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치문숭행록緇門崇行錄

제 3장 스승을 존중하는 행[尊師之行]

쪽빛마루 2014. 12. 7. 14:39

제 3장 스승을 존중하는 행[尊師之行]

 

 

스승을 존중하는 행[尊師之行]

 

 

1. 밭에서 힘써 일하다[力役田舍]

 

 진(晋)나라 도안(道安 :314~385)스님은 12살에 출가하였는데, 총명하였으나 모습이 형편없어 스승에게 중히 여겨지지 못하고 3년이나 밭일을 하였다. 그러나 힘써 일하면서도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수년이 흐른 후에 비로소 스승에게 공부할 경전을 청하니 스승께서 「변의경(辯意經)」 한 권을 주셨는데 5천 단어는 되었다. 도안은 경전을 가지고 밭일 하면서 쉬는 사이에 틈틈이 경을 보았다. 저녁에 돌아와 다시 다른 경전을 청하자 스승이 말씀하였다.

 "어제 준 경도 다 읽지 못하였을 텐데 다시 구하는냐?"

 도안이 벌써 다 외웠다고 하니 스승이 그를 달리 보았으나 아직 믿지는 않았다. 다시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 1권을 그에게 주니, 1만 단어는 되었다. 이를 가지고 가 처음과 같이 다 외우고 저녁에 다시 그 경전을 돌려드렸다. 스승께서 그 경전을 외우게 하니 한 글자도 틀리지 않자 스승이 비로소 크게 칭찬하였다

 

  찬탄하노라.

 

  도안스님은 나라의 보물이시다.

  농사일에 버려두어도 복종하고 부지런히 하며 원망함이 없었다.

  요즈음 제자들은 한 치 잘난 것을 자랑하면서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대하면 곧 가버린다.

  하물며 밭일이겠는가?

  더우기 그 일을 오래 하겠는가?

  내 어찌 몇번이고 찬탄하지 않으리오

 

 

2. 회초리를 받고 자신을 책망하다[受杖自責]

 

 진(晋)나라 법우(法遇)스님은 도안(道安)법사를 스승으로 섬기다가 그 후 강릉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렀다. 여러 경전을 강설하였는데 배우는 사람들이 4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 때 한 스님이 술을 마신 것을 알고 법우스님이 벌을 주었으나 쫓아내지는 않았다. 도안법사가 그 일을 멀리서 듣고서는 대나무통에 한개의 가시 회초리를 넣고서 봉함하여 법우스님에게 보냈다. 스님이 봉함한 것을 여니 가시 회초리가 보이자 말하기를,

 "이것은 술을 마신 중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고 거느리기를 게을리 하여서 멀리서 근심해 주시는 은혜를 입었다."

하고, 곧 북을 울려 대중들을 모이게 하여, 나무통을 앞에 놓고 향을 사르고 멀리 도안스님에게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는 땅에 엎드려 유나(維那 : 齊나 儀式을 지휘하는 스님)에게 가시 회초리로 세 번 때릴 것을 명령하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책망하였다. 경내의 승려나 속인들로서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이일로 행업을 가다듬는 자들이 매우 많았다.

 

  찬탄하노라

 

  아아,

  요즈음 사람들에게

  도안스님의 회초리 상자를 열게 한다면

  대통을 부수고 가시 회초리를 꺾으며

  불경한 말을 하지 않는 자가 적으리라.

  이러한 성스러운 스승과 훌륭한 제자는

  천년(千年)이 지나도

  나는 오히려 두 분도 많다고 여긴다.

 

 

3. 스승을 위해 예불 참회하다[爲師禮懺]

 

 진(晋)나라 법광(法曠)스님은 하비(下邳)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계모를 섬겼는데 효행으로 소문이 났었다. 그 후 출가하여 담인(曇印)스님에게 사사하였다. 한번은 담인스님이 병으로 위독하였는데, 법광은 이레를 밤낮으로 지성으로 기도하며 예불 · 참회하였다. 칠일째 되는 날, 홀연히 오색광명이 담인스님의 방에 비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담인스님은 어떤 사람이 손으로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괴로와하던 것이 말끔히 나았다.

