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5. 6. 10. 20:08

해 제(解題)

 

 설봉 의존(雪峰依存 : 822~908)스님은 장경(長慶) 2년 천주(泉州) 남안현(南安縣)에서 출생하였다. 12세에 포전(莆田) 옥한사(玉澗寺)의 경현(慶玄 또는 慶元)율사에게 출가하였고, 17살에 삭발하였다. 24살에 회창(會昌)의 불교탄압을 만나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서 부용산(芙蓉山)의 홍조(弘照)스님을 찾아갔다. 그후 선종(宣宗)황제가 다시 불법을 일으키자 오(), (), (), ()등을 두루 행각하고 28세에 유주(幽州) 보찰사(寶刹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 이후로도 간절히 공부하여 스승을 찾아 제방을 다녔으니 특히 투자산에 3번 오르고 동산에 9번 올랐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동산 양개(洞山良价)스님의 지시로 덕산선감(德山宣鑑)스님을 찾아 뵙고 깊은 종지를 깨쳤다(40). 그 후 도반이었던 암두(巖頭)스님의 일깨워줌에 그 경지가 더욱 확실해졌다(44).

 스님의 나이 47살이 되어 함통(咸通) 9(868) 영통암(靈洞巖)에 살다가후에 복주(福州)의 상골산(象骨山) 설봉(雪峰)으로 들어와 개원하였고(48), 건부(乾符) 원년(874) ‘응천설봉사(應天雪峰寺)’라는 시호를 받았다. 중화(中和) 2(882)에는 진각대사(瞋覺大師)라는 법명과 자색가사를 하사받았다.

 그 이후로 스님은 양() 태조(太祖) 개평(開平) 2(908) 87세로 입적하기까지 내내 설봉산에 계시면서 많은 법문을 하였고, 만년에는 영은사(靈隱寺), 국청사(國淸寺), 육왕사(育王寺) 등을 돌아보면서도 법문하였다.

 스님의 법문 중에서도 특히 독특한 것은, 어떤 스님이든지 찾아오면 나무공[木毬] 세 개를 굴려서 그들에게 법을 보여 주신 것이다. 또한 원숭이의 고경(古鏡) 이야기(설봉록 下 2. 법어 43편 참조)는 선림고경총서의 서문에ㅔ도 소개된 것이다.

 또한 입적하기에 앞서 손수 탐명과 비문을 지었다.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는 56명이나 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운문 문언(雲門文偃), 현사 사비(玄沙師備), 보복 종전(保福從展), 아호 지부(鵝湖智孚), 동암 가휴(洞巖可休), 초경혜릉(招慶慧凌 또는 長慶慧凌), 고산 신안(鼓山神晏)스님 등이 유명하다. 이 법손에서 결국 운문종과 법안종의 양대종파가 나온 셈이다.

 스님께 귀의한 신도들로서, 특히 민왕 왕심지(王審知)는 불심인(佛心印)에 대한 설법을 듣고 크게 신심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관찰사인 위처빈(韋處濱), 대장군 이경(李景) 또 홍원표(洪元表) 등이 크게 스님을 도왔다.

 설봉록은 크게 3부분, 즉 상 · 하권 및 속집(續集)이 들어있는 부록으로 되어 있다. 상권에는 수행한 인연과 상당법어가 실려 있고, 하권에는 민왕에게 한 설법을 비롯하여 문하(門下)의 스님들에게 행한 법문 및 게송법어, 연보 등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에는 왕수(王隨)가 쓴 복주 설봉산고진각대사어록 서(福州雪峰山故眞覺大師語錄序)’를 비롯하여 후인이 쓴 설봉선사(雪峰禪寺)에 대한 게송 등이 실려 있다.

 이 부록들을 살펴보면, 설봉어록이 처음 간행된 것은 천성(天聖) 임신년(1032)이다. 그 후 약 50여 년이 지난 원풍(元豐) 3(1080) 손각(孫覺)설봉진각대사 광록(雪峰眞覺大師廣錄)을 편집하고 이에 대한 후서(後序)를 썼다.

 설봉스님의 게송 법문은 혜섬(慧蟾)에 의해 별도로 편집되었으며, 또 연보는 만산스님의 발문에 의하면 설봉록이 처음 간행되었을 때는 연보가 작성되지 않았던 것 같다. 왕수의 서문에는 설봉스님의 밀인을 전해받은 제자로 현사(玄沙), 아호(鵝湖), 동암(洞巖), 고산(鼓山), 초경(超慶)의 다섯 스님을 언급하고 있는데, 연보에서는 운문(雲門)스님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 후 원() 지치(至治) 원년(1321) 복성(福城)의 각여 만제(覺如挽濟)거사가 중간(重刊)하였고, 그 후 경송학인(敬松學人)이 다시 중간함에 혜진(慧眞)이 서를 썼다. 다시 명() 성화(成化) 갑진년(1484)과 만력(萬曆) 14(1586)에 각각 중간되었다.

 그 후 숭정(祟禎) 12(1639) 민중(閩中)의 득사거사 임홍연(林弘衍)이 다시 중간하였는데, 일본의 만산화상(卍山和尙)이 여기에다가 자기가 수집한 속집(續集) 1권을 부록으로 붙여서 간행하였다.(1702)

 이렇게 여러 차례 중간된 서문들에서 운문 문언스님에 대한 언급에 큰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운문스님은 설봉스님의 법제자로서 5가종파 중 운문종의 개조이다. 그런데 설봉어록이 처음 간행될 때 왕수(王隨)의 서문에서는 운문스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 후광록에는 설봉스님의 진영(眞影) 속에 12명의 제자가 서 있는데 그 가운데 운문 문언과 현사사비스님이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보에서는 현사 사비, 운문 문언6명의 제자를 말하고 있다. 훗날 지명(智明論)이 쓴 발문(1484)에서는 “(설봉)스님께 승당 입실한 제자는 45분이었는데 그 가운데 운문스님과 현사스님이 상수가 되었다고 하였다. 5가종파의 성립에 대해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법안스님의 종문십규론(宗門十規論)속에서 5가에 대한 유파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설봉록의 서문 속에서 운문스님에 대한 평가에 이처럼 변화가 있는 것은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더구나 설봉록의 본문 중에는 법안스님의 별어(別語)가 실려 있다.

 끝으로 설봉스님의 법계도를 간략히 싣는다.

 

  육조 혜능   -  청원 행사   -  석두 희천   -  천황 도오   -  용담 숭신   -

(六祖慧能)      (靑原行思)       (石頭希遷)     (天皇道悟)       (龍潭崇信)

 

  덕산 선감   -  설봉 의존   -  운문 문언 ……………………▶  운문종

(德山宣鑑)       (雪峰義存)      (雲門文偃)

 

                                      -  현사 사비  _  나한 계침  _  법안 문익 …

                                          (玄沙師備)      (羅漢桂琛)      (法眼文益)

                                           …………………………………▶ 법안종

 

                                      -  아호 지부

                                          (鵝湖智孚)   

 

                                      -  동암 가휴

                                          (洞巖可休)

                  -  암두 전할    

                     (巖頭全奯)   -  고산 신안

                                          (鼓山神晏)

 

                                       -  초경 혜릉

                                           (招慶慧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