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담주 운개산 해회사에 머물면서 남긴 어록 21~35.
21.
양전제형(楊畋提刑)이 산 아래를 지나가자 스님께서 나아가 맞이하였더니, 제형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누구의 법을
이었습니까?"
"자명(慈明)대사를 이었습니다."
"무슨 도리를 보았기에 그분의 법을 이었습니까?"
"같은 발우에 밥을
먹었습니다."
"그렇다면 보지 못했군요."
스님이 무릎을 누르면서 말하였다.
"어느 점이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양전제형이 크게 웃자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제형이라야 되겠소" 하였다.
다시 "절에 들어가 향을 사루시지요" 하니 양전제형은
"기다려 주십시오. 돌아오겠습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스님께서 차와 글을 드리니 양전제형이 말하였다.
"이런건 되려 필요치
않습니다. 무슨 무미건조한 선[乾嚗嚗底禪]이 있기에 약간만 보기도 힘드는지요?"
스님께서 차와 글을 가르키며 말씀하셨다.
"이것도
필요치 않다면서 더구나 무미건조한 선이겠습니까?"
양전제형이 머뭇거리자 스님께서 게송을 지으셨다.
왕신(王臣)으로 나타내보이니 불조가 어찌할 바를 모르네
미혹의 근원은 지적하려고 숱한 사람을 죽였다네.
示作王巨佛祖罔措 爲指迷源殺人無數
그러자 양전제형이
말하기를 "스님은 무엇 때문에 자신을 겁탈하십니까?" 하니 스님께서 "원래 우리집 사람이었군" 하셨다. 양전제형이 크게 웃자 스님께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셨다.
22.
만수(萬壽)스님이 먼저 도착하고 이어서 편지가 이르자, 스님께서 물었다.
"만수봉(萬壽峰) 앞의
사자후를 이 사람[當人]이 되받아치는 일은 어떠한가?"
"펄쩍 뛰어 33천에 오릅니다."
"그렇다면 내게 당장 들킬 것이다."
"좀도둑이 크게 패했습니다."
"두번 간파하지는 않을 터이니 앉아서 차나 마시게."
23.
용흥(龍興)의 자(孜)
노스님이 돌아가시자 한 스님이 편지를 가지고 오니 스님께서 물었다.
"세존께서는 입멸하여 곽에 두 발을 보이셨는데, 스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더냐?"
그 스님이 말이 없자 스님이 가슴을 치면서 "아이고! 아이고!" 하였다.
24.
자명스님이 돌아가시자 한 스님이 편지를 가지고 왔다. 스님께서는 대중을 모으고 초상화를 걸어놓고 장례를 거행하려 하셨다.
스님께서
초상화 앞에 이르시더니 좌복을 들고서 "대중들이여, 알겠는가?" 하시고는 이윽고 초상화를 가르키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지난날 행각할 때
이 노스님께서 120근이나 되는 짐을 내 몸 위에 놓아 두셨는데 지금은 천하태평을 얻었다."
대중을 돌아보시면서 "알겠느냐" 하였는데
대중이 말이 없자 스님께서는 가슴을 치면서 말씀하셨다.
"아아, 슬프다. 바라옵건대 맘껏 드시옵소서."
25.
자명스님의 제삿날에 재를 열어 대중이 모이자 스님께서는 초상화 앞으로 나아가셨다. 두 손으로 주먹을 모아 머리 위에 얹고, 좌복으로 한
획을 긋더니 일원상(一圓相)을 그리셨다. 이어서 향을 사루고는 세 걸음을 물러나 큰절을 하시니 수좌가 말하였다.
"괴이한 짓을 날조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스님께선 괴이한 짓을 날조하지 마십시오."
"토끼가 소젓을 먹는구나."
제2좌(第二座)가 앞으로 나가 일월상을 그리고 이어서 향을 사루고는 역시 세 걸음을 물러나 큰절을 하자, 스님께서는 그 앞으로 가서 듣는 시늉을
하셨다. 제2좌가 무어라고 하려는데 스님께서 뺨을 한 대 치고는 "이 칠통이 횡설수설하는구나" 하셨다.
26.
무천(武泉)의 상(常)
노스님을 전송하러 문을 나왔다가 물으셨다.
"문을 나섰으니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겠는데, 집에 도착하는 한 마디를 무어라고 말하겠습니까?"
"스님께선 주지나 잘 하시오."
"이렇다면 몸이 쓸쓸한 그림자를 따라가며 발이 크니 짚신도 널찍하겠군요."
"스님께서
밭이나 잘 갈아두시오."
"토끼가 언제 굴을 떠난 적이 있었습니까?"
27.
하루는 신참승 셋이 찾아왔는데 스님께서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반드시 지혜로운 이가 있다…하였는데" 하고는 좌복을 들고 말씀하셨다.
"참두(參頭 : 수좌)는 이것을 무어라고
부르겠느냐?"
"좌구(坐具)입니다."
"참말이겠지."
"그렇습니다."
"이것을 무어라고 부르겠느냐?"
그 스님이
"좌구입니다" 하자 스님께서는 좌우를 돌아보더니 "참두가 되려 안목을 갖추었구나" 하고는 다시 제2좌에게 물으셨다.
"천리길을 가려면 한
걸음이 최초가 된다 하는데 무엇이 최초의 한 마디이더냐?"
"여기 스님 앞에서 어찌 감히 손을 꺼내겠습니까."
스님께서 손으로 한 획을 긋자 그 스님은 "끝났습니다[了]" 하였다.
스님께서 두 손을 펴자 그 스님이 무어라 하려는데 스님께서 "끝났다" 하셨다.
다시 제3좌에게 물으셨다.
