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록 上] 3. 법어 3~7.
3. 무제거사 장해원사(無際居士 張海院使)에게 주는 글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조주스님은 "없다" 하셨습니다.
그 없다란 말은 있고 없다는 없음도 아니며 참으로 없다는 없음도 아니니, 그렇다면 결국 무엇이라 해야겠습니까? 그 경지에 이르러서는 곧 온 몸을 모두 놓아 버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야 하며, 하지 않는다는 그 생각도 하지 않으면 바로 고요하고 텅 빈곳에 이를 것이니, 부디 헤아려 생각하지 마십시오.
앞 생각은 사라지고 뒷 생각은 일어나지 않으며, 지금 그 생각도 비고 비었다는 생각도 붙들지 않으며, 붙들지 않았다는 것도 잊고 잊었다는 생각도 두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때에는 다만 또록또록하고 고요한 영광(靈光)이 앞에 우뚝 나타날 것입니다.
부디 망령되이 알음알이[知解]를 내지 말고 다만 화두를 들되, 스물 네 시간 무엇을 하든지간에 분명하여 어둡지 않고 간절히 참구하십시오. 이렇게 참구하면서 계속해 나가다가 알맞은 때가 오거든 조주스님께서 '없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 하고 자세히 돌이켜보되, 늙은 쥐가 쇠뿔에 들어가서는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하는 것처럼 되면 ,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은 여기에 이르러 활연히 칠통(漆桶)을 쳐부시고는 조주스님을 넘어뜨리고 천하 사람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깨쳤더라도 부디 지혜없는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고 모름지기 진짜 종사(宗師)를 찾아뵈어야 합니다.
4. 최진사(崔進士)에게 주는 글
공(公)은 스스로 "무엇이 부모가 낳아주기 전의 본래면목인가?" 하고 물어 보십시오. 그 한마디에 깨치면 그만이거니와 그렇지 못하거든, 다니거나 섰거나 앉거나 누울 때나 스물 네 시간을 마음마음이 어둡지 않고 생각생각 계속해야 합니다. 닭이 알을 품 듯, 고양이가 쥐를 노리듯 바로 그렇게 하면 사흘이나 이레 안에는 반드시 그에 응분하는 경지가 생길 것이니, 그 길이 바로 공께서 빨리 깨닫는 단서가 될 것입니다.
그 방법을 말한다면, 공은 "4대로 된 내 몸뚱이는 부모가 낳아준 것으로서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 무엇이 부모가 낳아주기 전의 본래면목인가?" 하고 생각하되, 부디 참구하여 어둡지 않게 하십시오. 이렇게 끊일 틈 없이 하면 공부가 저절로 순순히 익어지고 몸과 마음이 맑고 상쾌해져, 마치 싸늘한 가을 하늘의 기운과 같게 될 것입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은 활연히 크게 깨쳐, 물을 마시는 사람이 차고 따뜻함을 저절로 아는 것과 같아서, 다만 맑고 분명하여 긍정할 뿐입니다. 그때에는 비로소 의지할 곳 없는 바탕을 비추어 본래의 사람을 보았다고 비로소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사제(思齊)거사에게 주는 글
덧없음이 빠르다는 것과 생사가 큰 일인 줄을 알고 특히 와서 묻되 "이것이 참으로 대장부의 할 일입니까" 하니, 그러면 그렇게 덧없음과 생사를 아는 그것은 누구이며 특히 와서 묻는 그것은 누구입니까? 거사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고칙(古則)에 "얼굴은 매우 기묘하고 광명은 시방을 비춘다. 나는 일찍이 공양을 하였는데 지금 다시 친견하도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네 글 귀에 대해서 마음[心意識]으로 가만히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가지고 가만히 생각하면 더욱 서먹해지고 더욱 멀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활구(活句)를 참구하는 것만 못합니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조주스님은 "없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없다란 말은 있고 없다는 없음도 아니며 참으로 없다는 없음도 아니니,
그렇다면 말해 보십시오. 그것은 결국 어떤 도리인가. 만일 화두를 듣자마자 곧 알면 그만이거니와 의심을 깨뜨리지 못하면 그저 의심이 깨어지지 않는 그 곳에서 다만 '없다'라는 화두를 참구하되, 스물 네 시간 무엇을 하든지간에 언제나 어둡지 않고 그저 그렇게 참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완전히 깨치면 조주스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진짜 종사를 찾아뵈어야 할 것입니다. 어허!
