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지중한 행[遲重之行]
제 8장 지중한 행[遲重之行]
지중한 행[遲重之行]
1. 법을 전수받고 오랫동안 은거하다[傳法久隱]
당(唐)나라 6조대사(六祖大師 慧能: 638~713)는 처음 5조대사(五祖大師 弘忍 : 602~675)를 뵙고는 바로 자기 마음을 깨달았다. 5조대사는 말하였다.
"그대의 근기(根機)는 지나치게 영리하다. 방앗간에서 지내라."
그리하여 절구질을 하게 되었는데, 허리에 돌을 차고 디딜방아를 수고롭게 밟으며 대중에게 공양하였다. 그 뒤 의발과 법을 전해 받고 밤에 가만히 그 곳을 떠나 사냥꾼들 속에 자취를 숨겼는데, 여기서 더벅머리에 때 묻은 얼굴로 16년을 지냈다. 그 후 용천(龍天)에게 추대되어, 인종법사(印宗法師)의 강석(講席)에서 우연히 바람과 깃발을 논하게 되었다. 이 일로 사부대중(四部大衆)이 놀라고 추앙하여 그를 받들어 법을 열어 남종선(南宗禪)을 크게 천양, 만대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찬탄하노라
설법만을 16년 후에 한 것이 아니라
머리 깎는 것도 그렇게 하였다.
깊이 수양하고 두텁게 쌓기로는
고금에 이 한 사람뿐이니
만대의 사표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2. 10년 동안 자취를 숨기고 자중하다[十年秘重]
당(唐)나라의 나한 계침(羅漢桂琛 :867~928) 스님은 상산(常山) 사람으로 처음에는 계율을 배우다가 뒤에 남종선(南宗禪)을 찾아가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참례하여 현사 사비(玄沙師備)스님에게 종지를 체득하고 가만히 수행하며 숨어 살았다.
장주목사(漳州牧使)인 왕공(王公)이 민성(閩城) 서쪽 석산(石山)의 절로 청함에 10여 년을 머물면서, 오묘한 도는 소중히 숨기고서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는 자가 있어야 열어서 연설해 주곤 하였다. 이윽고 나한원(羅漢院)으로 옮겨갔는데, 무너진 담장, 부서진 침상에서도 편안하였다.
근주(勤州) 태보(太保)가 굳이 설법을 청하자, 겸손하게 사양하였으나 부득이하게 그의 청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법문(法門)을 크게 열었더니 참선하는 무리들이 헤아릴 수 조차 없었다. 여기서 법안종(法眼宗)이라는 하나의 종파가 출현하게 되었다.
3. 신통을 내보이지 않다[不宣靈異]
당(唐)나라 선정(善靜 : 858~946)스님은 장안(長安) 금성(金城)사람이다. 남쪽으로 악보(樂普)에 유람하다가 안공(安公)의 법손을 뵙고 심요(心要)에 융통하였다. 그 뒤 고향으로 돌아왔더니, 유수(留守)인 왕공(王公)이 영안원(永安院)을 지어 거처하게 하였다.
언젠가는 세수하고 머리를 감다가 사리가 떨어졌는데 주워 숨기고 제자들에게도 남에게 알리지 말라 하였다. 또 삼매에 들어있을 즈음에는 흰 학이 길이라도 든 듯 뜰에서 친근히 노닐면서 마치 법을 듣는 것 같았다. 스님은 사람을 시켜 쫓아버리게 하고 이러한 특소한 조짐은 나타나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찬탄하노라
옛사람은 특이한 영험이 있어도
숨기고 드러내질 않았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영험이 없는데도
거짓으로 자칭하면서 대중을 현혹하고 있으니
마음과 행동이 천지차이라 하겠다.
성인은 더욱 성인이 되고
어리석은 사람은 더욱 어리석게 되는 것이
또 무엇이 괴이하랴.
