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문십규론] 1~5.
종문십규론
1. 자기 마음자리는 밝히지 못하고
망령되게 다른 사람의 스승 노릇을 하다
생각컨대 마음자리 법문[心地法門]은 참구의 근본이다.
마음자리란 무엇인가? 여래께서 크게 깨치신 성품이다. 그러나 시작 없는 옛부터 한 생각 뒤바뀌어 사물을 자기로 착각하며 탐욕이 불길같이 타올라 생사에 떠다닌다. 각성[覺照]이 어두워지고 무명(無明)이 덮혀 업륜(業輪)이 밀고 굴러나가면서 자유롭지 못하니, 일단 사람의 몸을 잃으면 긴 세월 동안 돌이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어 많은 방편문을 베푸셨으나 의미에 막히고 말을 따지면서 다시 상견(常見) ·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조사께서 이를 불쌍히 여기고 심인(心印) 하나만을 전하여, 단계적인 수행을 거치지 않고 단박에 범부와 성인을 뛰어넘게 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깨달아 의혹의 뿌리를 영원히 끊게 하였을 뿐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태만히 하고 쉽게 여겨, 총림에 들어오긴 했어도 열심히 참구하겠다는 마음을 게을리한다. 설사 여기에 마음을 두는 정도는 되었다 해도 선지식을 잘 가려찾지 않아서 삿된 스승의 허물과 오류로 둘다 함께 종지를 잃는다. 육근(六根) · 육진(六塵)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삿된 견해를 내므로 마군의 경계로 들어가 본심[正因]을 완전히 잃는다. 그리하여 주지하는 일만을 급선무로 여기며 외람되게 선지식이라 자칭할 줄만 알 뿐이다. 그렇게 헛된 명예를 세상에 날림을 중요하게 여기니 몸에 쌓여가는 악을 어찌 다 논할 수 있겠는가. 후학을 귀 먹고 눈 멀게 할 뿐만 아니라, 교풍을 피폐시킨다.
높고도 드넓은 법왕(法王)의 자리에 올라 도리어 뜨겁게 달궈진 무쇠 평상에 눕게 되며, 순타(純陀)가 주는 최후의 공양을 받고는 잠깐 있다가 끓는 구릿물을 마시게 된다. 그때는 두려움에 떨며 편안하게 여길 곳이 없으니 대승(大乘)을 비방한 죄는 그 과보가 적지 않을 것이다.
2. 무리지어 가풍을 지키느라
논의가 통하지 않다.
생각컨대 조사가 서쪽에서 여기까지 오신 것은 전할 만한 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 마음을 그대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그러니 어찌 숭상할 만한 가풍이란 것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뒤에 가서는 대대로 종사들이 교화를 달리 세우게 되었고, 이윽고는 서로가 자기 내력을 따르게 되었다. 우선 혜능(慧能) · 신수(神秀) 두 대사는 원래 한 조사 밑에서 견해갸 달랐다. 그러므로 세상에선 남종(南宗) · 북종(北宗)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혜능이 가신 뒤 행사(行思 : 청원) · 회양(懷讓 : 남악) 두 대사가 나와 교화를 이었다. 행사스님에게서 희천(希遷 : 석두)스님이 배출되고 회양스님에게서 마조(馬祖)스님이 나와 강서(江西) · 석두(石頭)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두 갈래로 내려오면서 각자 줄줄이 파를 나눠 모두가 한 지역씩을 차지하였는데, 그 시작되는 원류를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덕산(德山) · 임제(臨濟) · 위앙(潙仰) · 조동(曹洞) · 설봉(雪峰) · 운문(雲門)에 와서는 각자 높고 낮은 품격대로 가풍을 세워 법을 폈다.
