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온 길(天目中峯)
내가 살아온 길(天目中峯)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항주(抗州)의 신성(新城) 땅에서 살았으며, 성은 손씨(孫氏)이다. 그런데 할아버지 대에 전당(錢塘) 땅으로 이주하여 부모가 그 곳에서 일곱 자녀를 낳았는데, 나는 그중 제일 막내였다. 나는 겨우 포대기를 떠나던 시절부터 범패(梵唄)를 읊조리고 불사(佛事)를 흉내내며 소꿉장난을 했다. 이웃 사람들은 이런 나를 이상히 여겼다. 일곱 살이 되자 나는 외전(外典)인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읽었고, 아홉 살이 채 못되어 어머니를 잃어서 그만 학문을 중지하였다. 어려서부터 출가할 뜻을 갖고 있었지만, 세상일에 얽매여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 24세가 되자 그 속박이 자연히 풀렸다. 이 때가 바로 지원(至元) 연간의 병술(丙戌 :1286)년이었다. 이 해 5월 산에 올라 고봉(高峰)스님의 제자로 들어갔다. 이윽고 「금강경」을 지송하던 중, "여래를 걸머진다[荷擔如來]"는 문구에서 분명하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이로부터 경서(經書)와 어록(語錄)의 맛에 상당히 심취했는데, 깨닫지는 못했었다. 그 이듬해인 정해(丁亥 :1287)년 2월에 우바새 양씨(楊氏)가 생활용품을 주어 산해옹(山海翁)을 따라 산에 올랐는데, 그때야 비로소 머리를 깎고 먹물옷을 입었다. 기축(己丑 : 1289)년에 당사(堂司)의 소임을 맡았었고, 경인(庚寅 :1209)년에 몰래 이곳을 떠나려 하다가 그만 송공(松公)에게 들켰다. 그래서 다시 기름진 전답 3묘를 도와주며 참선을 하였다. 그런지 얼마 안되어 코피가 나는 병에 걸려 그것도 그만두고 선사(先師))의 시봉을 했다.
신묘(辛卯 :1291)년 봄에 구공(瞿公)이 전자(田莊)을 시주하였으나, 편지를 해서 되돌려주게 하였다. 임진(壬辰 :1292)년에는 고무(庫務)의 소임을 맡았다.
계사(癸巳 : 1293)년과 갑오(甲午 : 1294)년에는 시주의 문전이 분주했을 뿐이다. 원정(元貞) 연간 을미(乙未 :1295)년에는 선사께서 병으로 누우셨는데, 끝내 일어나지 못하셨다. 장례를 마친 나는 즉시 산을 떠나 오랜 뜻을 이루게 되었다.
병신(丙申 :1296)년에는 오문(吳門) 땅을 왕래하였다. 그리고 대덕(大德) 연간 정유(丁酉 :1297)년 봄에는 걸망을 짊어지고 천주산(天柱山)으로 갔다가, 가을이 되자 여부(廬阜)로 갔다. 겨울에는 건강(建康)땅으로 가서 초가집에 은둔하며 10개월간을 지냈다.
무술(戊戌 : 1298)년 겨울에는 변산(弁山)땅에 환주암(幻住庵)을 지었고, 이듬해 겨울에는 오문땅에 환주암을 지었다. 그리고 경자(庚子 :1300) · 신축(辛丑 :1301) 연간에는 두 곳에서 다 거처하였다.
임인(任寅 :1302)년에는 대각사(大覺寺)에서 주지를 맡아 달라고 청하여 남서(南徐)땅으로 피해갔다. 이듬해 계묘(癸卯 :1303) 년에는 대각사로 목면가사를 되돌려 보냈다.
갑진(甲辰 :1304)년에는 산으로 되돌아가 선사의 탑을 지켰다. 을사(乙巳 :1305)년 겨울에 사자원(師子院) 일을 맡았고, 병오(丙午 :1306) · 정미(丁未 ;1307)에서 무신(戊申 :1308)년 겨울에 이르기까지는 오·송(吳·松)땅을 번갈아 왕래하느라고 산으로 되돌아오질 못했었다.
기유(己酉 :1309)년에는 의진(儀眞)땅에서 배를 사서 여름에 삽성( 城)땅에 닻줄을 매었다. 경술(庚戌: 1310)년에 천목산(天目山)으로 되돌아가 산과 배에서 거처하였다. 신해(申亥 :1311)년에 다시 배를 만들어 타고 변수(汴水)로 갔다.
황경(皇慶) 연간 임자(壬子: 1312)년 봄에는 육안산(六安山)에 암자를 지었고, 가을 에는 배를 타고 동해주(東海州)로 갔다. 이듬해 계축(癸丑)년에는 개사(開沙)에 배를 정박시키고, 정수(定叟)스님을 대각사(大覺寺)로 보내어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환산암(環山庵)에 가 머물렀다.
연우(延祐) 연간 갑인(甲寅:1314)년 봄에는 다시 사자원(師子院)의 일을 맡았다. 이듬해 을묘(乙卯)년에는 대와(大窩)땅에 암자를 지었고, 병진(丙辰:1316)년 봄에는 당뇨병이 생겨 고생하였다. 그 해 여름에는 남심(南尋)에 배를 정박시켰다.
정사(丁巳: 1317)년에는 단양(丹陽)땅의 대동암(大同庵)에서 거처하였다. 그 이듬해 무오(戊午)년에 다시 천목산으로 되돌아왔다. 기미(己未: 1319) · 경신(庚申 :1320)에서 지치(至治) 연간의 신유(辛酉 :1321) · 임술(壬戌: 1322)에 내 나이 60세가 되었다. 이 해 여름 중가산(中佳山)에 암자를 지었다. 출가했던 병술(丙戌: 1286)년에서 60세가 되던 임술(壬戌 :1322)년까지 37년간의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허깨비 같은 자취를 멀리 이끌고 가서 인연을 피할 계획을 세웠다.
내가 처음 발심하여 출가했던 뜻은 초의(草衣)에 때묻은 얼굴로 두타행(頭陀行)을 익히며 가사(田衣)를 수하려 했는데, 결국 종신토록 부끄러움만 안게 되었다. 그렇다고 문자를 주물렀지만 학문을 완성하지도 못했고, 참구했지만 깨달아 밝히지도 못했다. 평소에 쓸데없는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칭찬했던 것은 보연(報緣)의 우연일 뿐이었다. 항상 은퇴하여 쉬는 것을 흠모했을 뿐이고, 세상을 바로잡거나 세속의 일을 끊지도 못하고, 앉아서 신자들의 시주만 받아먹었으니 위태롭고 불안할 뿐이다.
옛 사람은 나이 50이 되어서 지난 49 년간의 잘못을 알았다고 했다. 지금 나는 60이 되어 지난 일들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대개 헛된 알음알이에 가리웠던 세월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어찌 이치에 합당할 까닭이 있겠는가? 세월(浮光)과 덧없는 이 내 몸(幻影)은 잠깐 사이에 변한다. 이러한 나의 회포를 글로 써서 스스로를 경책하려 한다.
東語西話 下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