4. 나무꾼과 목동 속에 자취를 뒤섞다[混迹樵牧]
당(唐)나라 보원(普願 :748~834) 스님은 정주(鄭州) 신정(新鄭) 사람이다. 대외산(大隈山) 대혜(大慧)스님을 의지하여 수업하였고, 강서(江西) 마조(馬祖大師)스님에게 법을 얻었다. 훌륭한 도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잘난 점을 숨기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처럼 처신하였다.
정원(貞元 ) 10년(794) 에 지양(池陽) 남전산(南泉山)에 지팡이를 걸어놓고 도롱이와 삿갓 차림으로 소를 먹였다. 나무꾼과 목동에 뒤섞여 산을 깎아 밭을 일구며 산에서 30년을 내려오지 않았다.
태화(太和) 연중(827~835)에 지양태수가 선사(宣使)인 육공(陸公), 호군(護軍)인 유공(劉公)과 함께 법석을 열어달라고 굳이 청하여 이로써 도화(道化)가 크게 펴졌으며 호를 남전고불(南泉古佛)이라 했다.
찬탄하노라
혜원(慧遠)스님 그림자는
여산에서 40년을 벗어나질 않았고
왕노사[南泉普遠]의 발걸음도
남전산을 30년이나 내려오질 않았으니
이는 모두 옛사람의 꿋꿋한 절개이다.
그러나 모두 뜻을 체득한 후의 일이지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출가한 사람이 생사대사를 밝히지 못했다면
천리를 멀다 말고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어리석음을 지키며
부질없이 앉아서 스스로 좋은 기회를 잃는가.
조주(趙州)스님은 80세에도 행각하였고
설봉(雪峯)스님은 투자산(投子山)에 세 번,
동산(洞山)에 아홉 번을 올랐다.
어리석게 은둔하는 사람을 위해서 감히 고한다.
5. 일마다 인연이 따르다[事皆緣起]
당(唐)의 신정 인(神鼎諲)스님은 예주(豫州) 사람으로 분양(汾陽)스님과 나란히 명성을 날렸다. 젊은 나이에 남악(南嶽)에서 20년 동안 은둔하였고, 또 20년을 주지로 지내고서야 개당설법(開堂說法)을 하였다. 그러나 주위에서 빚어지는 인연을 따른 것이지 실로 자기 뜻은 아니었다.
6. 여러 해를 문닫고 지내다[歷年閉戶]
송(宋) 나라 운개 수지(雲蓋守智)스님은 원우(元祐) 6년(1091)에 서당(西堂)으로 물러나더니 문을 닫은 채 30년을 지냈다.
7. 깊은 산에 오랫동안 거처하다[久處深山]
송(宋)나라 무문 총(無聞聰)스님은 크게 깨달은 뒤 홀로 광주(光州)의 산속으로 들어가 6년을 지내고, 육안주(陸安州) 심산에서 6년, 다시 광주에 와서 3년을 지냈다.
이처럼 산중에서 홀로 지내며 좌선하기를 모두 17년 하고서야 세상에 나왔다.
찬탄하노라
홀로 지내며 홀로 앉기를 깨달은 뒤에 했던 것은
과연 둔적(遁迹)한 남전스님의 뜻을 이은 것일세.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서
총림이 싫고 대중이 두려워, 선지식을 떠나 구석진 곳을 찾으니
이 또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8. 여덟 번 초청했으나 가지 않다[八請不赴]
송(宋)의 분양 무덕(汾陽無德)스님은 여덟 차례에 걸쳐 70여명의 스님들의 청을 받았으나 결코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양양(襄陽) 백마사(白馬寺)에서 한가히 지내며 분수(汾水) 주변에 사는 사부대중 천여명을 물리쳤으나 끊임없이 간곡하게 청하자 그들의 바램에 응하였다. 그리하여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으나 문지방을 넘지 않고 스스로 절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노래를 지어서 자기 뜻을 보였다고 한다.
찬탄하노라
큰스님들 깨친 뒤의 행적을 차례로 살펴보니
대개는 빛을 감추었다가 때가 이르면 드러내었다.
그러나 분양스님은 여덟 번 청하여도 가질 않았으니
도를 간직함이 더욱 깊다 하겠다.