그러다가 계승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자손들이 종파를 지키고 조사에 따라 무리를 짓느라 진실된 이치[眞際]에 근원을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끝내는 많은 갈래를 내어 창과 방패처럼 맞서 공격하며 흑백을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큰 도는 정해진 방향이 없고 법의 물줄기는 똑같은 맛임을 전혀 몰랐다 하겠으니, 허공에다 색을 칠하고 철석(鐵石)에다 바늘을 던지는 격이다.
싸움을 신통이라 여기고 입만 나불거리면서 그것을 삼매라고 하여 시비가 시끄럽게 일고, 너다 나다 하는 생각[人我見]이 산처럼 높다. 그리하여 분노가 일면 그것이 아수라(阿修羅)의 견해가 되고 끝내 외도(外道)를 이룬다.
만일 선량한 벗을 만나지 못하면 미혹의 나루터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워, 비록 선인(善因)을 심었으나 악과(惡果)를 부른다.
3. 강령을 제창하면서 맥락을 모르다
생각컨대 선문을 표방하고 법요(法要)를 제창하려 하면서 맥락을 모르면 모두가 망령되게 이단(異端)이 되고 만다.
그 사이에는 먼저 표방하거나 뒤에 제창하기도 하며 불법을 설명하기도 하고 기봉(機鋒)을 단박에 꺾기도 한다.
조사의 법령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살리고 죽임이 손아귀에 있어서 혹은 천 길 절벽에서 선 듯 물샐 틈 없기도 하고 혹은 자재한 살림을 잠깐 허락하여 물결을 따르기도 한다. 마치 왕이 칼을 어루만지면서 자유로워진 것을 다행으로 여길 때처럼, 그때그때 쓰면서 주었다 뺏었다 함이 몸에 차고 부리는 듯하다. 파도가 날듯 산악이 서 있듯 하고 번개가 구르듯 바람이 달리듯 하며, 큰 코끼리 왕이 유희하고 진짜 사자가 포효하듯 한다.
그러나 자기의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쓸데없이 남의 말을 훔쳐, 놓아 주는 것만 알 뿐 거둘 줄은 모르로 살리기만 하고 죽일 줄은 몰라, 종[奴]인지 낭군인지를 분별 못하고 진짜와 가짜를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옛사람을 모독하고 종지를 매몰하여 사람마다 알음알이 속에서 헤아리고 낱낱이 오음십팔계(五陰十八界) 안에서 찾는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깨달음인 줄을 모르고 가짜반야[相似般若]를 이룰 뿐이니, 머물 것 없는 근본에서 법당(法幢)을 세우고 부처님을 대신하여 법을 펴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듣지도 못했는가. 운문(雲門)스님께서 "온 나라를 통틀어 화두 드는 사람 하나를 찾아보아도 찾기 어렵다"라고 하셨던 것을.
또 듣지도 못했는가 황벽(黃檗)스님께서 "마대사(馬大師)가 80여 명의 선지식을 배출하였으나 물었다 하면 모조리 구구한 경지일 뿐이고, 유일하게 여산(廬山)스님이란 분이 그래도 약간 나은 편이다"라고 하셨던 것을.
이로써 이 자리에 앉아 법령을 드러내고 강령을 제창할 줄 알면 바로 완성된 종장(宗匠)이라는 점을 알겠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듣지도 못했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싹을 보면 토질을 알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람을 알아내니 눈을 깜짝이고 눈썹을 드날리기만 해도 벌써 간파해 버린다"라고 했던 것을. 하물며 남의 모범이 되어서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4. 대답에서 경계를 보지 못하고 종안(宗眼)도 없다
생각컨대 종사라면 우선 삿됨과 바름을 분별해야 한다. 삿된지 바른지가 판가름났으면 이제는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또 말을 할 때는 종지를 보는 안목을 겸하여 응수하는 기봉이 각각 서로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말 속에서 사사로움이 없다고는 하나 역시 말을 빌려 그 속에서 정확한 뜻을 분별해야 한다.
