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산록/ 조당집(祖堂集)] 2. 상당 · 감변 29~36.
2. 상당 · 감변
29.
도존(道存)스님이 다시 물었다.
“위산스님을 하직할 때 무슨 말씀을 해주셨습니까?”
“내가 스님을 하직할 때 분부하시기를, ‘5 · 6년 동안 내가 있단 말을 듣거든 돌아오고, 내가 없단 말을 듣거든 스스로가 살아갈 길을 선택해서 힘쓰라. 잘가거라’하셨다.”
30.
도존스님이 다시 물었다.
“스님께서 지금 조사의 가르침을 전해 받으시고도 후학(後學)들에게 수기(授記)를 주지 않으시면 그들은 어찌합니까?”
“내가 분명히 말해주겠다. 지금 나는 남에게서 견해(見解)를 시험하지 남의 행해(行解)는 시험치 않는다. 행해는 의밀(意密)에 속하는 것이니, 경계를 대할 때, 무거운 곳으로 치우쳐 흘러 업의 밭에 싹이 돋거늘 딴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어떻게 그들을 수기하겠는가?
듣지 못했는가. 대이(大耳) 삼장께서 서천(西天)에서 와서 숙종(肅宗)을 만났는데 숙종이 묻기를, ‘삼장은 무슨 법을 아시오?’ 하니, ‘타심통(他心通)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숙종이 중사(中使)를 혜충국사(慧忠國師)에게 보내 삼장이 정말 타심통을 아는지를 시험케 했다. 국사께서 경계에 마음이 반연하는가를 시험했는데 삼장이 과연 생각이 간 곳을 알았으니, 경계에 반연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국사께서 삼매에 들어 마음이 경계를 반연하지 않으니 삼장이 국사의 마음을 찾지 못하자, ‘이 여우 망령아! 성스러움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꾸짖었다.
이렇게 자수용삼매(自受用三昧)에 들면 그 깊은 경지를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행해는 알기 어렵다 하겠다. 그러므로 ‘증득하는 것은 견해로 아는 것이 아니며, 증득하지 않는 것도 견해로 아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31.
도존스님이 다시 물었다.
“어찌해야 행해를 깨치[相應]겠습니까?”
“그대들은 선종의 제3현(玄)을 알아야 한다. 초발심이 중요한데, 그것은 문 안에 드는 제1현이다. 다음 두 가지 현(玄)은 자리를 얻고 옷을 입는 것이니 그대들 스스로 살피라. 또한 깨달음의 종자[種覺]와 종지[一切種智]도 알아야 한다. 깨달음의 종자는 3신불이 한결같은 것이니 다툼없는 도리[理無諍]라고도 하며 맑고 고요한 비로자나부처라고도 한다. 종지[一切種智]라 함은 몸의 성품이 환해진 뒤에 다시 몸 이전에 작용하되 물들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다. 또는 의지할 것 없는 노사나부처 지혜라고도 하며, 또는 한 바탕에 세 몸이라고도 하니, 다툼없는 행[行無諍]을 행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몸의 성품이 환해져서 번뇌가 다하고 뜻이 열리면 몸 이전에 業이 없고 동정(動靜)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하여 생사에 드나들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니, 이것을 바른 행[正行], 머뭄없는 수레[無住車]라고도 하며, 차츰 숙명통(宿命通)과 타심통(他心通)을 저절로 갖추게 될 것이다. 3명(三明)과 8해(八解)는 성현들에게는 지말적인 일이니,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라. 분명히 말해주겠다. 성품 바다에서 수행을 할지언정 3명과 6통을 바라지는 말라. 어째서인가? 흐림이 있고 맑음이 있으면 두 가지 모두가 미혹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듣지 못했는가. 위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마음이 다하여 참되고 항상한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면 현실과 작용이 둘이 아니리니, 이것이 곧 여여(如如)한 부처니라’ 하셨다.”
32.
완능(莞陵)의 도존(道存)스님이 물었다.
“제방에서는 모두들 달마(達摩)스님께서 4권짜리 「능가경(楞伽經)」을 갖고 오셨다는데 정말입니까?”
“거짓말이다.”
“어째서 거짓이라 하십니까?”
