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송] 2.송 1
2. 송(訟)
산거(山居)
바루 하나, 물병 하나, 가느다란 주장자 하나
깊은 산에 홀로 숨어 마음대로 살아가네
광주리 들고 고사리 캐어 뿌리채로 삶나니
누더기로 머리 싸는 것 나는 아직 서툴다
내게는 진공(眞空)의 일없는 선정이 있어
바위 틈에서 돌에 기대어 잠만 자노라
무슨 대단한 일이 있느냐고 누군가 불쑥 묻는다면
헤진 옷 한 벌로 백년을 지낸다 하리라
한종일 소나무 창에는 세상 시끄러움 없고
돌 수곽에는 언제나 시냇물이 맑다
다리 부러진 솥 안에는 맛난 것 풍족하니
무엇하러 명리와 영화를 구하랴
흰 구름 쌓인 속에 세 칸 초막이 있어
앉고 눕고 거닐기에 스스로 한가하네
차가운 시냇물은 반야를 이야기하는데
맑은 바람은 달과 어울려 온몸에 차갑네
그윽한 바위에 고요히 앉아 헛된 명예 끊었고
돌병풍을 의지하여 세상 인정 버렸다
꽃과 잎은 뜰에 가득한데 사람은 오지 않고
때때로 온갖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들리네
깊은 산이라 온종일 오는 사람은 없고
혼자 초막에 앉아 만사를 쉬었노라
석 자 되는 사립문을 반쯤 밀어 닫아두고
피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으며 한가로이 지내노라
나는 산에 살고부터 산이 싫지 않나니
가시 사립과 띠풀 집이 세상살이와 다르다
맑은 바람은 달과 어울려 추녀 끝에 떨치는데
시냇물은 가슴을 뚫고 서늘하게 담(膽)을 씻어내는구나
일없이 걸어나가 시냇가에 다다르면
차갑게 흐르는 물 선정을 연설하네
물건마다 인연마다 진체(眞體)를 나타내니
공겁(空劫)이 생기기 전의 일을 말해서 무엇하리
환암장로(幻庵長老)의 산거(山居)에 부침 · 4수
1.
온갖 경계 그윽하고 조도(鳥道)는 평탄하여
마음에 걸리는 일, 한 가지도 없네
이 몸 밖에 다른 물건은 없고
앞산 가득 구름이요 병에 가득 물이로다
2.
자취 숨기고 이름을 감춘 한 야인(野人)이거니
한가로이 되는대로 세상 번뇌 끊었다
아침에는 묽은 죽, 재할 때는 나물밥
좌선하고 거닐면서 천진(天眞)에 맡겨두네
3.
몇 조각 구름은 경상(脛滅)을 지나가고
한 줄기 샘물은 평상 머리에 떨어지는데
취한 눈으로 꽃을 보는 사람 수없이 많건만
누가 즐겨 여기 와서 반나절을 함께 쉬랴
4.
외로운 암자 바깥에는 우거진 숲 고요한데
백납(百衲)의 가슴 속에는 모든 생각 비었으니
마음 내키면 시냇물가에 나가 앉아
물결 속에 노니는 물고기를 구경하네
산에 놀다[遊山]
가을 깊어 지팡이 짚고 산에 이르니
바위 곁의 단풍은 이미 가득 붉었구나
조사가 서쪽에서 온 분명한 뜻을
일마다 물건마다 스스로 먼저 일러주네
달밤에 적선지(積善池)에 놀다
발길 닿는대로 한밤중에 여기 와서 노나니
이 가운데 참맛을 그 누가 알리
경계는 비고 마음은 고요하여 온몸이 산뜻한데
바람은 못에 가득 차고 달은 시내에 그득하다
양도암(養道菴)에서
지팡이로 구름을 뚫고 이 산에 올랐더니
그 가운데 암자 하나 가장 맑고 고요하다
암자의 사면에는 봉우리들이 빼어났고
소나무 · 잣나무 사이의 맑은 샘물은 뼛속까지 차구나
안심사(安心寺)에서
갑자기 안심사에 와서 이삼 일 동안
몸과 마음을 쉬고 양주(襄州)로 향하니
도인의 자취를 뉘라서 찾을 수 있으랴
동해의 바위 곁에서 마음대로 노닌다
늦가을에
한 줄기 가을바람 뜰안을 쓰는데
만 리에 구름 없어 푸른 하늘 드러났다
선뜻선뜻 상쾌한 기운에 사람들 기뻐하는데
눈빛이 차츰 맑아져 기러기 줄지어 날아간다
밝고 밝은 보배 달빛은 가늠하기 어렵고
역력한 보배 산들은 세어도 끝이 없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제자리에서 편안하나니
추녀 끝에 가득한 가을빛은 청홍(靑紅)이 반반이다
죽순(竹筍)
하늘 기운 뜨거운 한여름철에
처음 돋는 죽순은 본래 티끌을 떠났다
용의 허리가 갑옷을 벗어 감추가 끝났는데
봉의 부리는 털을 헤치고 제몸을 그대로 드러낸다
푸른 잎에 빗소리는 묘한 이치 말하고
파릇한 가지에 바람소리는 깊은 진리 연설한다
여기서 갑지기 영산(靈山)의 일을 기억하나니
잎새마다 풀잎마다 새롭고도 새로워라
새로 지은 누대[新臺]
새로 지은 높은 누대, 그 한 몸은 우뚝하나
고요하고 잠잠하여 도에서 멀지 않다
멀리 바라보이는 뭇산들은 모두 이리로 향해 오는데
가까이 보면 많은 숲들은 가지 늘이고 돌아온다
독한 짐승들 바라보고 마음으로 항복하고
자주 오는 한가한 새들은 구태여 부를 것 없네
만물은 원래부터 이미 성숙했거니
어찌 그리 쉽사리 공부를 잃게 하랴
만 겹의 산 속은 고요하고 잠잠한데
오똑이 앉아 구름과 솔에 만사를 쉬었노라
납자들은 한가하면 여기 와서 구경하고
속인들은 길 없으면 여기 와서 노닌다
누대 앞뒤에는 시원한 바람 불고
산 북쪽과 남쪽에는 푸른 물이 흐른다
뼛속까지 맑고 시원해 선미(禪味)가 족하거니
한여름 떠나지 않고 어느 새 가을이네
단비
가물 때 단비 만나면 누가 기쁘지 않으랴
천하의 창생(蒼生)들이 때와 티끌 씻는다
모든 풀은 눈썹 열고 빗방울에 춤추며
온갖 꽃은 입을 벌리고 구슬과 함께 새롭다
삿갓 쓴 농부들은 그 손길이 바쁘고
도롱이 입고 나물캐는 여인네는 몸놀림이 재빠르다
늘상 있는 이런 일들을 보노라면
일마다 물건마다 모두 다 참되도다
진헐대(眞歇臺)
진헐대 안의 경치가 어떠한가
온갖 봉우리들 모두 이리로 향해 오고
누대 앞뒤에는 맑은 바람 떨치는데
그늘이 엷거나 짙거나 하루종일 한가하네
스님네는 쌍쌍이 왔다 또 가고
새들은 짝을 지어 갔다 돌아오는데
그윽한 바위에 고요히 앉았으면 걸림없이 트이나니
물색과 산 빛은 서늘하게 담을 씻어내도다
한가한 때 감회를 읊다
40년 전에 두루 돌아다니면서
천태(天台)와 남악(南嶽)에 자취를 남겼거니
지금에 차갑게 앉아 생각해 보면
천하의 총림들이 두 눈에 텅 비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