하기 위해 벌였던 싸움을 멈춘 남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남전이었기에 살림살이를 몽땅 잃고도 피해자의 눈물을 보이지 않고, 가해자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보이지 않았을 게다.
입술까지 흐른 콧물을 쪽쪽 빨아먹던 시절, 옆집 담뱃가게 영숙이랑 담벼락 밑에서 살림을 차린 적이 있다. 인형을 들쳐 업은 영숙이랑 여보 당신하며 하루 종일 사금파리로 그릇을 만들고, 모래로 밥을 짓고, 붉은 벽돌을 갈아 고춧가루를 만들어 한 상 그득히 차리고는 밥상머리에서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이고, 토닥토닥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다.
골목에 어둠이 내리고 “영숙아, 밥 먹어라”고 외치는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쪼르륵 달려가 파란 대문으로 사라지는 영숙이에게 몹시 섭섭했던 적이 있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이부자리에 들어서도 ‘우리 살림살이를 누가 치워버리면 어쩌나, 영숙이가 내일 다른 애랑 살림을 차리면 어쩌나’ 불안해하며 잠든 기억이 있다.
돌아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등바등 놓지 못하는 우리네 살림살이, 돌아보면 이것도 우습지 않을까?
[출처 : 법보신문 201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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