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감응의 행[感應之行]
제 10장 감응의 행[感應之行]
감응의 행[感應之行]
1. 정성으로 계율을 감득하다[精誠感戒]
진(晋)나라 도진(道進)스님은 장액(張掖) 사람으로 담무참율사(曇無讖律師)에게 나아가 보살계(菩薩戒) 주시기를 청하였으나 율사는 허락하지 않고 7일간 참회하라 하였다. 참회를 끝내고 다시 갔으나 역시 크게 노하며 허락하질 않았다. 스님은 물러니서 정성을 다해 예불 참회하기를 3년이 지나도록 하였다. 그러던 하루 저녁 꿈에 석가모니불이 직접 계를 주셨다. 다음날 율사를 가서 뵙고 꿈 얘기를 하려 하자, 담무참율사는 멀리서 축하하며 말하였다.
"그대는 이미 계를 받았노라."
이로부터 도진스님에게 수계한 사부대중이 1천여 명이나 되었다.
2. 참회하여 묘음을 얻다[懺獲妙音]
진(晋)나라 법교(法橋)스님은 어려서부터 불경 전독(轉讀)하기를 좋아하였으나 음성이 잘 나오지 않았다. 이에 7일 기약으로 곡식을 끊고 참회하였는데 관음보살께 머리 숙여 현세에 당장 좋은 과보 주심을 구하였다. 도반들이 애써 그만 둘 것을 간 하였으나 듣질 않았다. 7일째가 되자 목구멍이 툭 트이는 것을 느끼고 물을 찾아 마셨더니 이로부터 경을 전독하는 소리가 아랫마을 까지 울리었다.
3. 사자좌(師子座)를 맹세하다[誓師子座]
유송(劉宋)의 축도생(竺道生)스님은 <열반경(涅槃經)> 을 강론하면서
"천제(闡提 : 부처될 종자가 없는 중생)도 모두 성불한다."
하자, 옛날에 배웠던 법사들이 삿된 소리라 하며 물리쳤다. 축도생은 맹세하였다.
"나의 설명이 경전의 의미에 맞지 않는다면 현재 이 몸으로 악한 과보 받기를 원하옵고, 실로 부처님 마음에 계합했다면 내 생명을 버릴 때 사자좌(師子座)에 의거해 주옵시길 원하옵니다."
그리고는 오군(吳郡)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돌을 세워서 제자로 삼고 「열반경」을 강론하는데, '천제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대목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설명이 부처님의 마음에 계합하느냐?"
하였더니, 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열반경」 끝품(品)을 강론하는데 과연 '천제도 불성이 있다' 라고 되어 있었다. 뒤에 여산(廬山)에서 「열반경」 강의를 끝내자마자 대중들은 주미(塵尾 : 불진)가 홀연히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 때 스님은 단정히 앉아서 열반하셨다.
찬탄하노라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말은 불완전하나 의미는 완전하다" 하셨으니
「열반경」에서 천제를 논하심이 바로 이 말씀이다.
그러니 맨 뒷 품까지를 어찌 기다리겠는가?
통달한 사람은 이치에 회합하고
얽매인 사람은 문자에 집착하나니
어찌 천제 한 문제 뿐이겠는가?
그런데도 도생스님은
정견(正見)에서 흔들리지 않아 금석처럼 견고하였고
죽어서도 맹세를 어기지 않아 고금에 밝게 빛났으니
아-아, 장하다.
4. 꿈 속에서 머리가 바뀌다[夢中易首]
유송(劉宋)의 구나발타라(求那拔陀羅) 스님은 중천축(中天竺) 사람으로 인연 따라 유람하며 교화하다가 중국 서울에 이르렀다. 초왕(譙王)이 「화엄경(華嚴經)」 등을 강론하게 하려 하였으나, 스님 자신이 중국말에 능통하지 못함을 헤아리고는 아침 저녁으로 예불 참회하며 관음보살의 가피(加被)를 구하였다.