 

 

4. 눈이 무릎 위까지 쌓이도록 서 있다[立雪過膝]

 

 위(魏)나라 신광(神光 : 487~593) 은 학문과 지혜가 세상에서 으뜸이었다. 달마스님이 서역으로부터 중국으로 오자 신광이 찾아가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려 하였으나 달마스님은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어느날 저녁, 큰 눈이 내리는데 신광은 뜰의 섬돌에 서 있었다. 새벽이 되니 눈이 그 무릎 위까지 쌓였다. 달마스님은 그제서야 뒤돌아보며,

 "오랫동안 눈 속에 서 있으면서 무엇을 구하는냐?"

하니, 신광은 울면서 말하였다.

 "스님께서 감로의 문을 여시어 뭇 중생[群品]을 널리 제도해 주시옵기를 바랄 뿐입니다."

 달마스님은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묘도(妙道)에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애써 정진하며, 어려운 행도 실천해내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 낼 수 있다 하여도 아직 이를 수 없다. 그대는 지금 경박한 마음으로써 진승(眞乘)을 바라니, 부질없이 수고롭기만 할 뿐이다"

 신광은 꾸지람을 듣고 칼로 팔을 끊어 스님 앞에 바치니 스님께서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들이 도를 구할 때에도 법을 위해 몸을 잊으셨다. 그대도 지금 팔을 끊었으니 도를 구하는 태도가 되었다."

 "저의 마음이 편안하질 않습니다. 스님께서 마음을 편하케 해주십시오."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 주리라."

 "마음을 찾아도 끝내 찾을 수 없읍니다."

 "벌써 그대 마음을 편케 하여 주었느니라."

 그리고는, 드디어 법을 전하여 2조(二祖)로 삼았다.

 

  찬탄하노라

 

  2조께서 법을 얻음은

  참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기연이 이미 익어

  바늘 끝으로 개자를 뚫은 것이요

  반드시 팔을 끊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겉모습만 흉내내면서

  칼 가는 데 힘을 쏟는다.

  아아,

  법을 전하는 데 반드시 팔을 끊어야 한다면

  모든 조사들은 온전한 팔이 없을 것이다.

  부처를 이루는 데 반드시 몸을 태워야 한다면

  모든 성인들은 살아서 밥먹을 수가 없으리라.

  번뇌의 팔을 끊고 무명의 몸을 태워야 하니

  원컨대 참선하는 납자여, 힘쓸지어다

 

 

5. 스승 떠났던 것을 스스로 책망하다[離師自責]

 

 당(唐)나라 청강(淸江)스님은 어려서 세상이 허깨비나 물거품 같다는 것을 깨닫고, 담일율사(曇一律師)께 예의를 갖춰 스승으로 모셨다. 경법(經法)을 읽고 외움에 보는대로 훤히 알았으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납자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준마로다."

라고 하였다. 하루는 스승과 약간 뜻이 어긋나서 스승을 버리고, 각지로 떠돌아다니며 널리 큰 스님들의 법회(法會)를 두루 편력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를 반쯤 돌아다녔으나 나의 본래 스승 같은 분이 드물구나."

 그리고는 스승이 계시는 곳으로 되돌아왔는데 마침 스님들이 모여 있을 때였다. 그는 가시나무를 등에 지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제가 다시 스님께 귀의하고자 합니다. 거두어주시옵기를 바라옵니다."

 그 때 담일스님은 꾸짖고 욕을 하였다. 청강스님은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참회하며 말하였다.

 "그 때 생각은 무지(無知)하였읍니다만 지금 마음은 깨우친바가 있읍니다. 스님께서는 큰 자비를 베푸시어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슬프게 간청하기를 몇 번이고 하자 담일스님은 그를 연민히 여기시고 드디어 그전처럼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허락하였다. 담일스님이 돌아가시자 청강스님은 혜충국사(慧忠國師)를 찾아뵙고 심요(心要)를 은밀히 전수받았다.

