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사록 中] 21~24.
21.
하루는 왕대왕(王大王)이 사신을 보내 자채(紫菜)를 스님과 대중에게 올리니 스님께서 이를 듣고 스님들에게 물으셨다.
"이것은 어느 곳의 자채냐?"
법등(法燈)스님이 말하였다.
"이것이 웬 좋은 자채입니까?"
"기틀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는 대신 말씀하셨다.
"대중스님들께 주십시오."
한 스님이 문안을 드리자 스님께서는 향로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그대는 무어라고 부르겠느냐?"
"향로라고 부르진 못합니다."
"그런 도리는 아니다."
그리고는 대신 말씀하셨다.
"화장하는[粧] 향입니다."
하루는 옷소매를 잡고 한 스님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것을 무어라고 부르겠느냐?"
"장삼의 소매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다."
그리고는 대신 말씀하셨다.
"스님일 뿐입니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3세 모든 부처님이 일시에 나타나는 것입니까?"
"나는 고깃배 위의 사씨네 셋째 아들[謝三郞]이니라."
"저는 모르겠습니다."
"난들 또 어찌 알겠나."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해나가야 보고 듣는 데에 집착하지 않겠습니까?"
"그대는 무엇을 보고 듣는다고 하는가?"
"보고 듣는 것 말입니다. 보고 듣는 것."
"이 눈 감고 조는 놈아!"
한 스님이 물었다.
"말이 맞지 않았을 땐 어찌합니까?"
"그대는 무어라고 부르겠느냐?"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을 하면 생사에 매이지 않겠습니까?"
"칠통을 만들라."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안국원[安國院 : 스님은 광화 원년(898)에 왕심지의 명으로 여기 머물렀다]의 가풍입니까?"
"그대의 가풍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본래 남[生]이 없음을 체득함입니까?"
"그대는 이름이 무언가?"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옳지 않겠느냐?"
스님께서 불자를 들고 한 스님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이것을 무어라고 부르겠는가?"
"불자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런 도리는 아니다."
그리고는 대신 말씀하셨다.
"그래도 이쪽 저쪽을 털 뿐입니다."
다시 한 스님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어디 사람이더냐?"
"서천(西川) 사람입니다."
"온갖 고을에서 만리길을 찾아와 무엇 때문에 선 공부를 하지 않느냐."
그리고는 대신 말씀하셨다.
"스님께서는 존체 만복하소서."
22.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큰 도는 텅 비어 항상 스스로 누리는 경계[自受用] 가운데 숨고 항상 자수용 가운데 나타난다. 실낱만큼도 있지 않고 실낱만큼도 없지 않으며 예나 지금에나 응한다. 완전히 나기도 하고 완전히 나지 않기도 하며 완전히 멸하기도 하고 완전히 멸하지 않기도 한다. 어떻게 이해하겠느냐. 보느냐. 스스로 남[生]이기도 하고 스스로 나지 않음이기도 하며, 스스로 멸(滅)이기도 하고 스스로 멸 아니기도 하다.
없는 데서 어떤 이론을 지어내겠으며 어떻게 알아듣겠느냐. 이렇게 보고 알며 설명하고 말한다면 그러할 뿐이니, 얻음 없이 얻으며 가지 않고 간다. 응당 이렇게 해야만 하리라."
그리고는 게송을 지어 말씀하셨다.
말이 오고 말이 가면서 백호광을 누르니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이 여여한 그대로여라
펴고 말아들이는 큰 작용 모두 자재하니
티끌마다 국토마다 향기로움 나타나도다.
言來言去鎭毫光 現前施說只如常
大用券舒皆自在 塵塵刹刹顯芬芳
23.
경두타(勁頭陀 : 惟勁)가 물었다.
"설봉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이 한 뙈기 땅은 일체 중생 모두가 이 은혜를 받는다'라고 하셨는데 설봉스님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그대에게 말해 주었다. 한 뙈기 땅과 꼭같은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팔면서 계약서를 만들고 동서 사방으로 서로 관계되는 약속을 모두 정했으나 한가운데 있는 나무만은 팔지 않았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경두타가 물었다.
"무엇이 한 그루의 나무입니까?"
"그대는 나를 모르고, 나는 그대를 모른다."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분명히 너에게 말했었지. 각자 서로를 모른다고."
"모르다니, 무엇을 모른다는 것입니까?"
"무엇을 모르는지를 모른다."
경두타가 물었다.
"스님께서 설봉에 계시면서 '마치 물이 물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신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대는 물을 아느냐?"
경두타가 물었다.
"종락(從諾)스님이 영운(靈雲)스님에게 묻기를, '무엇이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기 전의 일입니까?' 하니 영운스님은 불자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다시 '무엇이 세간에 출현하신 뒤의 일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영운스님은 역시 불자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는 나뉘어지는 것입니까? 나뉘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무엇이 나뉘지 않음인가?"
"무엇이 나뉨입니까?"
"동서남북."
"무엇이 나뉘지 않음입니까?"
"남북."
"어떻게 체득해 알아야 합니까?"
"체득해 알 필요없다."
"방편으로 스님께서는 말씀해 주십시오."
"그대는 조금 전에 무얼 물었는가?"
24.
상당하여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도는 넓고 텅 비어 정해진 길이 없으니 문 없음이 해탈의 문이며, 마음[意] 없음이 사람의 마음이 된다. 3세에 있지 않으므로 떴다 가라앉았다 할 수 없으니 무엇인가를 세워 진실에 어긋나도 그것은 인위에 속하지 않는다.
