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광록 (百丈廣錄) 3.~ 11
백장광록 (百丈廣錄)
3.
어떤 이가 물었다."지금 이 국토엔 선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말입니까?"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동하지도 않고 선에 들지도 않음이 여래선(如來禪)인데, 선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조차 떠났다."
4.
어떤 이가 물었다.
"'유정(有情)은 불성이 없고 무정(無情)은 불성이 있다' 한것은 무슨 뜻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으로부터 부처에 이르는 것은 성인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며, 사람에서 지옥에 이르는 것은 범부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다. 범부와 성인 두 경계에 물들고 애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를 '유정은 불성이 없다'라고 하며, 범부와 성인 두경계와 유 · 무 모든 법에 갖고 버리는 마음이 전혀 없으며 갖고 버림이 없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면 '무정은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망정의 얽매임이 없기 때문에 무정(無情)이라 이름하는 것이지 목석이나 허공 · 노란 국화꽃 · 푸른 대나무 등 감정이 없는 것을 가지고 불성이 있다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들에게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 중에 수기를 받고 성불했다는 자를 경전에서 볼 수 없는 까닭이 무엇인가? 지금 비추어 깨달음[鑑覺]은 유정의 변화를 받지 않는 점이 푸른 대나무와도 같으며, 모든 근기에 다 응하고 모든 상황을 다 아는 것이 노란 국화꽃과도 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단계를 밟아 보았다면 무정에 불성이 있다 하겠지만 부처님의 단계를 밟아 보지 못했다면 유정에게 불성이 없다 하겠다."
5.
한 스님이 물었다.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 : 법화경 화성유품에 나오는 부처님)은 10겁(十劫)을 도량에 앉아 있었는데도 불법이 목전에 나타나지 않아서 불도를 이루지 못하였다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겁(劫)이란 '막힘' 또는 '머뭄'이라고도 하니 하나의 착함에 머물고 열 가지 착함에 막히는 것을 말한다. 인도에서는 부처[佛]라 하고, 이 땅에서는 그것을 깨달음[覺]이라 하는데, 자기의 비추어 깨달음[鑑覺]이 착함에 막히고 집착되므로 선근인(善根人)에게는 불성이 없다. 그러므로 '불법이 목전에 나타나지 않아 불도를 이루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악에 부딪치는대로 악에 머무는 것을 '중생의 깨달음'이라 하고, 선에 부딪치는대로 선에 머무는 것을 '성문의 깨달음'이라 하며, 선 · 악 양쪽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음을 옳다고 여기는 자를 '이승의 깨달음' 또는 '벽지불의 깨달음'이라 한다.
선 · 악 양쪽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내지 않음을 보살의 깨달음'이라 한다. 또한 머물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것이 없다는 생각을 내지 않아야만 비로서 '부처의 깨달음'이라 하니, 마치 '부처가 부처에 머물지 않아야 진실한 복전(福田)이라 이름한다'고 한 것과 같은 이야기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홀연히 이를 체득한 자가 있다면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라 하니, 어디서나 스승이 되어 부처가 없는 곳에서는 부처라하고, 법이 없는 곳에서는 법이라 하며, 스님 없는 곳에서는 스님이라 하며 '큰 법 바퀴를 굴린다'고 하는 것이다.
6.
어떤 스님이 물었다.
"옛부터 조사들께서는 모두 비밀스러운 말씀으로 계속 전수 해왔다 하니 무슨 의미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비밀한 말은 없으며, 여래께서는 비밀스럽게 간직한 것이 없으시다. 비추어 깨닫는다 함은 말은 분명하나 형상을 찾아도 끝내 찾지 못하니 이것이 '비밀스러운 말이다. 수단원(須陀洹)에서 10지(十地)에 오르도록 무슨 말이든 있기만 하면 모조리 법의 티끌에 속하고, 무슨 말이든 있기만 하면 번뇌라는 테두리에 들어가고 방편교설에 속하니 말이 있었다 하면 무엇이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궁극적인 교설마저도 부정하는데 다시 무슨 '비밀한 말'을 찾겠는가."
7.
또 물었다.
"바다에서 물거품 하나가 일어나듯 허공이 대각(大覺)에서 생겼다 하였는데, 무슨 뜻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허공은 물거품에, 바다는 자성(自性)에 비유된 것이다. 신령하게 깨닫는 자기 본성은 허공을 능가하므로 '바다에서 물거품 하나가 일어나듯 대각에서 허공이 나왔다'고 한 것이다."
8.
또 물었다.
"'숲은 베어도 나무는 베지 말라' 하였는데 무슨 말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숲은 마음에 나무는 몸에 비유된 것인데, 숲으로 설명해야 두려운 마음이 생기므로 '숲은 베어도 나무는 베지 말라'고 한것이다."
9.
또 물었다.
"'말을 하면 표적이 되어 화살을 부른다'하니, 말을 하여 표적이 되고 나면 근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심에 매인 점이 똑같다면 무엇으로 승속을 구별하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화살을 쏘아 도중에 딱 부딪치듯 해야만 한다. 만일 어긋난다면 반드시 다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골짜기에서 메아리를 찾는다면 여러 겁 동안 찾아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메아리는 입가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잘 잘못은 찾아와서 묻는 데에 있다. 귀결점을 묻는다면 도리어 화살을 맞을 것이니, 역시 '허깨비인 줄 알면 허깨비가 아니다' 한 말씀과 같다.
삼조(三租)께서 말씀하시기를, '현묘한 종지를 모르고 망념을 가라 앉히느라 헛수고하는구나' 하셨다. 또 '보이는 것[物]을 보는 것[見]이라 오인한다면 마치 기와 부스러기를 가진 것과 같으니 무엇에 쓰겠으며, 보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목석과 무엇이 다르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보는 것이다 아니다 하면 둘 다 잘못이니, 이 한가지 예로 모든 것을 견주어 보라."
10.
또 물었다.
"번뇌와 32상이 본래 없다는데, 어떻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부처님 쪽의 일이다. 본래 번뇌가 있었다거나 지금 32상이 있다는 것은 범부의 생각일 뿐이다."
11.
또 물었다.
"끝없는 몸을 가진 보살[無邊身菩薩]이 여래의 정수리를 보지 못한다 하니 어째서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끝이 있다 없다는 견해를 냈기 때문에 여래의 정수리를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제 있다 없다 등의 모든 견해가 전혀 없고 그 견해 없음마저도 없다면 이것을 '정수리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