조동(曹洞)은 동시에 북치고 노래하는 것으로 작용을 설명하였고, 임제(臨濟)는 자재하게 뒤바뀌는 것으로 본체를 설명하였다. 또한 소양 운문(韶陽雲門)은 하늘 땅을 덮고 많은 흐름을 끊었다 하였으며, 위앙(潙仰)은 둥글고 모난 것이 가만히 계합한다 하였다.
그것은 마치 골짜기가 소리에 대답하고, 관문에서 부절(符節)이 맞듯 하여 비록 법식에는 차별이 있었으나 원융하게 회통하는 데 있어서는 막힘이 없었던 것이다.
요즈음, 종사는 바탕을 잃고 학인은 배울 곳이 없어 너다 나다 하는 생각으로 기봉을 다투고 생멸을 얻을 만한 그 무엇이라고 집착한다. 그러니 중생을 지도하는 마음이 어디에 있겠으며, 삿됨을 타파하는 지혜를 얻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방(棒)과 할(喝)을 어지럽게 써대면서 "덕산[德橋]과 임제(臨濟)를 참례했다"고 자칭하며, 원상(圓相)을 서로 꺼내면서 "위산(潙山) · 앙산(仰山)을 심오하게 통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답에서 이미 종지를 결판내지 못했는데 작용할 때라고 어떻게 요긴한 안목을 알겠는가. 여러 소인들을 속이고 성현을 기만하여, 곁에서 구경하는 사람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현세에서 죄보를 부른다.
그러므로 일숙각(一宿覺)이 말하기를 "무간 지옥의 업보를 부르지 않으려거든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아라" 하였던 것이다.
위와 같은 무리들은 다 거론할 수 없을 정도이니 그들은 단지 스승에게 받은 것을 탈취할 뿐 자기 견해라고는 도대체 없다. 붙들 만한 근본이 없어 업식(業識)이 망망하니 정말로 가련하다. 과보를 받아내기가 어렵겠구나.
5. 이사(理事)를 어그러뜨리고
청탁을 분간하지 못하다
생각컨대 일반적으로 조사와 부처의 종지는 이치[理]와 현상[事]을 동시에 갖춘다. 현상은 이치를 의지해서 성립하고 이치는 현상을 빌려 밝혀지니 이치와 현상은 눈과 발이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다. 가령 현상만 있고 이치가 없다면 막혀서 통하지 못하고, 이치만 있고 현상이 없으면 어지럽게 퍼져 돌아갈 곳이 없다.
그것이 둘이 아니게 하고 싶은가. 중요한 점은 원융이다. 조동(曹洞)의 가풍에서는 편정(偏正)과 명암(明暗)을 시설하고, 임제(臨濟)는 빈주(賓主)와 체용(體用)을 세운다. 이렇게 방편을 세우는 일은 서로 다르나 맥락은 서로 통하여 다 받아들이므로 움찔했다 하면 모두 모인다.
또 법계관(法界觀)에서도 이사(理事)를 빠짐없이 논하여 자성이 색(色)이니 공(空)이니 하는 것을 끊었다. 그것은 가없는 성품 바다를 한 털끝에 받아들이고 지극히 큰 수미산을 겨자씨 하나에 간직하기 때문이다.
이는 성인의 도량으로 그렇게 되게 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법 자체가 원래 그러한 것이며, 또 신통변화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 본래면목[誕性]을 미루어 부합한 것이다. 그것은 다른데 붙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마음에서 지어내어 부처와 중생이 모두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 그 뜻을 모르로 허망하게 논하면 더러운지 깨끗한지를 분간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도 가려내지 못하여 자재[回互]한 데서 편(偏) · 정(正)이 막히고, 본래 그러한[自然] 데서 채용이 뒤섞이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를 한 법도 밝히지 못하여 가는 티끌이 눈을 가렸다 하는 것이니, 자기 병도 다 끊지 못하였는데 다른 사람의 병을 어떻게 치료하겠는가.
매우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니 실로 작은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