 

  찬탄하노라.

 

  스승을 버리고서 잘못임을 알았고

  꾸지람과 욕을 듣고서도 물러나지 않았으니

  총명하고 성실하다 할 만하다.

  끝내는 심인(心印)을 전수받았으니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저 신심 없는 부류들은

  조금만 미워해도 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고

  약간만 꾸짖어도 원한을 품고 잊질 않으니

  무릇 눈 밝은 스승을 만났으나 끝내 무슨 이익 있으리오.

  제왕을 만나서도 한 자리 얻지 못한 것과 같으니

  애석하구나.

 

 

6. 정침에 모시고 받들다[迎居正寢]

 

 당(唐)나라 석상 경제(石霜慶諸 :807~888)스님은 도오(道吾 :769~835)스님에게  법을 얻고 후에 유양(劉陽)땅 동산(東山)에 은거하였다. 그 뒤로 유양에 고불(古佛)이 계시다는 말이 있었으며 많은 납자들이 그에게 의지하였다.

 도오스님이 돌아가실 무렵에는 당신이 거느리던 대중을 떠나 경제스님에게 갔다. 경제스님은 도도스님을 정침(正寢)으로 모시고 걸을 때도 반드시 부축하고 앉을 때도 반드시 거들면서 극진히 받들었다.

 

 

7. 오랜 세월을 모시다[歷年執侍]

 

 당(唐)나라 초현 통(招賢通)스님은 젊어서 6관(六官:당나라 後宮의 官名)의 태사(太使)가 되었다. 후에 조과(鳥窠)스님에게 나아가 출가할 뜻을 말씀드리니 스님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도 분연히 출가할 뜻을 밝히니 마침내 머리를 깎아 주었다. 옆에서 시봉하면서 부지런히 애를 쓰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16년을 지나도록 법에 대해 말씀해 주신 적이 없었다. 그래서 떠나려 하니 조과스님이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가?"

 "제방(諸方) 에서 불법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러자 조과스님이,

 "불법(佛法)이라면 여기에도 조금은 있지."

하시고는 모포(毛布)를 집어드니, 이것을 보고 스님이 크게 깨쳤다. 그래서 그를 모포시자(毛布侍者)라고 불렀다.

 

  찬탄하노라

 

  사람들은 시자가 모포 아래서 깨치는 것만 보았지

  16년 동안 베를 짠 노력은 알지 못한다.

  여러 해 동안의 신고(辛苦)가 없었다면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는가?

  눈 밝은 스승을 만난 수행자들이여,

  조급한 마음을 가지지 말 것을 바라노라.

 

 

8. 삼가 유언을 지키다[謹守遺命]

 

 송(宋)나라 회지(懷志)스님은 금화(金華) 사람이며 어려서 강사가 되었다. 어떤 납자에게 자극을 받고는 강사직을 버리고 제방으로 다니며 참선하였다. 늦은 나이에 동산(洞山)에 이르러 진정극문(眞淨克文 :1025~1102)스님에게 법을 얻었다. 거기서 오래 머물러 있다가 하직하고 떠나려 하니 진정스님이 부촉하면서 말하였다.

 "그대의 참선은 비록 남보다 뛰어난 품격이 있으나, 인연이 뛰어나지 못함이 아까울 뿐이다."

 회지(懷志)스님은 절을 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원주(袁州)에 이르니 그 고을 사람들이 양기산(楊岐山)의 주지로 청하였으나 팔을 뿌리치면서 떠나버렸다. 상강(湘江)가에서 노니니, 담주의 목사(牧史)가 상봉사(上封寺)나 북선사(北禪寺)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형악(衡嶽)에서 20여 년이나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이런 게송을 지었다.

 

  모든 일 쉬고 바보처럼 살아가니

  때로는 들사슴과 종적이 함께 하네.

  삼베옷 벗지 않고 팔베게 하였으니

  몇몇 생이나 꿈속에서

  녹라암(綠蘿庵 :산중 토굴을 말함)에 있었던 가?

