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참선경어參禪警語

제2장 옛 큰스님의 가르침에 대해 평하는 글(21.~30)

쪽빛마루 2014. 12. 14. 06:46

21. 오온신 속에 소소영영한 주인공이 있다는 망상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 '또렷하고도 신령스런[昭昭靈靈] 마음바탕[靈智]이 있어서, 보고 듣고 하면서 오온의 육신[五蘊身] 속에서 주인공이 된다'라고.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선지식이 된 이는 크게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그 까닭을 알겠는가? 내 그대들에게 물어보겠다. 만일 또렷하고도 신령스런 마음바탕이 그대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찌하여 잠이 든 상태에서는 그 소소영영한 상태가 안되는가?

잠이 든 상태에서 소소영영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어째서 깨어 있을 때에서야 다시 알아보는가? 이런 것을 '도적을 아들인 줄 안다'고 한다. 이는 생사의 근원이니 망상이 인연이 되어 생긴 상태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이는 정신을 농락하는 인간들이다. 깜박 잠이 든 상태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다면 죽는 마당에 가서 어떻게 자재안락한 경지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사람은 일생동안 소란만 피우다 갈 뿐이니, 어찌 다른 사람만 웃겨줄 뿐이겠는가? 스스로도 웃을 일일 것이다.

 

 

22. 오온신에서 주인공을 찾고자 한다면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대들이 오온(五蘊)으로 된 이 몸에서 주인공을 찾고자 한다면 자신의 비밀금강체(秘密金剛體 :自證의 大圓鏡智를 갖춘 몸)를 알아내기만 하면 된다. 옛 스님도 말씀하시기를 '원만하게 성취된 정변지(正遍智)가 모래알 같이 수많은 세상에 두루 깔려 있다'고 하셨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비밀금강체가 바로 원만하게 성취된 정변지이니, 이것이 모래 알 같이 수많은 세계에 두루 깔려 있다. 그대들에게 분명히 말하건대, 모름지기 온몸으로 부딪쳐 들어가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23. 고정된 방법은 불도가 아니다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불도(佛道)는 탁 트여 있어서 정해진 길이 없으니, 어떠한 방법도 쓰지 않음이 해탈에 이르는 방편이며 어떠한 마음도 내지 않음이 도인의 마음이다. 또한 불법은 과거 · 현재 · 미래라는 시간 속에 있지 않으므로 흥망성쇠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라도 세웠다 하면 진(眞)에 어긋나니, 인위조작에 속하는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만약 이 뜻을 깨달을 수 있다면 실오라기만한 노력도 들이지 않고 선 자리에서 곧 부처가 된다. 아니, 부처가 된다는 이 말에서 '된다'는 것조차 오리려 군더더기이다.

 

 

24.동(動)과 정(靜)에 치우치지 말라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움직이면 생사의 본원이 일어나게 되고, 조용하면 혼침(昏沈)한 경계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다고 동(動)과 정(靜)을 모두 부정해 쓸어 없애면 단견[空無]에 떨어지며 두 가지를 다 받아들이면 얼굴만 훤칠한 알맹이 없는 불성(佛性)이 되리라."

 

 나는 이렇게 평한다.

 납자들이 흔히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나, 조용함이 오래되면 다시 움직일 것을 생각하게 된다. 모름지기 눈썹을 치켜세우고 동정(動靜)의 소굴을 깨버려야만 비로소 도인의 공부가 되는 것이다.

 

 

25. 무심과 중도의 수행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바깥의 티끌 경계를 마주해서는 죽은 나무, 꺼진 재처럼 되었다가 마음을 써야 할 때 가서는 중도(中道)를 잃지 말아야 한다. 거울이 모든 물체를 비추지만 자기 빛을 잃지 않고, 새가 공중을 날면서도 하늘 바탕을 더럽히지 않는 것처럼."

 

 나는 이렇게 평한다.