"요즈음 어디서 떠나
왔느냐?"
"남원(南源)에서 왔습니다."
"내가 오늘 그대에게 간파당했구나. 우선 앉아서 차나 마시게."
28.
하루는 신참승 일곱 명이 찾아오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진이 완벽하게 쳐졌는데 솜씨좋은 장수는
무엇 때문에 진을 나와 겨뤄보지 않느냐."
한 스님이 좌구로 갑자기 후려치자 스님께서 "훌륭한 장수로군" 하셨다. 그 스님이 다시
후려쳤더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한 좌구, 두 좌구 해서 어쩌자는 것이냐?"
스님들이 무어라 말하려는데 스님께서 등을 돌리고 섰다.
그가 다시 후려치니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말해 보라. 내 말이 어디에 귀결되는가."
그 스님이 얼굴을 가르키면서 "여기
있습니다" 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30년 뒤에 눈 밝은 사람을 만나거든 잘못 들먹이지나 말아라. 우선 앉아서 차나 마시거라."
29.
하루는 도오산의 공양주 스님이 편지를 가지고 오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봄비가 잠시도 쉬지 않고 내리느데
물흐름[波瀾]을 거슬리지 말고 한번 말해 보아라."
"편지를 조금전에 이미 전해드렸습니다."
"이것은 도오 것이고, 저것은
화주(化主) 것이로구나."
공양주가 가리키면서 "봄비가 계속 옵니다" 하자 스님께서는 손뼉을 치며 크게 웃더니 말씀하셨다.
"반푼어치도 안되는군."
공양주가 대뜸 악! 하고 고함을 치자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눈먼 놈아, 조금전에 반푼어치도
안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악을 써서 무얼 하려느냐."
공양주가 손뼉을 한 번 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우선 앉아서 차나
마시게."
30.
하루는 석상산의 공양주 스님이 오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정벌하러 가는 장수가 길을 빌려
지나가는구나. 방비가 이미 완벽한데 무엇 때문에 나와 한판 붙어보지 않느냐."
"지난날엔 도중에서 잘못 찾았더니 오늘은 노련한 선지식을
친견하는군요."
"내 우선 조금만 싸움을 걸겠다."
공양주가 별안간 악! 하고 고함을 치자 스님께서는 "그렇게 허둥지둥해서 무얼
하려느냐" 하셨다.
공양주가 좌구를 가지고 한 획을 긋자 스님께서 "재가 끝나고 종을 치는구나" 하셨다.
공양주가 "허(噓)!"
하자, "이것일 뿐 다시 더 있겠느냐" 하셨는데 공양주가 말이 없자 스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패전한 장수는 목을 베지 않는 법이다.
우선 앉아서 차나 마셔라."
31.
스님께서 한 스님에게 물으셨다.
"양기산에 오는 길은 험한데 어떻게 귀한 걸음을
하셨습니까?"
"스님께선 다행히도 대인이십니다."
"에, 에[嗄]."
"스님께선 다행이도 대인의 스승이십니다."
"나는 요즈음 귀가 먹었다. 우선 앉아서 차나 마셔라."
32.
스님께서 한 스님에게 물으셨다.
"가을 빛이
완연한데 아침에 어디서 떠나 왔느냐?"
"지난 여름에는 상람사(上覽寺)에 있었습니다."
"앞길을 밟지 않는 한마디를 무어라고 말하겠느냐?"
"두겹의 공안이군요."
"그대의 대답이 고맙네."
그 스님이 별안간 악! 하고 고함을 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디서 이런 헛것을 배웠느냐?"
"눈 밝은 큰 스님은 속이기 어렵군요."
"그렇다면 내가 그대를 따라가리라."
그
스님이 무어라고 하려는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고향 사람인 것을 생각해서 30대만 때리겠다."
33.
스님께서 한
스님에게 물으셨다.
"구름은 깊고 길은 험한데 어떻게 귀한 걸음을 하셨습니까?"
"하늘은 사방에 벽이 없습니다."
" 짚신
꽤나 닳렸겠군."
그 스님이 별안간 악! 하고 고함을 치자 스님께서 "한번, 두번, 할을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하셨다. 그 스님이
"그대는 이 노승을 보아라" 하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주장자도 없잖아! 우선 앉아서 차나 마시게."
34.
스님께서 한 스님에게 물으셨다.
"썩은 낙엽더미가 구름처럼 쌓였는데 아침에 어디서 떠나 왔느냐?"
"관음사(觀音寺)에서 왔습니다."
"관음의 발밑을 한마디로 무어라고 말하겠느냐?"
"조금전에 이미 만나 보았습니다."
"만나 본 일은 어땠느냐?"
그
스님이 말이 없자 "제2좌가 참두(參頭)수좌 대신 일러 보아라" 하셨는데 또 대답이 없자 "피차 서로를 바보로 만드는구나" 하셨다.
35.
하루는 신참승 여덟 명이 찾아오자 스님께서 물으셨다.
"일자진(一字陣)이 완벽하게 쳐졌는데 솜씨좋은 장수는 무엇
때문에 진을 나와서 나와 겨뤄보지 않느냐?"
한 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말을 돌이켜 보십시오."
"나는 오늘
말[馬]을 껴안고 깃대를 끌겠다."
"새로 계를 받은 이가 후퇴를 알리는 북을 칩니다."
"말해 보아라"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다시 "말해 보아라" 하셨는데 그 스님이 손뼉을 한번 치자 "그대의 대답에 감사하네" 하셨다.
그 스님이 대답이 없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수가 용맹하지 못하면 화가 삼군(三軍)에 미친다. 우선 앉아서 차나 마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