홀연히 꿈에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칼을 지니고 사람의 머리를 들고 오더니 무엇이 근심이냐고 물었다. 사실을 갖추어 대답하자, 그 사람은 칼로 새 머리와 바꿔 주었다. 활연히 깜짝 놀라서 깨어났더니 중국 발음을 완전하게 깨우쳤다. 이리하여 강석을 열고 불법을 널리 폈다.
5. 계율 폐지했던 일을 참회하다[廢戒懺悔]
제(齊)나라 승운(僧雲)스님은 보명사(寶明寺)에 살았는데 강론으로 저명하였다. 4월 15일, 계율을 지송하는 자리에서 대중에게 고하였다.
"계율은 누구나 다 외워 알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자주 듣는가? 한 스님에게 이론을 세워 후진들을 깨우쳐 주도록 하여도 될 것이다."
이에 대중들은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드디어 계율 외우는 의식을 폐지해 버렸다. 7월 15일 에 대중이 모였는데 홀연히 승운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으로 찾아나서 옛 무덤 가운데서 찾아내었는데 몸에는 유혈이 낭자하였다.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떤 사나운 무사가 큰 칼을 잡고 무서운 소리로 꾸짖으며 말하기를, '승운아 너는 어떤 사람이길래 감히 포살(布薩)을 폐지하고 허망하게 이론 세우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느냐?' 하더니 즉시 칼로 나의 몸을 베었는데 고통을 참기가 어려웠다."
곧 부축을 받아 절로 되돌아온 스님은 정성을 다해 참회하였다. 그리하여 10년이 지나도록 지극 정성으로 의식에 의거하여 포살을 행하였다. 임종하는 날에는 특이한 향이 와서 맞이하더니 흔연히 서거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가 스님이 금생에 잘못을 징계받고 고쳤던 것을 가상하게 여겼다 한다.
찬탄하노라
요즈음 세상에는 경론만을 숭상할 뿐 계율은 경시하니
불법 생긴 이래로 보름마다 계율 지송하는 법을
거행하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하겠다.
산문에서 폐지된 법도를 일으키려 하나 사람들은 믿지 않으니
과보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승운스님의 징벌에서 볼 수 있지 않은가?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6. 문둥병이 치유되다[癘疾獲瘳]
제(齊)나라 승원(僧遠)스님은 양주(梁州) 설사(薛寺)에 살면서 갖가지 수행을 닦질 않고 시류를 따라 술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 그러던 어느날 홀연히 꿈에 신인(神人)이 이를 갈며 꾸짖었다.
"그대는 출가인으로서 이처럼 악을 짓다니... 거울로 얼굴을 한번 보아라."
새벽이 되어 스님이 물가로 가서 얼굴을 비춰보니 눈언저리에 까만 것이 보였다. 티끌이라 여기고 손을 들어 문질렀더니, 눈썹이 손에 다 묻어나왔다. 이로 인해 자신의 허물을 책망하면서 평상시의 습성을 철저하게 고쳤다. 헤진 옷 떨어진 신에 한 끼니만 먹으면서 오래도록 재계하였으며, 저녁부터 아침까지 밤새도록 참회를 행하면서 슬픈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한 달 남짓 지나자, 전의 그 신인이 미소를 머금고 말하였다.
"허물을 알고 고칠 수 있다니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만하구나. 지금 그대를 용서하노라."
스님은 크게 기뻐하며 깨어나보니 , 온 몸에 땀이 흐르고 얼굴과 눈이 끈적거리더니 눈썹이 다시 솟아나왔다.
승원스님은 몸소 두 가지 과보를 경험해 보고서야 3세(三世)가 헛것이 아님을 진실하게 알았으며, 이로부터는 정성을 다해 불법을 받들며 물러섬이 없더니 드디어는 훌륭한 스님이 되었다.
7. 부지런히 노력하여 이해가 발현하다[勤苦發解]
양(梁)나라 도초(道超 :467~502) 스님은 오군(吳郡) 사람으로 승민(僧旻)스님의 학해(學解)가 나라에서 으뜸임을 알고 그를 따라가리라 마음 먹었다. 자는 것도 그치고 음식 맛도 잊으면서 밤낮없이 공부하였더니,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렇게 말하였다.
