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 서(序)
오가정종찬(五家正宗贊) 서(序)
성인의 문 안을 구경함은 말로 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 글은 규중의 아녀자가 하늘거리는 다홍치마를 입고 조마조마하면서 땅을 디디는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 어찌 참선하는 이의 법이 될 수 있겠는가.
납승의 집안은 숱한 성인의 이마 위에 앉아 눈 깜짝할 사이에 현묘한 추기(樞機)를 돌려 쇠로 된 얼굴을 뒤집는 것이다. 이 늙은이야 그런 경지를 모르지만 기연 하나를 드러내면 마치 큰 불더미 같고, 한마디 말을 꺼내면 마치 무쇠말뚝 같아서 우리들은 가까이 갈 수도 없는 곳이며 씹어 맛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고금 사람들에게 침을 놓고 뜸을 떠서 꼼짝없이 죽을 사람도 살려놓으니, 이 밖에 다시 누구를 성인이라 할 것이며 어느 문하에서 배울 것이며, 무슨 말을 꺼릴게 있겠는가. 하루종일 말을 해도 마디마디가 모두 도이며, 천하에 말이 꽉 차도록 해도 입에 허물이 없다. 상을 주거나 벌을 주거나 내리 깎거나 치켜올림에 모두 깊은 뜻이 있어서 상을 주더라도 지조를 권장함이 아니고 벌을 주더라도 궁지로 몰아넣음이 아니며, 내리깎거나 치켜올림도 권선징악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얼굴의 문신을 잘라내어 코없는 죄인에게 붙여주고 학의 긴 다리를 오리의 짧은 다리에 이어주며 무엇을 어찌하든 하나 하나 몸을 빼내는 길이 있는 것이다. 이런데도 새장과 우리에 갇혀 타고난 운명이라 달갑게 여기는 얄팍한 장부가 되려 하는가.
나는 천성이 둔한 사람이라 메마른 지팡이에 달을 걸고 헤진 삿갓에 흰 구름을 담아 강호를 떠돌아다닌 지 거의 50년이다. 내 비록 도의 관문을 꿰뚫는 안목이 그리 밝지는 못하고 지극한 이치를 전하는 말이 그리 분명하지는 못하지만 옛사람이 흡족하다 할 만한 경지가 아닌 곳은 조금이나마 엿보아 온 터이다. 이제 오색 붓을 들어 허공에 수를 놓아볼까 하는데, 이는 아마 나의 힘을 헤아려 보지 못한 일일 것이다.
앞서 말한 상주고 벌주고 내리깎고 치켜올리는 일은 앞으로 금도끼로 안막(眼膜)을 긁어내고 말을 꺼내면 숱한 이를 놀라게 할 사람을 기다려 다시 밝혀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 눈썹이 빠지는 것이야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보우(寶祐) 갑인(1254) 서촉(西蜀)의 비구 소담(紹曇)은
백번 절을 올리고 영취방산실(靈鷲放山室)에서 이를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