 

 늦게 용안(龍安)스님에게 몸을 맡겼는데 용안스님은 그를 최락당(最樂堂)에 거처하게 하니, 마침내 여기서 늙은 몸을 마쳤다.

 

  찬탄하노라

 

  명예는 누구나가 바라는 바이지만

  유언(遺言) 따라 모든 청을 거절하였으니

  어찌 쉬운 일이라 하겠는가?

  요즈음 사람들은 명리를 탐하느라 예의를 버리고,

  청하지 않는데도 가는 자가 많으니

  하물며 스승의 명을 기억하겠는가?

 

 

9. 가르침따라 끝까지 은둔하다[遵訓終隱]

 

 송(宋나라 청소(淸素)스님은 자명(慈明)스님에게서 법을 얻었으나 대중 가운데 묻혀 지냈다. 도솔 종열(도率從悅 :1044~1091 임제종 황룡파)스님이 그 때 대중 가운데 있었는데, 밤에 대화를 하다가 그가 자명스님의 시자였음을 알고서는 크게 놀랐다. 다음날 위의(威儀)를 갖추고 참례하며 도를 물으니, 말을 주고 받는 중에 심성이 개발되어 마침내 대오(大悟)하였다. 그 자리에서 청소스님은 종열스님에게 새삼 당부하였다.

 "나는 복이 없는지라 스승이신 자명스님께서 나에게 당부하시기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법하지 말라 하셨다. 그러나 그대의 정성을 가련히 여겨 선사(先師)의 훈계를 망각하였으니, 그대는 앞으로 절대 나의 법을 잇지 말라."

 그리고는 종신토록 세상에 그대로 숨어 살았는데 아는 사람들이 없었다.

 

 

10. 난리에도 떠나지 않다[兵難不離]

 

 원(元)나라 인간(印簡 : 1202~1257)스님은 산서(山西) 여원(寧遠)사람이다. 8살에 중관 소(中觀沼)스님에게 절을 올리고 스승으로 삼았다. 18살 때에 원나라 군사가 영원지방을 점령하였는데, 4부대중(四部大衆)이 난리를 피하여 도망하였으나 스님은 여전히 스승인 중관스님을 시중하였다.

 중관스님이 말하기를,

 "나는 죽을 때가 다 되었지만 너는 한창 나이인데 무엇 때문에 같이 화를 당하려 하느냐? 도망함이 마땅하다."

하니 인간스님이 울면서 말하였다.

 "인과(因果)는 어긋남이 없고 생사(生死)는 천명(天命)에 달렸읍니다. 어떻게 스승을 떠나서 구차하게 난리를 면하겠읍니까?"

 다음날 성이 함락당하자 원나라 장수인 사천택(史天澤)이 중관스님께 물었다.

 "당신은 무얼하는 사람이오?"

 "사문(沙門)이오."

 "고기를 먹습니까?"

 "무슨 고기를 말합니까?"

 "사람 고기를."

 "호랑이나 표범도 서로의 고기는 먹지 않거늘, 하물며 사람의 경우이겠읍니까?"

 사천택(史天澤)이 기뻐하면서 그를 놓아주었다.

 

 

총 평

 

 옛날 제자들은 스승이 돌아가시어도 믿음은 더욱 견고해졌다. 요즈음 제자들은 스승이 살아있는데도 지조를 지키지 않고 바꾸어 버린다. 무엇 때문인가?

 처음 출가할 때 참다운 스승에게 의지하여 생사를 결택하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니 대개 일시적으로 사제지간의 인연을 합하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그 마음이 다른 이익을 보면 스승을 바꾸고, 나쁜 친구의 유혹을 만나면 스승을 바꾸고, 그 스승의 올바른 훈계가 힘들면 스승을 바꾸어 버린다. 심하면 진상(陳相)같이 스승을 배반하고 영소(靈素)같이 부처님을 버리고 도교를 숭상하는 자도 있다. 이보다 더 심한 경우는 태양 평(太陽平)의 시자 같은 부류도 있다.

 아-아,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