“달마스님께서 양(梁)나라 때 오셨는데 그 경을 가지고 왔다면 어느 왕조 때 번역했으며, 그 전기는 어디에 실렸는가? 「능가경」은 앞뒤로 두 차례 번역되었다. 첫째는 송(宋)나라 때 구나발마(求那跋摩)삼장이 남해(南海) 시흥군(始興郡)에서 번역한 것으로 범어에 질다(質多 : citta, 心)를 삭삭생념(數數生念 : 불쑥불쑥 생각을 일으킴)으로, 또 건율다(乾栗多 : hrdaya)를 무심(無心)으로 번역했다. 이것이 첫 번째로서 위의 목록에 나타나 있다. 둘째는 강릉(江陵) 신흥사(新興寺)에서 절두(截頭)삼장이 번역한 것으로 범어의 질다를 삭삭생념으로, 범어의 건율다를 무심으로 번역했으니, 이것이 둘째 것이다. 뜻은 같은데 범어와 한어(漢語)에는 차이가 있다. 만일 달마스님이 경을 가지고 왔다면 뜻을 구체적으로 번역한 것이 어느 해이던가? 또 어느 지방에 퍼졌었는가?
듣지 못했는가. 육조스님께서 조계(曺溪)에 계실 적에 설법하기를, ‘나에게 무엇이 있는데 본래 이름도 없으며, 머리도 꼬리도 없고, 나와 남도 없고, 안도 바깥도 없고, 모나고 둥금도 없고, 크고 작음도 없고, 부처도 아니며 물건도 아니다’ 하시고는 다시 묻기를, ‘이것이 무엇인가?’ 하니 대중이 아무 말도 없었다.
이때 신회(神會)라는 사미가 나서서 대답하기를, ‘저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니, 육조스님께서 ‘이 말 많은 사미야, 안다고 하는 그것은 무엇이라 하겠느냐?’ 하였다. 신회가 다시 ‘이는 부처님들의 근본이자 저의 불성입니다’ 하니 육조스님께서는 주장자를 찾아 사미를 때리면서, ‘내가 너에게 이름도 없다 했거늘 어째서 근본이다, 불성이다 하는 이름을 붙이는가?’ 하였다 그때 신회는 본원이니 불성이니 하고도 몽둥이를 맞았는데, 지금은 달마스님께서 경을 가지고 왔다 하는구나. 이는 달마스님을 기만하고 조종(祖宗)에 누를 끼치는 짓이니, 무쇠 방망이를 맞아야 될 것이다.
그러나 불법이 이 땅에 들어온 지 3백여 년 동안에 앞뒤의 임금들이 경론(經論)을 번역한 것이 적지 않음을 어찌하겠는가? 달마스님이 굳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그대들 모두가 3승 5성(三乘五性)의 교리를 탐내고 집착하여 이론의 바다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달마스님께서 그대들 모두의 미혹한 생각을 구해 주시려 했던 것이다.
스님이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양(梁)나라 보지(寶志)스님만이 알아보았는데 양무제(梁武帝)가 묻기를, ‘그는 누구인가?’ 하니,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시려는 대사(大師)며, 관음성인(觀音聖人)이십니다’ 하셨을 뿐, 「능가경」을 전하러 오신 성인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33.
도존스님이 다시 물었다.
“달마스님은 5행론(五行論)에서 ‘교법에 의지하여 종지(宗旨)를 깨달으라’ 하셨는데 어떤 교법을 의지해야 합니까?”
“이른바 ‘교법에 의지하여 종지를 깨닫는다’ 함은 다만 입 · 말 · 이 · 목구멍 · 입술만을 의지하거나 혹은 광명 놓는 것을 보고 이치를 아는 것이다. 종지를 깨닫는다 함은 양무제에게 한 대답 즉 ‘성품(性) 을 보는 것을 공(功)이라 하고, 묘한 작용을 덕(德)이라 하는데 공이 이루어지고 덕이 일어나는 것은 한 생각 사이에 있습니다. 이러한 공덕과 맑은 지혜의 묘한 작용은 세상에서 구할 바가 아닙니다’ 한 것이다.
또 조계 육조스님께서 천자가 보낸 사람에게 대답하기를, ‘선도 악도 도무지 생각치 않으면 자연히 마음바탕에 들어가서 담연(湛然)하고 상적(常寂)한 묘용이 항하수의 모래 같을 것입니다’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사람이 단박 깨닫고는 지극히 묘하다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이것으로써 불성은 선과 악을 생각지 않고, 묘한 작용은 자재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제가 천자를 뵈오면 이 묘한 진리를 전갈하겠습니다.’
황제께서도 이 말을 전해 듣고 단박 깨닫고는 ‘짐이 서울에서 일찍이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없도다’ 하고 감탄하였다. 이 말씀이 실로 분명한 증거이니, 수행자들에게 공경을 다하여 절하노라.”
34.
도존스님이 물었다.
“달마스님께서 「능가경」을 가져 오지 않았다면 마조스님 어록과 제방 노숙들의 설법에서 자주자주 「능가경」의 말씀을 인용한 뜻이 무엇입니까?”
