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는 둘이 아니라고 하는 참뜻은 무엇인가?
이치는 둘이 아니라고 하는 참뜻은 무엇인가?
천하의 이치를 가만히 엿보았더니, 참된 이치는 모두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잘 모르는 사람만이 참된 이치를 둘로 보고 동일하게 보지 못한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상에는 본래 모든 알음알이를 쉬어서 한가한 자도 있고, 게을러서 한가한 자도 있다. 두 사람은 한가하다는 측면에서는 동일하지만, 알음알이를 쉰 것과 게으른 면에서는 하나라고 할 수 없다. 바쁜 것도 똑같다. 도의(道義)를 극진히 하느라고 바쁜 사람도 있고, 이욕(利欲)을 좇느라고 바쁜 자도 있다. 바쁜 것은 똑같지만, 도와 이욕을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잘못에 깊이 빠져 되돌아올 줄 모르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마음이 미(迷) · 오(悟) 두 갈래에 빠져 스스로 미혹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모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이 자기와 닮지 않았다고 책망하면서 몹시 미워하기까지도 한다. 마치 게으른 사람이 죄악의 더러운 수렁에 자기 자신이 빠져 있는 것은 모르고, 도리어 도의를 극진히 하느라고 바쁜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또 자신의 사리사욕을 좇느라고 바쁜 자가 자신이 미치고 전도된 세계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도리어 마음과 뜻을 쉬어 한가한 사람을 잘못이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 오직 성인의 마음만이 도의(道義)에 공정하여 백천의 방편으로써 허망하고 잘못된 정(情)을 바로잡고 , 한가한 사람, 바쁜 사람 모두를 그 이치에 계합시켰다.
아아! 사람들의 정(情)이 미망(迷妄)에 빠지고 말았구나. 성인 이 '옳다'고 한 것은 사람들도 '옳다' 고 한다. 그러나 말뿐이고 정작 생각은 고치지 않는다. 또한 성인이 '잘못이다'고 한것은 사람들도 또한 '잘못이다'고 한다. 비록 입으로는 '잘못이다'고 하지만, 정작 그 정(情)은 버리지 않는다. 이러한 시시비비(是是非非)는 겉으로 보아서는 그럴듯 하지만, 진실과 견주어 보면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가 난다. 세속의 잘못에 관해서는 우선은 덮어두고 얘기하지 말기로 하자. 가령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한 말은 깨달은 사람도 그렇게 말하고, 알음알이로만 이해한 사람도 그렇게 말한다. 이것이 겉보기에는 비슷하다고 말하는 까닭은 '마음이 곧 부처이다'고 하는 말을 두고 하는 것이다. 깨달은 사람의 말은 밝은 거울이 물건을 비추면서도 흠이나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알음알이로 이해한 사람의 말은 마치 다섯 가지 색깔로 어떤 물건을 그리는데, 붓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하면 군더더기가 많아지지만 어쩌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그런데도 배우는 사람들은 어찌 겉보기만 그럴듯한 이치를 구분해내질 못하는가?
세상의 모든 그릇은 제각기 용량이 있기 마련이다. 술잔은 술잔으로서의 크기가 있고, 항아리는 항아리로서의 크기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릇의 종류를 굳이 다 말하지 않더라도, 그릇은 용량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바로 몸의 그릇이다. 그러므로 어찌 그것에 크기가 없겠는가? 성인과 범부의 마음은 서로 같고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도 그 마음이 서로 달라지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술잔도 그릇이고 항아리도 그릇이다. 그릇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둘 다 다를 것이 없지만, 크기는 소견의 밝음과 어둠을 따라서 대소가 구별된다. 이것은 마치 개미는 눈을 부릅떠도 아주 조금밖에 보지 못하고, 사람 역시 아무리 애써도 몇 리 이상은 볼 수 없지만, 신통을 갖춘 성인은 대천세계를 손바닥 안의 아마륵 열매를 보듯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더구나 우리 부처님께서는 4대해(四大海)같은 눈으로 미진찰토(微塵刹土)를 뚜렷하게 관찰하여 무엇 하나 빠뜨리지 않으신다. 그래서 '부처님 마음의 크기는 항사세계(恒沙世界)에 두루한다.'는 찬사가 생기게 된것이다. 장무구거사(張無垢居士)는 "사람이 경솔하게 노하고, 쉽게 기뻐하는 것은 도량이 크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량이 크지 못하면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빠진다. 기분이 좋지 않으면 하는 말이 온화하지 못하고, 말이 온화하지 못하면 분노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난다. 심지어는 이를 갈고 팔을 걷어부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이처럼 잘못이 불같이 일어나면 화환(禍患)의 덫에 걸려들지 않을 자가 없다"고 하였다.
소견의 밝음과 어두움은 학문이 제대로 되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학문이 제대로 되지 못하면 소견이 어두워 도량이 좁아지고, 학문이 차츰 이루어지는 사람은 소견도 깊어지고 확연해진다. 나아가 학문이 순일 (純一)해지면 소견도 넓어져 굉활하게 되며, 학문이 크게 이루어지면 견해는 분명하고 원만해진다. 성인(聖人)은 학문이 크게 이루어진 자이며, 지인(至人)은 학문이 순일하게 이루어진 자이며, 현인(賢人)은 학문을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는 사람이며, 일반 사람들은 학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자들이다. 이렇게 되면 마음의 도량은 자연 작아질 뿐이다.
도량이 한번 좁은 데에 빠지면, 넓어지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터럭만큼이라도 이해(利害)를 좇지 않게 늘 함양(涵養)해야 된다. 그러나 마음의 소견은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함양의 도는 힘써 실천하고 정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함양이란, 첫째 믿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믿음이란 무엇인고 하니, 성인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것이다. 학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으면 소견도 자연 어둡다. 마음의 알음알이가 사라지지 않으면 걸핏하면 성인의 말씀을 믿지 않고 천리(天理)를 어기는 짓을 죽을 때까지 계속한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3계는 별다른 법이 아니다.한 마음으로 지은 것일 뿐이다"고 하신 것이다. 3계는 본래 일삼을 것이 없는데, 사람의 마음이 스스로 흔들렸을 뿐이다. 실로 이 사실을 믿는다면 모든 경계에 시비증애(是非憎愛)를 두지 말아야 한다. 혹 이런 견해를 간직 했다면 바로 이것을 두고 자기 마음으로 분별한 것이라 한다. 자기의 마음으로 분별했다면 내 마음의 도량도 비좁고 옹색할 뿐이다. 시비를 분별할수록 마음 그릇의 도량은 더욱 좁아진다. 티끌 수처럼 두루한 법계를 우러러 관찰해 보아라! 하루와 영겁의 세월의 차이가 고작 배(倍)만 되겠는가! 그러나 믿은 후에야 배울 수 있고, 깨달은 후에야 밝힐 수 있고, 밝힌 후에야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뚜렷하게 밝히고 영원하게 살필수 있다면, 마음의 도량은 머지않아 허공과 같이 너그러워질 것이다. 비록 삼라만상이라 해도 이것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사람마다 이같은 도량을 갖추었건만, 믿음이 독실하지 못하고 학문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시비증애를 달게 여기고 번뇌습기의 세계에 갇혀 있게 되었다. 도인이 어찌이렇게 마음을 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