"승민스님은 비바시불(毗婆尸佛) 때부터 강론을 하였고 그대는 이제야 익히기 시작했는데 어떻게 스님과 같아지겠는가? 다만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될 뿐, 제 힘껏 노력한 만큼 깨달음을 얻지 못할까를 근심하지는 말라."
스님은 부지런히 힘써 지극히 힘든 경지에 이르자 드디어 환하게 깨달았다.
8. 예불 참회하여 수명을 연장하다[禮懺延壽]
양(梁)나라 총법사(寵法師) 는 나이 28세에 도인(道人)인 법원(法願)스님을 보았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딱 40이 되면 죽을 것이니 피할 곳이 없으리라. 딱 한 가지 모든 부처님께 지성으로 기도하고 지난날의 허물을 참회한다면 혹 모르겠네만."
스님은 거울을 가져다가 비춰 보았더니 얼굴에 검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에 의발(衣鉢)과 향과 공양물을 가지고 동쪽 해염(海鹽) 광흥사(光興寺)에 가서 문을 닫고 예불 참회하였다. 사람을 만나는 일을 끊고, 낮에는 밥먹고 쉬는 것을 잊었으며 밤에는 옷을 벗지 않았다.
나이 40이 되던 섣달 그믐날 저녁, 양쪽 귀에서 종기가 난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날밤 새벽에 이르기까지 참회를 계속하자, 문 밖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대가 죽어야 할 업은 이미 다하였다."
급히 문을 열어보았으나 고요할 뿐 보이는 것이라곤 없었다. 날이 밝자 얼굴의 검은 기운은 이미 없어졌고 뒤 귀에서는 새살이 나왔다. 스님은 평상시 예불할 때는 100번을 정해놓고 절하였으며, 그 후 병이 있어 일어나질 못했을 때에도 침상에서 예불 시간에 맞춰 100번이 지나도록 정성껏 몸을 숙였다 쳐들었다 하며 예배하였다. 스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는 74세였다.
9. 경전을 지송하여 수명을 연장하다[誦經延壽]
양(梁)나라 지장(智藏 : 458~522) 스님은 오군(吳郡) 사람으로 종산(鐘山) 개선사(開善寺)에 있을 때 상(相)을 보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법사께서 총명이 세상을 뒤덮고 있지만 애석하게 수명이 길지 못하여 31세에 그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때 스님의 나이는 29세였다. 이 때부터 강론을 그만두고 경장(經藏)을 살피던 중 금강경(金剛經)을 보고 정성을 다해 독송하면서 예불 참회하기를 주야로 그치지 않았다. 수명의 기한이 다하는 날에 이르자 공중에서 홀연히 말소리가 들렸다.
"그대의 수명은 본래 다했으나 반야(般若)의 공덕력(功德力) 때문에 배(倍)의 수명을 얻게 되었다."
그 후 전에 상을 보아주었던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깜짝 놀라면서 그 이유를 헤아리지 못했다. 스님이 그 일을 말해주자, 독경하는 힘[經力]의 불가사의 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찬탄하노라
길고 짧은 수명은 타고난 분수인데
예불 참회하고 경전을 지송함으로써 수명이 연장되었으니
숙인설(宿因說)을 폐지해야 하리라.
아-아. 잃어버린 띠[帶]를 주워서 되돌려주고
요절한 상호가 없어졌으며
개미를 물 건네주고도
귀한 상호(相好)가 나타났다 하니
사람의 능력으로도 천명을 돌릴 수 있는데
더구나 불가사의한 3보(三寶)의 힘이겠는가?
유독 한스러운 것은
정성이 위의 두 스님만 못한 것일 뿐이다.
풀무질하는 소리도 경전이 되고
서로가 방아를 찧으면서도 예(禮)를 이룬다 하였는데
감응의 실마리가 안 보인다고 어찌 괴이하게 여기겠는가?
10. 종을 두드려 지옥의 괴로움을 뽑다[打鐘拔苦]
수(隨)나라 지흥(智興 : 588~632) 스님은 대장엄사(大藏嚴寺)에 거처하면서 종치는 일을 맡아 보았다.
