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임간록林間錄

55. 깨달음을 얻었다는 집착을 깨어줌/ 무진거사(無盡居士)

쪽빛마루 2015. 1. 12. 09:11

55. 깨달음을 얻었다는 집착을 깨어줌/ 무진거사(無盡居士)

 

 내, 상산(湘山) 도림사(道林寺)에 있을 무렵 어느 스님이 나에게 말하였다.

 “내 처음 육조스님의 바람과 깃발에 대한 인연을 듣고서 화두에 오랫동안 잠겼다가 우연히 머리를 들어 횃대에 걸려 있는 옷을 가지러 가다가 비로소 그 화두의 뜻을 깨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장난삼아, “그렇다면 눈을 들어 깃발이 나부끼는 상황을 본 게 아닌가?”라고 하였더니, 그는 나의 말을 수긍하였다.

 이에, “조사께서는 밤에 두 스님이 서로 따지는 말을 듣고 곧 그들에게 ‘바람과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때 설령 그 스님들이 눈을 부릅뜨고 어둠 속을 꿰뚫어보았다 하더라도 바람이 부는지 깃발이 나부끼는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니, 그는 몹시 성을 내며 떠나가 버렸다.

 무진(無盡)거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얼마 전 서울에서 혜림사(慧林寺)의 한 스님을 만나 참선하는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 스님이 여러 선림(禪林)을 인정하려들지 않기에, 내 그 스님에게 물었지! ‘ 현자(峴子)스님*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祖師西來意]에 대하여 신주 앞에 놓인 술잔[神前酒臺盤]이라 대답하였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요?’ 그 스님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똑바로 나를 바라보며 ‘신주 앞의 술잔...?’하고 중얼거리기에 나는 다시 그 스님을 놀려 주었지. ‘오늘 저녁 사당에 등불이 밝혀 있으면 그만이려니와 그렇지 않다면 현자스님의 불법은 헛되게 될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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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자(峴子) : 동산 양개(洞山良价)스님에게 심인(心印)을 받은 뒤 기행을 하며 속세에 어울려 살았다. 날마다 강변에서 조개와 굴을 따다 배를 채웠으므로 사람들이 현자(조개)스님이라 불렀다. 밤이 되면 동산에 있는 사당에 가서 지전(祉錢 : 죽은 자를 위해 관속에 넣는 가짜 종이돈) 속에 묻혀 지냈다. 하루는 화엄사 휴정스님이 시험해 보려고 지전 속에 숨었다가 현자 스님이 들어오자 꼭 붙들고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물으니 ‘신주 앞에 놓인 술잔’이라 대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