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만암 도안(卍庵道顔)선사 / 1094~1164
24. 만암 도안(卍庵道顔)선사
/ 1094~1164
스님의 법명은 도안(道顔)이며, 대혜스님의 법제자로 동천 포씨(東川鮑氏) 자손이다. 오랫동안 원오스님 회하에서 참구하였는데, 금산사(金山寺)에 있을 무렵이었다. 한바탕 난리가 나서 승려들은 모두 자결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기지로 모면하였고 오랑캐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었다.
원오스님이 입적한 뒤 다시 대혜스님에게 귀의하여 경산(徑山)에 수좌로 있었다. 무착 묘총(無着妙聰) 비구니가 아직 출가승이 되지 않았을 때 대혜스님이 그녀에게 방장실에 숙소를 정해주자 스님은 항상 이를 비난해 왔다. 이에 대혜스님이 “그녀가 비록 아녀자이긴 하지만 휠씬 나은 점이 있다”하였으나, 스님은 이를 수긍하지 않았다. 대혜스님이 강제로 그를 만나보도록 명하니 스님은 하는 수 없이 만나보겠다고 하였다.
무착이 스님에게 말하였다.
“수좌께서는 저와 불법으로 만나시렵니까? 아니면 속세법으로 만나시렵니까?”
“불법으로 만납시다.”
“옆의 사람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그리고는 스님을 방으로 들어오라 청하였다. 스님이 휘장 앞으로 다가서 보니 무착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알몸으로 반듯이 누워 있었다. 스님이 손가락질하며 말하였다.
“여기서 무엇하는 것이오?”
“삼세 모든 부처와 육대 조사, 그리고 천하의 노화상도 모두 이속에서 나왔습니다.”
“이 노승이 들어가도 되겠소?”
“여기는 말이나 당나귀가 건너는 곳이 아니오.”
스님이 말을 못하자 무착은 말하였다.
“수좌와의 첫인사는 끝났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안쪽을 바라보았다. 스님은 망신을 당하고서 나오고야 말았는데 대혜스님이 물었다.
“이 못난 중생이 지각없는 짓을 한게 아닌가?”
그러자 스님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대혜스님은 입실법문에서 남전스님이 암자에 주석할 때 산에 올라가 일을 하는데 한 스님이 찾아오니 그 스님에게 밥을 지어먹고 산으로 한 그릇 가져오라 했던 인연을 들어 설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산호 베개 위에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은 하나는 님 생각이고, 하나는 님을 원망하는 마음일세.”
대혜스님은 시자에게 명패(名牌)를 거두게 한 뒤 “이 한마디로 충분히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였다”하고 법문을 끝냈다.
스님은 처음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에 있다가 뒤에 고향에 돌아가 운정산(雲頂山)에 머물렀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양나라 지공(誌公) 화상이다.”
“무엇이 불법입니까?”
“기막히게 절묘한 말[黃絹幼婦 外孫齏臼]이다.*”
“무엇이 스님입니까?”
“낚싯배 위에 있는 사삼랑(謝三郞 : 玄沙스님)이다.”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젓가락통에는 젓가락과 이쑤시개가 뒤섞여 있지 않고 늙은 쥐는 떡시루와 바구니를 물어뜯지 않는다.”
한자창(韓子蒼 : 駒)이 스님과 함께 난리(금나라의 침공)를 피해 다니면서 시를 지었다.
예전에 두 친구와 함께 명심사에 살다가
적병을 피하여 한밤중에 남산으로 달아났고
큰 추위에 또다시 저여(沮洳)가는 지름길을 갈 적엔
달 없는 밤에 양매림(楊梅林)으로 잘못 들었네
험준하고 가파른 산길 3,4리쯤 지나
조금씩 다시 앞으로 나아가 시냇물을 건너
새벽에야 농부의 집에서 불을 빌려 가지고
열흘 동안 깊은 바위 속에서 숨어 지냈지
민 땅 사람들은 모두가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다 한탄했는데
촉승(蜀僧)은 게다가 몹쓸 병까지 걸렸으니
목숨 보전하기는 바늘구멍을 나오기보다도 어렵다 말들 했지만
쌓이는 근심으로 사람이 상하기야 병자와 일반인터
봄바람 달콤직한 버들가 절간에서
마주보며 꿈속에 꿈이야기 하는데
이제 온 나라에 전란의 북소리가 없어졌으니
거치른 밥에 한 가닥 부추나물 싫다하지 말게나.
昔與二子居明心 避賊夜走南山陰
大寒更蹈沮洳徑 月黑錯到楊梅林
涉險登危四三里 少復前行過溪水
平明乞火野人家 十日深藏巖穴裏
閩俱嘆我裝齏空 蜀僧轉墮妖氣中
人言性命脫針孔 忱憂傷人衰疾同
春風酣酣柳邊寺 相對夢中論夢事
莫嫌薄飯一莖齏 郡國而今無鼓鼙
찬하노라.
기린의 머리에 용의 뿔이여
대대로 이어온 명문이어라
무쇠 목은 3백근이라
뛰어나게 꿋꿋했고
이마에 점점히 박힌 먹물자국은
격식을 벗어난 풍류로다
원오스님의 회하에서 이미 용의 그림을 이루었으나
한 점 눈동자를 그려놓지 못했는데
부옥산에서 기미만 보고도 알아채시되
삼의(三衣)를 벽에 걸고 머리 돌릴 시간도 걸리지 않았네
비단 휘장 앞에서 한 차례 혼비백산하던 일
도리어 부인의 매서운 수단을 만났고
산호 베개 위에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은
남전스님의 계산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나오는대로 말을 하여
늙은 쥐는 떡시루와 바구니를 물어뜯지 않는다 자랑하고
기연에 임해서는 힘껏 달려가
준마타고 곧바로 먼 누각에 부딪쳐 본다
호계(虎溪)의 다리를 짖밟아
혜원(慧遠)법사 배척하고 백련결사를 산 채로 묻었으며
남만(南巒) 땅 길 끝까지
미치광이 대혜따라 매주(梅州)에서 귀양살이 함께 했다.
나라의 액운을 소탕코저 한 차례 군복을 입고서
자욱한 연기 날린 공훈을 이루었고
불일(佛日)의 풍진(風塵) 삼척검(三尺劍)과 함께 창을 휘둘러
힘을 빌어 기지와 꾀를 발휘하였네
저여(沮洳) 길 양매림이여
젊은 시절 남산 피난길이 아련한데
우두산(牛頭山) 운정사여
만년에 서촉 땅으로 돌아가 쉬려했던 곳
만일 이 늙은이에게 중이 무어냐고 단적으로 묻는다면
사삼랑(謝三郞)은 반드시 고깃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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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한(後漢)의 채옹(蔡邕)이라는 사람이 한단순(邯鄲淳)이 지은 효녀 조아비(曹我碑)의 비문을 보고 읊은 찬사로 파자로 된 은어이다. 황견(皇絹)은 색사(色糸)이므로 즉 ‘절(絶)’자가 되고 유부(幼婦)는 소녀(小女) 즉 ‘묘(妙)’자가 된다. 외손은 딸의 아들이므로 여자(女子) 즉 ‘호(好)’자이고 제구(齏臼)는 맵다는 뜻으로 설신(舌辛), 즉 ‘사(辭)’자가 된다. 이상을 합해보면 ‘절묘호사(絶妙好辭)’라는 뜻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