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에 집착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 아닙니까?
공안에 집착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 아닙니까?
객승이 또 질문하였다.
"조사의 공안(公案)은 본래 참선하는 사람이 의심이 생겨서 질문한 것입니다. 그러니 옛사람이 깨달은 마음자리는 마치 빈 골짜기의 메아리와도 같고, 혹은 커다란 북이 두들기는대로 소리가 나듯이, 상대에 따라 그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공안이란 다른 사람의 의심덩어리를 풀어주는 것에 불과한 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가리키는 선[直指之禪]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중시하지 않으며 한 법도 남들에게 준 적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공안이란 선배들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어서 마지못해 주고받은 짧은 얘기입니다. 그러다 그것들이 총림에 전해져서 깨달은 이들이 이것을 공안이라고 후에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원래의 공안은 분명한 도리에 근본하였는데 요즈음 총림이 되어가는 모양을 보니 전혀 처음의 분명한 도리는 없어진 듯합니다. 그리하여 부처가 무엇이냐고 묻거나 달마스님이 인도 땅에서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삼세근〔麻三斤〕이다, 혹은 똥 묻은 막대이다, 혹은 수미산(須彌山)이다, 혹은 망상 피우지 말라[莫妄想]는 등등으로 대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도(道)가 낮은 사람을 인도하려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감파(勘婆), 화타(話墮), 탁발(托鉢), 상수(上樹) 등등으로 대답하는 것을 도가 높다고 평합니다.
그런가 하면 후학을 제접하는 방편으로 3현(三玄)을 나열하여 귀결시키기도 하며, 혹은 모든 언어를 과판(科判)하여 4구(四句)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그 구구절절한 말들을 1700공안(公案)으로 정리하고, 그 각각에 이름을 붙여서 서열을 매기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난 잘 모르겠읍니다. 위와 같이 한 것이 본래 눈밝은 종사들외 본 뜻인지?"
나는 대답했다.
"조사외 말씀은 아주 공적(空寂)하여서 인위적으로 꾸민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손 가는대로 쓴 것이지, 애초부터 사량 분별하여 선택해서 쓴 것은 아닙니다. 무릇 모든 것이 달마스님이 흘로 전한 뜻[單傳之旨]에 근본을 둡니다. 그러므로 말을하기 시작하면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보여주니, 결코 숨기거나 감추는 것이 없읍니다.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달이 하늘에 떠 있지만 동쪽으로 가는 사람이 바라보면 달이 동쪽으로 가는 듯하고, 서쪽으로 가는 사람이 달을 바라보면 달이 서쪽으로 가는 듯합니다. 그런가하면 움직이지 않고 가운데에 가만히 서 있는 자는 '달이 나와 함께 움직이지 않고 있구나'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가 빠져 있는 소견으로 서로 동쪽, 서쪽, 혹은 움직이지 않는다고 달리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름달이 허공에 뜨면 실로 '동쪽이다','서쪽이다'하는 것도 결국은 움직이지 않는 원래의 자리를 기준으로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쿵 저러쿵 공안에 대하여 서로 다른 말이 생긴 이유는 법의 근원을 획실히 깨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상대방에 따라 허공의 크기와 모양이 달라진다는 비유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깨달은 선배 종사(宗師)들이 공안을 설명할 때에 혹은 생략하기도 하고 혹은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언어로 설명하는 본뜻이 혀끝에 있지 않다는 말로써 증거를 삼아 종사들을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수준에 맞게 이해한 뜻으초서 종탈역순(縱奪逆順)으로 종횡무진하게 설명하는 정안종사의 말씀에 부딪치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이치를 극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공안이 그에 알맞는 도리를 갖고 있읍니다. 그러나 각각 공안마다의 깊이는 사람이 바다에 들어가 바다의 깊이를 재는 것처럼 깨달은 정도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져서 계속 들어가면 가장 깊은 밑바닥까지 도달할 수 있읍니다. 이렇게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고 나서 흘연히 왔던 길을 되돌아보면 바로 이것이 바다였구나라는사실을 알게 됩니다. 만약 그 깊은 곳에 몸소 도달해서 한번 뒤돌아보지 않았더라면 가슴 속의 의심덩어리를 집어내어 제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마조스님에게 묻기를, '무엇이 부처인가요? '라고 하자 마조스님이 말하기를,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라고 대답했읍니다. 이 공안은 비록 전에 참선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라도 모두가 알았다고 지나쳐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그 지극한 뜻은 오래 참선한 선승(禪僧)이라도 거의가 잘못 알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가? 아마도 그 사람에게 '무엇을 마음이라 하는가?'라고 다시 질문하면, 이것은 벌써 옆길로 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그 지시하는 당처(當處)에서 그대로 훌쩍 뛰어넘기를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쓱싹 해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공안의 참뜻을 분명하게 알아서 마치 교통이 자유로운 십자로(十字路)위에서 그리운 어버이를 만나 달려가듯이 이리저리 따질 겨를 없이 단박에 깨쳐야 합니다.
혹 어떤 무리들은 전혀 참선도 하지 않고, 또 마음자리를 분명히 밝히지도 않고, 생사의 큰 의심덩어리인 번뇌를 절단하지도 않고, 오직 총명한 재주만을 믿고 고금의 문자만을 이리저리 따지고 연구하여, 그저 그럴듯한 언어로 비교하고 헤아려서는 고금의 공안을 모두 알았노라고 자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생사의 근본을 몰랐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무리들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하는 솔직한 사람만도 못합니다. 솔직한 사람은 지금까지는 공안의 깊은 뜻을 몰랐으나, 어느날엔가 홀연히 신심(信心)을 일으켜 똑 바로 공안을 참구(參究)하기만 하면 명확하게 깨닫는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오직 총명하고 영리하기만 하여 머리 속에서만 미리 알아버린 사람은 절대로 다시는 올바른 믿음을 내어서 명확하게 깨닫지 못할 겁니다. 요즈음 총림에서는 남의 말 듣는 데에 급급하며, 또한 참선하는 이들을 대접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언어나 문자로만 따지는 무리들은 근본자리에 부딪치게 되면 화두 한 귀절 대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가 어려운 책을 읽듯이 쩔쩔맵니다. 이 무리들이 알음알이로 공안의 뜻을 풀어보려고 하지만 이것은 마치 그물 속에 입으로 바람을 불어서 가득차게 하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읍니다.
진정한 선객[本色道流]은 이와 같은 나쁜 독약을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고금의 기연을 만나더라도 절대로 이리저리 따지려들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단박 깨우쳐 생사의 바른 뜻을 꿰뚫어버립니다. 마치 눈앞에 수만길이나 되는 장벽이 서 있는 것처럼 오래도록 공안을 참구하다가 홀연히 의심덩어리를 타파합니다. 그러면 백천만 가지 공안의 심천(深淺), 난이(難易), 동별(同別)이 한꺼번에 뚫려서 자연히 남에게 묻지 않게됩니다.
가령 마음의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는데도 자기 자신에게 되물어 참구하려 하지 않고 끌내 남들이 열어 보여주기를 바란다면, 비록 석가모니부처님과 달마스님이 간과 쓸개를 꺼내어 보여준다 해도, 오히려 그 마음의 눈만을 멀게 할 뿐입니다.
생각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
山房夜話 上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