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서(序)
행촌공(杏村空 : 李嵒. 고려말의 문신, 문하시중)이 나옹스님에 관한 기록을 내게 보이면서, 나옹스님은 연도(燕都)에 가서 유학하고 또 강남(江南)으로 들어가 지공(指空)스님과 평산(平山)스님을 찾아뵙고 공부하고는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받는 등, 오랫동안 불법에 힘써 왔다고 하였다.
원제(元帝)는 더욱 칭찬하고 격려하며 광제선사(廣濟禪寺)에 머물게 하고, 금란가사(金聆袈裟)와 불자를 내려 그의 법을 크게 드날렸으며, 또 평소에도 스님의 게송을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 주었다고 한다.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산수(山水) 속에 자취를 감추었는데, 왕이 스님의 이름을 듣고 사자를 보내 와주십사 하여 만나보고는 공경하여 신광사(神光寺)에 머무시게 하였다. 나는 가서 뵈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던 차에, 하루는 스님의 문도가 스님의 어록을 가지고 와서 내게 서문을 청하였다.
그때 나는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는 법이오. 나는 유학(儒學)하는 사람이라 불교를 모르는데 어찌 서문을쓰겠소"라고 하였다. 그러나 옛날 증자고(曾子固)는 "글로써 불교를 도우면 반드시 비방이 따른다. 그러나 아는 사이에는 거절할수가 없다" 하였다.
지금 스님의 어록을 보니 거기에 '부처란 한 줄기 풀이니, 풀이 바로 장육신(丈六身 : 佛身)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면 부처님 은혜를 갚기에 족하다.
나도 스님에 대해 말한다.
나기 전의 면목을 이미 보았다면 한결같이 향상(向上)해 갈 것이지 무엇하러 오늘날 사람들에게 글을 보이는가. 기어코 한 덩이 화기(和氣)를 얻고자 하는가. 그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나도 이로써 은혜 갚았다고 생각하는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님은 지난날 지공스님과 평산스님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지공스님과 평산스님도 각각 글을 써서 법을 보였다.
소암 우공(邵艤虞公)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천지가 하나로 순수히 융합하니
한가한 몸이 온종일 한결같다
왔다갔다하다가 어디서 머물까
서른 여섯의 봄 궁전이다.
地天一醇融 閑身盡日同
往來何所止 三十六春宮
대개 이치에는 상(象)이 있고 상에는 수(數)가 있는데, 36은 바로 천지의 수다. 천지가 합하고 만물이 자라는 것이 다 봄바람의 화기에 있듯이, 이른바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달라진다는 것도 다 이 마음이 움직일 수 있고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나옹스님의 한마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부디 지공스님이나 평산스님의 전하지 않은 이치를 전해 받아 자기의 법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정(至正) 23년(1363) 가을 7월 어느날,
충겸찬화공신 중대광문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치사 직산담암 백문보 화보(忠謙贊化功臣重大匡門下贊成事進賢舘大提學知春秋舘事致仕稷山淡菴白文寶和父)는 삼가 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