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인천보감人天寶鑑

16. 몹쓸 병으로 죄값을 치르다 / 기(頎)선사

쪽빛마루 2015. 7. 20. 07:49

16. 몹쓸 병으로 죄값을 치르다 / 기(頎)선사


기(頎)선사는 진주(秦州) 용성(龍城) 사람이다. 처음 천성사(天聖寺) 호태(晧泰)선사에게서 법을 얻고 만년에 황룡 혜남(黃龍慧南)선사에게 귀의하였는데, 혜남선사는 스님이 바르고 투철하게 깨달았음을 보고 몹시 후대하여 전주(全州) 흥국사(興國寺)에 주지하게 하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개당하여 마침내 혜남스님의 법을 이었는데, 어느 날 밤 꿈에 산신이 나타나 말하였다.

 "스님이 몹쓸 병을 만나면 이곳 인연은 다하는 것입니다."

 말이 끝나자 산신은 숨어버렸다. 30년이 지난 뒤에 과연 문둥병이 걸려서 일을 그만두고 용성의 서쪽에 돌아와 작은 암자를 짓고 거기서 요양하였다.

 스님에게 극자(克慈)라는 한 제자가 있었다. 오랫동안 양기 방회(楊岐方會)스님에게 귀의하였고, 선림에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돌아와 정성으로 간호하였는데, 비바람과 추위, 더위에도 불구하고 스님께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마을에서 걸식을 해와 봉양하였다. 하루는 스님이 극자스님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성사 호태스님에게 도를 얻었는데 만년에 황룡스님을 뵙고는 도(道)와 행(行)이 겸비함을 마음 속으로 존경하여 법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반평생 이런 몹쓸 병에 걸릴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나. 그러나 지금은 다행히 그 죄값을 다 갚았다. 옛날 신선들은 흔히 몹쓸 병으로 신선도를 얻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티끌세상의 얽매임을 잘라버리고 허유(許由)와 소부(巢父)*의 풍모를 마음에 품었기에 전화위복이 된 것이 아니겠느냐. 나도 이 몹쓸 병에 걸리지 않았으면 어찌 오늘이 있겠느냐. 이제는 머뭄도 떠남도 내게 달려 있어 머물고 떠남에 모두 자유롭게 되었다."

 마침내 큰 기침을 한번 하고 묵묵히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화장을 하니 신비한 향기가 들판에 가득하고 사리가 수없이 나왔다. 「주봉록 (舟峯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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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유와 소부 : 요(堯) 임금이 허유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하니, 허유는 더럽다하여 거절하고 영수(潁水)의 양지쪽에 있는 소부를 찾아가 그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소부는 귀가 더럽혀졌다 하여 물가에 가서 귀를 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