대업(大業) 5년에 있던 일이다. 함께 있던 삼과(三果)스님의 형이 어가(御駕)를 따르다 도망쳐 버렸는데 그 아내 꿈에 도망했던 남편이 말하였다.
"나는 팽성(彭城)에 이르러 병이 나서 죽었다. 지옥에 떨어졌으나 장엄사에서 울리는 종소리의 메아리가 지옥을 진동하는 덕분에 해탈할 수 있었다. 그 은혜를 갚고자 하니 비단 10필을 바치도록 해라."
그의 아내가 비단을 바치자, 지흥스님은 대중들에게 나누어주어 버렸다. 대중들이 종을 치는 데 어떻게 감응이 이르렀는가를 묻자, 지흥스님은 말하기를,
"내가 처음 종을 치면서 축원하기를 '모든 성현께서는 도량으로 함께 들어오시길 원하옵니다' 하면서 세 번을 치고, 이어서 길게 치면서 또 축원하기를 '모든 악취(惡趣)세계는 나의 종소리를 듣고 다 함께 고뇌를 떠나게 해주십시오' 한다네."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엄동설한에 꽁꽁 얼어붙어 피부가 트고 주름살이 져 손바닥에 피가 엉긴다 해도 종치는 일 을 그만두지 않았다.
11. 천신이 몸을 보호하다[天神護體]
당(唐)나라 도선(道宣 :596~607) 스님은 성이 전씨(錢氏)였다. 처음 스승에게 계율에 관한 강의를 한 번 듣고 즉시 사방으로 유람하려 하였다. 스승이 꾸짖어 이르기를,
"먼 길은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수행하고 버리는 데도 때가 있는 법이다."
라고 말리고는 강의를 10번 듣게 하였다.
그 후 계율을 엄격하게 지켜 세상에서 희유한 존재가 되었다. 한 밤중에 산길을 오르다가 돌계단에 걸려 넘어졌는데 갑옷 입은 천신이 그를 부축하므로 어떤 신이냐고 묻자,
"저는 박차천황(博叉天王)의 아들 장경(張瓊)입니다. 스님의 계덕이 고묘(高妙)하기 때문에 호위하라 보내셨읍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 드디어 스님이 부처님 세상에 대해 자세히 묻자, 낱낱이 조목을 들어서 대답해 주고는 불아보장(佛牙寶掌)을 주어서 이로써 신(信)을 표시하였다.
스님의 호를 남산교주 징조율사(南山敎主澄照律師)라고 하였다.
찬탄하노라.
계율은 현묘한 도리도 아니며
도선스님은 근기가 둔하지도 아니한데
무엇 때문에 오래 머물러 10변이나 듣도록 하였을까?
계율로 말미암아 도의 근본이 이루어지니
골수까지 스며들어 그 견고함이 변치 않게 하고자 함이다.
요즈음 계율을 수지한 자들은
한 번 받은 뒤에 높은 집에 묶어두고
대략이나마 그 의미를 연구하지도 않으니
더구나 스승의 10번 강의를
제자가 또한 10번을 듣겠는가.
도선스님의 스승도 범상한 인물이 아니며
율사 같은 대현인이 그 문하에서 나왔던 것도
유래가 있었다는 사실을
내 이로써 알 수 있도다.
12. 감응으로 정토를 보여주다[感示淨土]
당(唐)나라 혜일(慧日 : 680~748) 스님은 바다를 건너 천축에 도달하여 선지식을 참방(參訪)하고 첩경이 되는 법요(法要)를 묻자, 천축의 학자들은 모두가 정토를 찬양하였다.
건타라국(健馱羅國)에 이르자 동북에 큰 산이 있고 거기에는 관음상이 있었다. 스님은 그 날부터 7일간을 죽기를 기약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단식을 하였다. 7일째 되던 밤에 홀연히 관음보살이 자금신(紫金身) 을 나타내어 보련화(寶蓮華)에 앉더니 손을 늘어뜨려 스님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셨다.
