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임간록林間錄

38. 석상 문하의 법문/ 설두 상통(雪竇常通)스님

쪽빛마루 2015. 1. 12. 09:04

38. 석상 문하의 법문/ 설두 상통(雪竇常通)스님

 

 설두 상통(雪竇常通 : 834~905)스님은 장사 잠대충(岑大蟲 : 南泉普願의 법을 이음)스님의 법제자이다. 스님은 항상 도반 선승들에게 말하였다.

 “어느때고 항상 존재하는 ‘식(識)’이 모두 없어지기만 하면 공부가 다 된 것이니 잠깐이라도 일어났다 하면 틀리는데 하물며 언구(言句)이겠는가.”

 그러므로 석상 초원(石霜楚圓 : 807~888)문하 여러 스님들의 종풍(宗風)에는 ‘안으로 잇느니 밖으로 있느니[內紹外紹]’, ‘신종 왕종(臣種王種)’, ‘차구 협대(借句挾帶)’등을 많이 논하였다. 설령 관조(觀照)를 잊은 적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외소’이며, 그것을 ‘신종’, ‘차(借)’, ‘탄생(誕生)’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실오라기만큼도 막힘이 없는, 마치 왕자가 태어나자마자 왕통을 잇듯 하는 ‘내소’, ‘왕종’, ‘차(借)아닌 구’와는 다르다.

 ‘차(借)’라는 말은 주변사일 뿐이라는 뜻으로서 부득이하게 기연에 응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면 곧 ‘ 협대(挾帶)’를 이루게 된다.

 분양 무덕(汾陽無德)스님은 게를 지었다.

 

서민과 왕후를 보지만

빈부 현우의 등급[漸次]은 나눠지는 법

수행하는 뜻을 알려 한다면

모름지기 안목을 갖춰야 하리.

 

士庶公候一道看  貧富賢愚名漸次

將知修行  亦須具眼

 

 나는 이글을 보다가 이 귀절을 읽을 때면 항상 안타까와하면서 웃곤 하였다. 내가 안타까와한 것은 그곳의 수좌로서 옛 스승의 뜻을 모르고 죽었다는 점이며, 또한 나산 도한(羅山道閑)스님이 깨닫지도 못하고서 암두 전할(巖頭前豁)스님의 뜻을 알았다고 하는 사실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조백(棗柏)스님의 말씀을 살펴보니, “지관(止觀)의 힘으로 공부가 깊어지면 깨달을 수 있다. 공부란 서둘러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렇다고 늦춘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항상됨을 알아 쉬지 않으면 반드시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우유 가운데 소락(酥酪)이 있으나 그 연(緣)을 기다려야 하는 것과 같다. 저 인연 속에는 본래 그 연을 만든 자는 없다. 그러므로 소락이 완성되어도 어디에서 왔다 할 곳이 없고 그렇다고 본래 소락으로 있었던 것도 아니다. 여래 지혜바다의 방편도 그러하다”하였다.

 위의 말씀들을 통하여 옛 노스님들은 모두 부처님이 말씀하신대로 수행했음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