그 후 종풍이 크게 떨쳤으니
근원 깊은 물이 멀리 흐른다 함이 아니겠는가?
요즈음은 어린 나이에 능력 하나 믿고
급급하게 출세에 뒤질세라 염려하고 있으니
과연 잘못이로다.
설익은 것은 따냈다 해도
끝내 향기가 멀리 퍼지지 않으니
납자들은 때때로 자신을 경책해야 하리라.
9. 법을 소중히 여기고 산에 은둔하다[重法隱山]
원(元)나라 법문(法聞) : 1260~1367)스님은 7세에 출가하였다. 그 뒤 온공(溫公)에게 「법화경(法華經)」, 「반야경(般若經)」, 「유식론(唯識論)」, 「인명론(因明論)」과 「사분율(四分律)」을 배웠다. 온공(溫公)이 스님에게 말하기를,
"책임은 무거운데 길이 멀다. 널리 전파하기를 부탁한다."
라고 하였다.
스님은 불상을 마주하고서 살과 손가락을 태우며, 피를 뽑아 경전을 베껴씀으로써 법을 소중히 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리고는 드디어 오대산에 은둔하여 문지방을 넘지 않고 6년 동안 장교(藏敎) 5천 권을 세 번이나 보았다.
황제의 스승은 찬탄하며 말하였다.
"이 땅에 이런 스님이 있었다니!"
그리고는 안서왕(安西王)의 명령으로 의선사(義善寺)에서 법회를 열었다. 천자가 소문을 듣고 대궐로 부르고 조서를 내려 대원교사(大原敎寺)에 거처하게 하고 은장일품(銀章一品)을 하사하였으며, 계(戒)를 받고자 하는 자들은 모두가 그에게 계를 받았다. 연우(延祐) 4년 (1317) 3월 24일에 앉아서 열반하였다.
10. 폐사에 은거하다[廢寺隱居]
원(元)나라 세우(世愚 : 1301~1370) 스님은 구주(衢州) 서안현(西安縣) 사람으로 포납(布衲)과 중봉(中峯) · 단애(斷崖) 등 모든 큰스님을 참례하였다. 그 후 지암(止巖)스님에게 법을 얻고 서안(西安) 오석산(烏石山)의 폐사로 들어가 띠집을 짓고 살면서 6년이나 그림자가 산문을 벗어나질 않았다. 명성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중신(重臣)을 파견하여 명향(名香) · 금란법의(金襴法衣)를 하사하고 홍변(弘辨)이라는 법호를 더하였다.
지정(至正) 연간(1341~1367)에 용면사(龍眠寺) · 고망사(古望寺) 등 다섯 사찰이 창건되었는데 모두가 간절한 정성으로 스님을 맞이하여 개산 제1조(開山第一祖)로 삼으려 하자 부득이 응해 주었다.
총 평
어떤 사람이 물었다.
"세존(世尊)께서는 정각(正覺)을 이루자마자 화엄경을 연설하시었으며, 어떤 사미는 7살에 경전을 강의하기도 하였으니, 반드시 여러 해를 은둔해야 한다면 중생 교화는 어찌해야겠는가?"
"그러나 그대는 옛사람의 그윽히 은거함이 유독 세속을 잊었을 뿐 아니라, 도가 높아질수록 뜻은 더욱 부지런해지며 마음이 밝아질수록 일을 더욱 조심했다는 것은 모른다고 하겠다. 그 분들은 물가나 숲에서 부처 될 씨앗을 기르면서, 과일이 익고 향기가 진동하여 천룡(天龍)이 따주기를 기다렸으니, 따놓는 대로 넉넉하였다. 그대는 여래의 1대(一代) 중생 교화만을 보았을 뿐, 3대 아승지겁의 수행은 모르는구나. 7살 먹은 사미의 설법이 다생(多生)토록 익힌 훈습임을 어떻게 알겠는가? 불법은 생선이 아니다. 어찌 썩어 문드러질까를 두려워하랴."
이 말씀은 비록 소소한 것 같아도 큰 도를 비유할 만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