“예로부터 전하는 말에, 달마스님께서 설법하실 때 이 나라 중생들이 깊은 진리를 믿지 않을까 하여 자주자주 「능가경」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하니, 그 경에는 도에 가까운 점이 있어서 말[說通]과 이치[宗通]를 동시에 써서 어리석은 이들을 깨우쳐 주셨기 때문이다. 이치[宗通]를 수행한 예로는 청혜(聽惠)바라문이 부처님께 와서 36가지 대칭되는 개념[三十六對]을 물으니, 세존께서 모두 무시하여 세속 이론에 집어놓으신 일이 그것이다. 또 비슷한 것이 있으니, 인연에 따라 얻은 깨달음과 본래 머무는 법[本住法]은 마치 금 · 은 따위의 성질과 같아서 여래께서 세상에 나타나시거나 나타나시지 않음에 관계없이 본성이 항상 머문다 하셨으니, 그러므로 부처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성품과 형상은 항상 머문다고 하셨다. 이는 부질없는 이야기로 인용한 것이지 달마스님이 으뜸가는 종지로 삼은 것은 아니다.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달마스님께서 인도에 계실 때, 반야다라(般若多羅)에게 묻기를, ‘제가 지금 법을 얻었는데 어디에 가서 교화를 펴리까?’ 하니 ‘그대가 지금 법을 얻었으나 빨리 떠나지 말고, 내가 입멸한 지 61년 뒤에 중국[震旦]으로 가면 9년만에 되겠지만 지금 떠난다면 그날로 쇠할 것이다’ 하였을 뿐 「능가경」을 가지고 가라는 분부를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말하겠다.
선도(禪道)를 배우려거든 자세히 살펴야 한다. 만일 그 근본 유래를 알지 못하거든 절대로 종문 안의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 비록 좋은 인연이기는 하나 반드시 나쁜 결과를 부를 것이다.”
35.
유주(幽州)의 사익스님이 물었다.
“선종(禪宗)에서 결국 활짝 깨달아[頓悟] 들어가는 방편의 분명한 뜻이 무엇입니까?”
“이 뜻은 매우 어려우니, 조사 문하의 법손들은 최상근기다. 인도의 여러 조사와 이 나라에서 예로부터 법을 이어받은 여러 조사들을 보건대 하나의 묘한 기틀이나 혹은 하나의 경계와 지혜를 대하면 곧 받아들여 제 이치를 얻고 미혹의 경지를 떠나 다시는 문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전하는 말에 ‘부처님들의 이론은 글과는 관계없다’ 하였으니, 오직 이런 근기는 만나기가 어렵다. 그대들에게 말하겠는데, 선(禪)을 배우는 학인은 드물다. 어디에서인들 불법을 만자지 못하겠는가마는 오직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듣지 못했는가. 옛스님이 말하기를, ‘만일 선에 안정하여 조용히 생각치 않으면 이 경지에 이르러서 모두가 온통 망연(茫然)하다’ 하셨다.”
36.
사익스님이 다시 물었다.
“이 한가지 격식[格]말고도 들어갈 곳이 있습니까?”
“있다.”
“무엇입니까?”
스님께서 도리어 물었다.
“그대는 어디 사람인가?”
“유연(幽燕)사람입니다.”
“그곳을 생각할 때가 있는가?”
“생각합니다.”
“그 곳은 경계이고 생각하는 것은 그대 마음이니, 그대는 생각하는 그것을 돌이켜 생각해 보라. 그곳이랄 것이 있는가?”
“그 경지에서는 그곳뿐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대는 아직도 마음과 경계가 따로 있는 수준이다. 신심을 냈다 할 정도[信位]는 되겠지만 개성이 그대로 발휘되는 단계[人位]라고는 할 수 없다.”
“그 경계말고 다른 뜻이 있습니까?”
“따로 있다거나 따로 없다고 한다면 틀린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그대는 일현(一玄)을 얻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옷을 풀어 헤칠 만한 경계에 도달했으니 앞으로는 스스로 잘 살피라. 듣지 못했는가. 육조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도는 마음을 통해 깨달아지는 것이다’ 하셨고, 또 ‘마음을 깨달으라,’ ‘선과 악을 도무지 생각하지 않으면 자연히 마음바탕이 담연(湛然)하고 상적(常寂)한 경지에 들어가서 묘한 작용이 항하수 모래알만큼이나 될 것이다’ 하셨다. 정말 이렇게 되었다면 스스로가 잘 간직[保任]해야 하니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보호하고 염려하신다’ 하셨다. 그러나 만일 번뇌가 남아 의식의 뿌리[意根]를 놓지 못하고 기억과 상상 등 알음알이를 몸에 머물러 둔다면 5음신에 끄달려 뒷날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깊은 수렁에 빠진 코끼리 같아서 전혀 선을 보지 못할 뿐더러 사자 새끼도 되지 못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