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제(解題)
해 제(解題)
「임간록(林間錄)」은 북송(北宋)의 혜홍 각범(慧洪覺範 : 1071~1128)스님이 찬술(撰述)한 책으로 불법 종지와 총림의 수행에 관한 300여 편을 상 · 하 2권에 싣고 있다.
권말의 신편 후록(新編後錄) 1권은 부록 또는 속집(續集)이라고도 하는데, 자신이 지은 찬(讚) 26수 및 시(詩) 6수를 싣고 있다. 논소(論疏)에는 「임간록 고증(林間錄考證)」 7권, 「임간록 고략(林間錄考畧)」 1권이 있다.
혜홍(또는 德洪이라고도 함) 스님은 운암(雲庵) 진정 극문(眞淨克文 : 1025~1102)스님의 법제자로 남악(南嶽)의 13세(世)이다. 강서(江西) 서주부(瑞州府) 신품현(新品縣)의 유씨(喩氏)에게서 태어나서(1071) 14세에 부모를 잃고 삼봉 정(三峯靘)스님을 따라 출가하였으며, 19세에 동경(東京) 천왕사(天王寺)에 가서 선비율사(宣祕律師)에게서 「구사(俱舍)」「유식(唯識)」 등을 배웠다. 후에 임제종 황룡파(黃龍派)의 진정 극문스님을 따라 수행하면서 심법(心法)을 얻었다.
숭녕(崇寧) 연간(1102~1106)에는 무주(撫州) 경덕사(景德寺)에서 살다가 후에는 금릉(金陵) 청량사(淸涼寺)에 살았다. 강서(江西) 남품부(南品府) 홍주(洪州)의 석문사(石門寺)에 있을 때 학덕과 재필(才筆)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서 석문사 문필 혜홍 각범스님이라 불리웠다.
휘종(徽宗)에게서 보각 원명(寶覺圓明)이라는 법호를 받았고, 흠종(欽宗)에게서도 종용되었으며, 스스로는 적음존자(寂音尊者)라 자칭하기도 하였다. 승(僧) 법화(法和) 등의 무고로 수차 투옥되고 또 환속을 당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재상(宰相) 장상영(張商英), 태위(太尉) 곽천민(郭天民) 등의 도움을 받았다. 유배지에서 돌아와서는 상서(湘西)의 남대(南臺)에 명백암(明白庵)을 짓고 저술에만 전념하며 살았다.
남송(南宋) 고종(高宗) 건염(建炎) 2년(1128) 5월에 입적하였으니 세수(世壽) 58세, 승랍 39세였다. 저술로는 「임간록」 이외에 「선림보승전(禪林寶僧傳)」 30권, 「고승전(高僧傳)」 12권, 「냉재야화(冷齋夜話)」 10권, 「석문문자선(石門文字禪)」 30권, 「지증전(智證傳)」 10권, 「지림(志林)」 10권, 「천주금련(天厨禁臠)」 1권, 「어록게송(語錄偈頌)」 1편, 「법화합론(法華合論)」 7권, 「능엄존정의(楞嚴尊頂義)」 10권, 「원각개증의(圓覺皆證義)」 2권, 「금강법원론(金剛法源論)」 1권, 「역주(易註)」 3권, 「기신론해의(起信論解義)」 2권, 「감로집(甘露集)」 20권 등이 전해지고 있다.
「임간록」은 스님이 37세 되던 철종(哲宗) 대관(大觀) 원년(1107) 사일(謝逸 : 字 無逸, 號 溪堂)의 서문(序文)을 얻어 간행한 것으로, 그 훌륭한 문장은 선적(禪籍) 중의 백미(白眉)라 하여 옛부터 총림에서 많이 애송되었다.
또한 본문 속의 ‘오가종파(五家宗派)’나 ‘덕산사가어록(德山四家語錄)’등의 기록은 어록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스님은 300여 편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책이 출판되기 전까지도 끊임없이 수집하였다. 우리나라에 대하여는 신라의 원효(元曉)스님과 출판되기 80여 년 전(1027)에 송(宋)나라에 갔던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임간록」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현재 해인사(海印寺)에 소장된 「임간록」을 보면 한 책 속에 여러 가지 판형(板型)이 있고, 또 글자들이 닳아서 알아볼 수 없는 부분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널리 읽혀졌으리라고 추측된다.
현존하는 판의 후집(後集)은 간기(刊記)에 의하면 성화(成化) 4년(1468)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을 소개한다.
靈雲一見不再見
紅白枝枝不着華
叵耐釣魚船上客
卻求平地摝魚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