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산방야화山房夜話

염불이 참선보다 더 효과적입니까?

쪽빛마루 2014. 11. 30. 16:46

염불이 참선보다 더 효과적입니까?


 서귀자(西歸子)라는 스님이 문앞을 지나다가 나에게 질문하였다.
 "나는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정토(淨土)에 태어나길 바랍니다. 생사에서 획실하게 벗어나는 길은 참선하는 것보다 아미타불 염송이 쉬운 듯합니다. 이 까닭은 멀리 계시는 아미타부처님께서 그윽하게 가피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네들이 하는 참선은 잡을것도 없고 성스러운 힘의 가피를 받을 수 도 없읍니다. 실로 아주 근기가 빼어난 사람들이 한번 듣기만 하면 수천 가지를 깨닫는 정도의 재주가 아니고서는 참선의 본면목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영명 (永明)선사께서도 '참선하는 사람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라고 걱정하기도 하지 않았읍니까?"
 내가 하도 한심하여 대답했다.
 "쯧쯧! 이 무슨 말씀입니까? 렇다면 극락정토 밖에 따로 참선이 있단 말입니까?

설사 정말로 있다고 한다면 불佛)과 법(法)이 서로 모순이 됩니다. 그래서야 어찌 불법으로써 사람을 인도하는 원융한 이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상황의 적절한 방편을 잘 모르고 자신의 견해에만 국집하여 선철(先哲)을 속이고 비방하는 격입니다.
 실로 영명스님께서 참선과 정토를 짝지어 4구게(四句偈)를 만드신 까닭은 듣는 이의 근기에 알맞게 특별히 방편을 써서 강조한 것일 뿐입니다. 대체로 교학(敎學)에서 이른바, '원래는 1승도(一乘道)뿐이지만 방편으로 분별하여 3승도(三乘道)를 설한다'라고 한뜻과도 같습니다. 장로(長蘆), 북간(北磵), 진헐(眞歇), 천목(天目) 등 여러 스님들이 저술하신 정토에 관한 게송도 모두 말로써 풀어놓은 즉심자성(卽心自性)의 참선입니다. 애초부터 별다른 무엇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사람이 말하기를 '동도(東都)의 희법사(曦法師)가 선정(禪定) 속에서 연꽃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그 연꽃에 원조 본선사(圓照本禪師)의 이름이 쓰여있었다고 합니다. 달마스님 선법을 정통으로 이은 원조스님으로서 어떻게 연꽃에 이름이 박혀 있을 수가 있을까 하고 의심했읍니다'라 했다. 그래서 일부러 내가 가서 질문했더니, 원조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비록 선문(禪門)에 있었으나 정토신앙을 겸해서 수행했다.' 그 당시에 원조스님께서는 갖가지의 방편으로 찾아와 질문하는 사람들을 지도한 것이지 어찌 정말로 그랬던 것이겠읍니까? 미혹한 사람들이 방편으로 그런줄을 모르고 제멋대로 '참선 말고 따로 정토에 귀의해야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영명스님의 「정토4구게(淨土四句偈」를 변명의 구실로 삼기도 하니, 이것 역시 잘못이 아니겠읍니까 "
 손님이 자리를 고쳐 앉으면서 좀더 자세한 설명을 청했다.

 "정토와 참선의 경지가 서로 어떤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대답했다.

 "정토도 마음이며 참선도 또한 마음으로서 본체는 하나이지만 이름을 서로 달리했을 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명칭에 집착하여 그 본체를 미혹하고, 반면에 깨달은 사람은 그 본체를 알아서 이름에 끄달리지 않습니다. 어찌 정토만이 그렇겠습니까? 교학(敎學)에서 말하는, '일체의 모든법 (法)이 마음에 상주한 자성〔卽心自性〕임을 알아야한다'라고 말한 부분과, '삼라만상이 한법〔一心〕에서 나왔다'라고 한 것이 모두 그렇습니다. 다만 자기 마음 속의 선(禪)을 깨닫기만 하면 삼계의 만법에 두루한 신령한 근원에 닿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이든지 완전하고 진실되어서 전혀 간택할 것이 없읍니다. 그리하여 이미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구별이 있을 수가 없는데, 어찌 정토(淨土)니 혹은 예토(穢土)니 하는 구별이 있을 수 있겠읍니까?
 십만억토를 한걸음에 다가가고 갖 가지의 보배로 온 우주를 그득히 채우기도 합니다. 나아가 한 찰나에 영원한 세월을 맛보아, 그 속에서 비취빛 대나무와 노란 국화가 동시에 피어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큰 바다와 같은 아미타불의 눈이 또록또록 빛나고, 다섯개의 수미산 같은 백호광명(白毫光明)이 곳곳에다 찬란한 빛을 분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늙은 달마는 흘연히 명월주(明月珠)를 잊고 아미타불도 황금도장날 잃어버릴 것입니다. 선문(禪門)도 군더더기에 불과한 말이며, 정토도 또한 헛된 이름에 불과합니다. 이름이니 본체니 하는 견해도 없어지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알음알이가 없어지면, 장육금신(丈六金身)과 한줄기 풀이 어떤 우열이 있겠으며, 삼천대천 세계와 한점의 티끌에 어찌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한결같이 평등한 법문입니다. 실로 참되고 온몸으로 깨달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찌 해탈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참선을 하는 목적은 생사의 문제를 투철하게 해결하는 데에 있으며, 또한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도 오직 생사문제를 확실히 해결하자는 데에 그목적이 있읍니다. 성인들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방법은 수천수만 가지이지만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생사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오직 한 부분이라도 투철하게 깊숙이 들어가야지, 이것 저것 겸수(兼修)를 해서는 안 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털끌만큼이라도 알음알이〔思念〕에 얽매인다면 3악도(三惡道)에 떨어집니다. 조금이라도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오랜 세월동안 윤희에 빠집니다. 그런데 어찌 겸수(兼修)가 있을 수가 있겠읍니까?'라고 하였읍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수행하지 않고, 참선이 이러니 정토가 저러니 말로만 하면 쓸데없이 생각만 복잡해지고 알음알이만 더더욱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끝내는 생시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차마 내가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