"그대가 불법을 전하여 자리이타(自利利他)를 하려거든, 서방 극락세계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염할 것이니, 정토 법문은 다른 방편보다 수승함을 알아야 한다."
말씀이 끝나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스님은 장안으로 되돌아와 염불을 널리 권하였다.
찬탄하노라
건타라국에서 관음보살이 감응하셨던 일은
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 문수보살이 감응했던 일과
대략 비슷한 일이니
모두가 정성이 지극하여 감응한 예로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일은 한 사람뿐이 아니니
자세한 것은 왕생집(往生集) 가운데 갖추어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는다.
13. 감로수를 입에 부어 주다[甘露灌口]
오대(五代) 때 영명 연수(永明延壽)스님은 과거 속세에서 고리(庫吏)직을 맡았을 때 공금을 사용하여 방생(放生)을 하였으므로 죄가 죽음에 해당하였으나, 오월왕(吳越王)이 그를 석방해주자 출가해서 스님이 되었다. 일찌기 법화(法華) 참회를 21일 간 행하면서 간절히 정성을 다하였는데 꿈에 관음보살이 감로수를 입에 부어주더니, 드디어 '걸림없는 변재[無碍辯才]'를 얻게 되었다.
14. 참회로 수기를 받다[懺感授記]
당(唐)나라 담영(曇榮 : 555~639 )스님은 봄 · 여름에는 교학을 강론하고, 가을 · 겨울에는 좌선을 하였다. 이때 자사(刺史)가 사리(舍利) 3과(粒)를 보내 왔는데 스님은 모든 사리를 모으겠다고 서원하였다. 드디어는 사리 400과를 얻고 방등참법(方等懺法)을 행하였다. 그 절에 승정(僧定)이라는 스님이 보니 사리의 광명 가운데서 7불(七佛)이 모두 나타났다. 그 가운데 한 부처님이 담영스님을 돌아보며,
"나는 석가이다. 그대의 신기(身器)가 청정하기 때문에 와서 수기(授記)하는 것이다. 그대는 이후 부처가 되리니, 호는 보녕불(普寧佛)이라 하리라."
고 말씀하는 것을 들었다.
그해 겨울에 담영스님이 죽었는데 특이한 향기가 방안에 맴 돌았다.
15. 입에서 청련화가 나오다[口出靑蓮]
당(唐)나라 수단(遂端)스님은 응윤사(應潤寺)에 머물면서 오로지 「법화경(法華經)」을 정성으로 받들었다. 하루종일 지송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며 늙어 갈수록 더욱 독실히 하였다. 함통(咸通) 2년(861)에 홀연히 가부좌를 맺고 천화(遷化)하더니, 잠깐 사이에 입에서 청색의 연꽃 일곱 줄기가 나왔다.
동쪽 산 아래 장례를 지냈는데, 20여 년 사이에 못에서는 여러번 광명이 발현하였다. 묘를 열고 살펴보았더니 육신이 살아있는 듯하였으므로 대중들이 맞이하여 절로 되돌아와 옻칠한 모시베로 장식하였다. 지금도 진신원(眞身院)이라 부른다.
총 평
내가 옛사람의 수행을 기록하면서 감응으로 책을 끝맺자 곁에서 비웃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도는 닦을 것도, 깨칠 것도 없다. 닦을 것이 없다면 중생도 공(空)하며, 깨칠 것이 없다면 부처도 고요[寂]하리라. 감응을 그리워 애틋해 한다면 이 역시 공리(功利)를 따지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북채가 북에 닿으면 소리가 나고, 물에 달이 비치면 달그림자가 나타나는 법이니, 여기에 따지는 마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충신이 충절을 맹세하고 죽자 마른 대나무에서 싹이 터 나왔고, 효자가 슬피 울자 견고한 얼음이 플려 잉어를 잡을 수있었다는 고사도 그럴법한 이야기이니, 무엇이 특이하다 하겠는가? 가령 감응의 연유가 없다 한다면 인과(因果)도 모조리 없어야 하리라. "인과가 텅 비었다 함이여, 재앙을 부르리라' 한 영가(永嘉)스님의 말씀을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