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란 무엇인가] 간화선 수행 - 7. 대의심(大疑心) ②
[간화선 수행]
7. 대의심(大疑心)
② 오직 자신만이 풀수 있는 ‘가슴에 있는 의문’
화두 들고 억지 의심하면 오히려 병
역대 선지식 화두수행 통해 길 안내
인간은 근원적인 의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의문이다.
부처님도, 아무리 위대한 성인도, 역대 조사들도 그것은 해결해 줄 수 없다.
그 열쇠를 푸는 것은 오직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자신이 직접 물을 마셔봐야 그 물이 뜨거운지 찬지 스스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다행인 것은 역대 선지식들이 화두 수행을 통해
그 열쇠를 푸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는 점이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할 일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간화선 수행자들은 화두를 제시해 주고,
거기에 대해 어떤 해답도 주지 않은 채,
가슴에 하나의 큰 의심을 품게 하여 깨침으로 인도해준
스승의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느냐고 고백한다.
그런데 현재의 문제는 화두에 의심이 걸리지 않는다는데 있다.
화두를 들고 억지로 의심하니 오히려 그것이 병으로 도진다.
그래서 커다란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왜 중요하며 그것이 왜 우리가 가야할 길인가.
근세 철학의 비조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라는 철학자를 보자.
이 철학자로 인해 지구상에서 이성을 중심으로 한
철학과 자연과학이 새롭게 기지개를 편다.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본격적으로 자연을 지배하게 된다.
그의 역할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으며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너무나 이성을 절대화하고 이성을 신봉한 것이 문제였다.
데카르트는 자기 앞에 전개되고 있는 모든 현상은 꿈일런지 모르겠지만
의심하고 있는 나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고 했다.
그 결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고 유명한 언명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은 ‘나’라는 주체가 ‘어떤 대상’을 객관화하여 의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내 주관의 선입견을 떠날 수가 없으며,
내 생각의 틀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심은 나와 세계의 모든 것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의문 부호화하는 철저한 의심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나와 세계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의심을 커다란 의심이라 한다.
커다란 의심은 나도 없고 너도 없으며 의심 하나만 또렷하게 살아 있는 것을 말한다.
나 자신이 의심 자체인 것이다.
그래서 의심하는 것이 삼매가 되어 화두를 들고 화두 삼매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러한 삼매로서의 의심은 내가 생각의 틀로 무엇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철저히 죽어 없어지고 의심만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화두만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의심이 간절해지면 내가 없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커다란 의심이란
화두에 조그마한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의심을 말한다.
말과 생각의 흔적, ‘나’라는 흔적은 철저히 무가 되는 것이다.
의심이 간절해야 어떠한 강렬한 자극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경계에 부딪혀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화두를 드는 데 자그마한 의심이 따로 있고 큰 의심이 따로 있다는 말은 아니다.
화두를 들 때는 조그마한 생각의 자취도
허용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큰 의심이다.
다만 그러한 의심이 마음속에 얼마나 간절하게 달구어져 있느냐,
얼마나 빈틈없이 이어지느냐에 따라 큰 의심이다 작은 의심이다 할 뿐이다.
아주 크게 의심했을 때,
즉 대의(大疑)가 철저하게 드러났을 때, 기연을 만나 화두가 타파되면
중생 놀음하는 분별의식이 소멸되고 본래 부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선사들이 깨닫는 계기는 모두 이 대의가 역력하게 현전했을 때이다.
그래서 말하지 않는가.
“크게 의심해야 크게 깨닫는다.
크게 의심하여 내가 철저히 죽어 없어지는 순간 나는 다시 살아난다.
그가 바로 천하를 독보하는 ‘나’ 다.”
조계종 포교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