 '죽은 나무, 꺼진 재처럼 하라'는 것은 무심(無心)하라는 말이고, '중도를 잃지 말라'함은 사물에 응하는 태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아무 감각없이 꺼진 재처럼 되어버린 사람과 같은 수준으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자기 빛을 잃지 않는다' 거나 '하늘 바탕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깥 경계는 경계일 뿐이니 그것이 나를 어쩌겠는가,' 하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26. 팔만의 문에 생사 끊겼다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시방(十方) 어디에도 그림자가 없고 삼계(三界)에도 자취가 끊어졌으며, 오고가는 인연 속에 떨어지지도 않고 중간에도 머물 뜻이 없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가운데 실오라기만큼이라도 도에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곧 마왕의 권속이 될 것이다. 이 귀절의 속뜻은 납자들이 알기 어려운 경지이니, 이것이 곧 '이 한 귀절이 하늘에 닿으니 팔 만의 문(門)에 생사 뚝 끊겼다.'하는 소식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대목은 '이 한 귀절이 하늘에 닿으니....'하는 부분이다. 시방세계 어디에고 실오라기만한 빈틈과 이지러진 곳이 없고, 터럭만한 그림자와 자취도 없으니 과연 찬란한 빛으로 살아 움직이는 경지라 하겠다. 그러니 불조(佛祖)니 중생이니 할 것 없는 자리에 생사란 또 웬말인가?

 

 

27. 분명한 경계라 해도 그것은 생사심이다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가령 가을 물에 비친 달그림자처럼, 고요한 밤에 들리는 종소리처럼 치는 대로 틀림없이 들리고 물결따라 흔들리기는 해도 흩어지지 않는 경지에 들었다 하자.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이곳 생사 언덕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참선하는 사람들이 만일 이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아니 도달했다손치더라도 이는 아직 생사 쪽의 일이니 모름지기 스스로 살길을 찾아내야 비로소 되었다 하리라.

 

 

28. 꼿꼿한 마음가짐으로 수행하라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불로 얼음을 녹임에 다시는 얼음이 되지 않고, 화살이 한 번 시위를 떠났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형편처럼, 수행자라면 이렇게 처신해야 한다. 이것이 편안한 곳에 가두어 두어도 머물려 하지 않고, 누가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이유이다. 성인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았으므로 지금까지 일정한 처소가 없느니라"

 

 나는 이렇게 평한다.

 수행자의 마음가짐은 마땅히 이래야 한다. 이 말씀을 자세히 연구하여 몸에 익히기만 하면 뒷날 저절로 깨닫게 되고 물들거나 끄달릴 일은 조금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알음알이[識心]을 일으켜 그곳에 쏠리면 이른바 '발심(因地)부터 진실되지 못하여 잘못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경우가 되고 만다.

 

 

29. 함부로 세상일에 간여하지 말라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요즘 사람들은 이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서 함부로 세상일에 뛰어든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물들고 하는 일마다 얽매이게 된다. 그런 사람은 도를 깨달았다 해도 바깥 경계를 만나면 금새분주해지니,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유명무실할 뿐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가는 곳마다 물들고, 하는 일마다 매이는 이유는 참구하는 마음이 절실하지 못하여 미세한 번뇌[命根]를 끊지 못하고 죽지 않으려고 바둥대기 때문이다. 진정한 납자는 마치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을 지나가듯 물 한 방울도 묻지 않을 만큼 조심해야 비로소 철저하게 깨닫게 된다.

 

 

30. 억지로 망념을 다스려 공무(空無)에 떨어지는 병통

 

 현사스님이 말씀하셨다.

 "이런 식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心念]을 단단히 검속하여 모든 현상[事]을 싸잡아 공(空)으로 귀결시키고, 눈을 딱 감고서 겨우 망념이 일어날라치면 갖은 방법으로 부숴 없애고, 미세한 생각이 일자마자 곧 억눌러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단견(斷見)에 빠진 외도[空無外道]로서 혼(魂)만 흩어지지 않았을 뿐 영락없는 죽은 사람이라, 깜깜하고 아득하여 아무런 느낌이나 인식이 없다. 이는 마치 자기 귀를 틀어막고 남도 못 듣겠거니 하면서 방울 달린 말[馬]을 훔친다는 이야기와 같으니 부질없이 자기를 속일 뿐이다."

 

 나는 이렇게 평한다.

 이러한 사람의 병통은 의심을 일으키지 않고 공안을 참구하지도 않으며, 온몸으로 깨달아 보겠다는 의지없이 그저 알음알이로 망념만을 다스리려 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설사 이런 사람은 맑고 고요한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사실은 미세한 번뇌[命根]까지는 끊지 못하였으니 결국 참선하는 납자라고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