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이란 무엇인가] 간화선 수행 - 17. 부처님 마음으로 돌아가면 ‘바로 이 자리’
[간화선 수행]
17. 부처님 마음으로 돌아가면 ‘바로 이 자리’
깨달음과 입전수수
경계와 한계 없는 ‘수행’
깨달은 뒤에는 중생교화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깨달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깨달은 뒤 어떻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은 던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사실 깨달음이 우리가 체득해야 할 목표이기도 하지만,
그 깨달음이 신비의 베일에 쌓여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깨달은 사람만이 깨달음을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체험해 보지 않는 상태에서 깨달음을
내 자신의 언어로 정확히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자리에서 얘기하는 깨달음에 대한 내용은
깨달음을 밝혀 보여준 옛 조사 스님의 말씀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마조선사는 “평상심이 바로 도(平常心是道)”라고 했다.
이 말은 깨달음이 저 멀리, 저 언덕에서 쌍무지개 피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 움직이는 이 마음, 이 생활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귀다툼하며 근심걱정에 싸여
하루하루 늙어가는 생활이 깨달음이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마조선사는 우리들의 평상시 마음에 시비와 조작, 취하고 버림,
극단적인 생각에 치우침만 없으면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한다.
나와 너를 나누고, 옳고 그름, 선과 악, 가치와 반가치,
삶고 죽음을 나누어 경계선을 긋고 차별을 만들기 때문에
중생놀음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비심, 차별심, 생멸심,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마음만 돌리면 경계가 없고
한계가 없는 허공과 같은 마음, 부처님 마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돌아간다 하지만 그곳은 바로 이 자리이며,
나 자신이며, 나를 둘러싼 산이요 물이다.
그래서 황벽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그대의 말과 침묵, 움직임과 고요함,
모든 소리와 색깔이 모두 깨달음의 일이거늘 어느 곳에서 부처를 찾겠는가?
머리 위에서 머리를 찾지 말며, 부리 위에서 부리들 더 하지 마라.
다만 차별적인 견해만 일으키지 않으면 산은 산, 물은 물일 뿐이다.”
그리고 마음에 모든 분별심이 완전히 사라져 깨닫게 되면
가슴 속이 환히 밝은 것이 마치 백천 개의 해와 달과 같아
한 생각에 시방세계를 꿰뚫어 안다고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갈 길이 보인다고 한다.
깨달은 사람의 마음은 비유하자면 허공과 같은 마음이다.
허공, 그 청정무구한 허공! 자로 잴 수도 없고
부증불감하며 생멸함이 없는 마음,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갖가지 만상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생명이 약동하는 자리.
그런 허공과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은
마음이 쉬어서 여유롭고 부드러우며 한가하고 걸림이 없다.
서걱거림이 없으며 갈등에 휘말려들지 않고 삶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발길은 자연스럽고 여우로우며 한가하다.
아무리 총알처럼 빨리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 사람 앞에서는 한 없이 한가하고 느리게 보인다.
그 일 없는 한가한 도인은 깨달은 뒤
어깨에 바랑을 지고 시장 바닥을 거닐며 중생을 교화한다.
그것이 십우도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인 입전수수(入廛垂手)이다.
그 늙은이가 짊어진 바랑에 중생들에게 나누어줄 갖가지 물건들이 담겨 있다.
늙은이는 시장 바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대는 어디에서 왔소? 어디로 가시오?”
“그대는 누구요?”
말하자면 늙은이는 오늘날 명동 거리를 거니는 청춘남녀에게 묻는 것이다.
“그대는 어디로 가는가?”
“그대는 누구인가?”
과연 이 목소리가 내 마음을 헤집고 속살 가득히 들어와 몸서리치듯 전율하며 들어와 박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조계종 포교연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