6. 염정당 흥방(廉政堂 興邦)에게 주는 글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조주스님은 "없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없다는 말은 있고 없다는 없음도 아니며 참으로 없다는 없음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결국 무슨 도리이겠습니까? 이 의심이 있을 때에 간절히 참구하면
저절로 아무 것도 모르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는 참으로 좋은 곳이니 근기가 날카로운 사람은 거기에서 활연히 크게 깨칠 것입니다. 큰 의심을 깨뜨리지 못 하더라도 부디 '이럴까 저럴까' 하는 생각이나 깨쳐야겠다는 마음을 내지 마십시오. 그저 의심을 가지고 화두를 들어 간절히 참구하십시오.
그리하여 모든 생활에서 조금도 어둡지 않고, 하루나 이틀, 내지 이레동안 법대로 참구하여 끊기는 틈이 없으며, 꿈속에서도 화두를 들게 되면 크게 깨칠 때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의심을 깨뜨리면 물을 마시는 사람이 차고 따뜻함을
저절로 아는 것 같아서, 남에게 보일 수도 없고 남에게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에는 모름지기 진짜종사를 찾아뵙고, 지혜없는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힘 쓰고 힘 쓰십시오.
당신이 청하는 마음이 간절하였기 때문에 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다시 노래[詞]를 짓습니다.
조주스님이 없다고 말한 뜻
부디 간절하게 참구할 것이니
아무 것도 모르는 곳까지 참구해 가면
그것은 그대로 드러나니라.
趙州道無意 正好切參看
參到百不會 便是露團團
의심 다하고 생각 없는 곳
조주스님 그 얼굴 어떠한고
만약 딴 생각을 낸다면
눈앞의 촉도(蜀道)* 험난하리.
疑盡情忘處 趙州是何顔
苦也別生念 面前蜀道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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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촉도(蜀道) : 중국 사천성(四川省)으로 통하는 험한 길
7. 낙암(樂庵)거사에게 염불의 요점에 대해 주는 글
아미타불은 범어로서 한문으로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하고, 불(佛)도 범어로서 한문으로는 각(覺)이라 합니다. 사람마다 본성에 있는 큰 영각(靈覺)은 본래 생사가 없고 예나 지금이나 신령하고 밝으며, 깨끗하고 묘하며 안락하고 자재하니, 이것이 어찌 무량수불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마음을 밝힌 이를 부처[佛]라 하고 이 마음을 설명한 것을 교(敎)라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대장교는 사람들 스스로가 성품을 깨닫도록 지적해 보이신 방편이다. 방편이 많지마는 요점을 말하면, 마음이 바로 정토[唯心淨土]라는 것과 자기 성품이 아미타불[自性彌陀]이라는 것으로서, 마음이 깨끗하면 불토(佛土)가 깨끗하고 본성이 나타나면 불신(佛身)이 나타난다" 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깨끗하고 묘한 법신(法身)은 일체 중생들의 마음에 두루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 하였고, 또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마음이다.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다" 하였습니다. 만일 상공(相公)이 진실로 염불하려면, 그저 자성미타를 그대로 생각하되, 스물 네 시간 무엇을 하든지간에 아미타불의 이름을 마음 속과 눈앞에 두어야 합니다. 마음과 눈과 부처님의 이름을 한 덩이로 만들어 마음마음에 계속하고 생각생각에 어둡지 않게 하며, 때로는 '생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자세히 돌이켜보아 오랫동안 계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갑지기 생각이 끊어지고 아미타불의 참몸이 앞에 우뚝 나타날 것이니, 그때야 비로소 '본래부터 움직이지 않는 것을 부처라 한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