움직임은 생사를 일으키는 근본이며, 고요함은 혼침에 빠지는 고향이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모두 끊기면 아무것도 없는 데에 떨어지고, 움직임과 고요함을 둘 다 받아들이면 불성을 더럽힌다. 그러므로 반드시 바깥 경계를 마주함에는 마른 나무, 꺼진 재처럼하고 상황을 맞딱드리면 마땅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는 마치 거울이 모든 형상을 비추되 빛을 어지럽히지 않고, 새가 공중에 날되 하늘을 흩트리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시방에는 그림자의 형상이 없고 3계에는 다니는 종적이 끊겨 오가는 기틀에 떨어지지 않고 중간이라는 생각에도 머물지 않는다.
종 속에는 북소리가 없고 북 속에는 종소리가 없어 종과 북은 서로 만나지 않고 소리마다 전후가 없다. 마치 힘센 장사가 팔을 펴는데 남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것과 같다. 사자가 거님에 어찌 동행을 구하겠는가. 하늘을 가리움이 없는데 어디에 뚫고 통함이 있으랴.
한 줄기 빛은 일찍이 어두운 적이 없었다. 여기에 도달하면 체(體)는 고요하면서도 항상 분명하다. 불타는 해가 안팎이 없듯 원각(圓覺)인 공(空) 가운데서 요동하지 않고, 천지를 삼키고 빛내면서 아득히 비춘다.
부처님이 세간에 나오심도 원래 들고 남이 없으며 이름과 모습도 자체가 없다. 도는 본래 여여하고 원래 천진하므로 닦아서 깨치는 것[修證]과는 같지 않다. 그저 텅 비었으므로 어둡지 않아서 작용을 해도 더러움에 끄달리지 않으니 그 가운데서 가는 털끝만큼이라도 도에 극진하지 못하면 마왕의 권속이 된다.
구절의 앞과 구절의 뒤는 학인에게 어려운 곳이다. 그러므로 한 구절이 하늘에 닿으면 팔만사천의 문에서 생사가 영원히 끊기는 것이다. 비록 가을 연못에 달 그림자처럼, 고요한 밤의 종소리처럼 치는대로 빠짐없이 들리고 물결따라 부딪치되 흩
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생사 언덕의 일이다.
도인이 행하는 경계는 마치 불이 얼음을 녹이면 다시는 얼음이 되지 않으며,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면 되돌아올 기세가 없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견고한 새장에도 안주하려 하지 않고 불러도 머리를 돌리지 않는 것이니, 옛 성인은 자리를 정하지
않고 지금까지 처소가 없다.
여기에 이르면 걸음마다 현묘함에 올라 삿되고 바름에 속하지 않으므로 식(識)으로도 알지 못하고 지(知)로도 알지 못하며 움직였다 하면 바로 실마리를 잃고 깨달았다 하면 종지에 미혹한다. 성문연각은 간담이 떨리고 10지보살은 혼백이 놀라, 말길이 끊기고 마음 작용이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당장 석가가 마갈타국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유마거사가 비야리성에서 입을 다물며, 수보리가 무(無)를 연설하여 도를 나타내자 제석범천이 청법을 끊고 꽃비를 내린다. 이러한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면 어떤 일도 의심하지 않으니 깃들어 머물 곳이 없고 과거 · 미래 · 현재를 떠났고 한계지울 수 없어 마음으로 헤아릴 길이 끊겼다. 장엄을 의지하지 않고도 본래 진실하고 고요하며 움직이고 말하고 웃음에 어디든 명료하여 아무 부족함이 없다.
요즈음 사람들은 이런 도리를 깨닫지 못하고 망령되어 스스로 사물과 경계에 끄달려 곳곳에서 물들고 무엇에든 얽매인다. 설사 깨달았다 해도 티끌 경계가 어지럽고 명칭과 모습이 실답지 못하다. 그리하여 마음을 모아 사념을 거둬들이고 사물을 거두어 공으로 귀결시키려 한다. 눈을 꽉 감고 있다가 결국 사념이 일어났다 하면 재빨리 깨뜨려 없애고 미세한 생각이라도 일어나면 막아 눌러버린다. 이러한 견해는 아무것도 없는 데 떨어진 외도이며 혼백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이다. 아득하고
막막하여 느낌도 인식도 없이 자기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격으로 부질없이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
여기에서 분별해 보면 그렇지 않으니 외진 구석 문에 기댄 것이 아니라 구절마다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헤아릴 수도 없고 문자와도 상관없다. 본래 티끌경계가 끊겼으며 본래 지위와 차례가 없다. 임시 방편으로 출가한 사람이라 이름하나 결국에는 자취가 없다. 진여 · 범부 · 성인 · 지옥 · 인간 · 천상이 자식을 치료하는 처방일 뿐이다. 허공도 변함이 없는데 큰 도에 어찌 떴다 가라앉았다 함이 있으랴. 깨달았다 하면 자유자재하면서 본래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여기에 이르면 범부 · 성인도 설 곳이 없으니 말 속에서 생각을 지어내면 학인을 물에 빠뜨리는 것이며, 밖으로 치달려 구하면 다시 마군의 경계에 떨어진다.
여여한 향상(向上)의 경계는 어디에도 둘 수 없으니 흡사 불꽃이 타오르는 화로에 모기를 둘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이 이치는 본래 평탄한데 어찌 깎아 없앰이 필요하겠는가. 눈썹을 움직이며 날림이 진실한 해탈의 도이니 억지로 헤아리고 만들어서 진(眞)에 어긋나서는 안된다.
여기에 도달하면 가는 털끝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마음[意]을 두었다 하면 어긋나니 천 분 성인이 나온다 해도 한 글자도 어찌해 보지 못한다. 오래 서 있었으니 몸조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