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인천보감人天寶鑑

17. 석란문(繹難文) / 희안(希顔)수좌

쪽빛마루 2015. 7. 20. 07:50

17. 석란문(繹難文) / 희안(希顔)수좌


희안(希顔)수좌는 자(字)가 성도(聖徒)이며 강직하고 과감한 성격이었다. 불법은 물

론 다른 학문까지도 통달하였으며 품격과 절도로 스스로를 지켰다. 행각을 마치고 옛 초막에 돌아와 숨어 살면서 세속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항상 문 닫고 좌선만 하니, 수행이 고결한 사람이 아니면 스님과 벗할 수 없었다. 명공귀인들이 여러 차례 몇몇 절에 주지로 모시려 했으나 굳이 거절하였다.

 당시 참이(參已)라는 행자가 있었는데, 승려가 되고자 하여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가 승려 될 그릇이 못됨을 알고 '석란문(繹難文)'이라는 글을 지어 물리쳤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들을 아는 데는 아비만한 사람이 없고, 아비를 아는 데는 아들만한 사람이 없다. 내가 보건대 참이(參已)는 승려 될 그릇이 아니다. 출가해서 승려가 된다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편안함과 배부르고 따뜻함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달팽이 뿔* 같은 하잘것없는 명리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생사를 해결하는 길이고 중생을 위하는 길이며, 번뇌를 끊고 3계 바다를 벗어나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기 위한 것이다. 성인의 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불법이 크게 허물어졌는데, 네가 감히 함부로 이런 일을 하겠다는 것이냐?

 「보량경(寶梁經)」에 말하기를 "비구가 비구법을 닦지 않으면 대천세계에 침 뱉을 곳이 없다" 하였고, 「통혜록(通慧錄)」에도 "승려가 되어 10과(十科)*에 들지 못하면 부처님을 섬겨도 백년 헛수고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래서 어렵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도 외람되게 승려의 대열에 끼어 불도에 누를 끼치고 있는데 하물며 네가 하겠다는 것이냐?

 출가해서 승려가 되어 3승 12분교와 주공 공자(周公孔子)의 도를 모른다면, 그는 인과에도 어두울 뿐더러 자기 성품도 알지 못한 사람이다. 농사 짓는 수고도 모르고, 신도들의 시주를 받기 어려운 줄을 생각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함부로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재계(齋戒)를 파하고 범하여 장사를 차리고 앉아 부처를 팔아먹는다. 도둑질, 간음, 노름으로 절집을 떠들썩하게 하고 큰수레를 타고 드나들면서 자기 한 몸만을 아낄 뿐이니, 슬픈 일이다. 여섯자 몸뚱아리는 있어도 지혜가 없는 이를 부처님께서는 바보중이라 하셨다. 세치 혀는 있어도 설법하지 못하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벙어리 염소중이라 하셨다. 또한 승려 같으나 승려도 아니고 속인 같으면서 속인도 아닌 사람을 박쥐중, 또는 민머리 거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능엄경 (楞嚴經) 」에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도적이 내 옷을 빌려 입고 여래를 마구 팔아 온갖 죄업을 짓는가" 하였으니, 이런 이들은 세상을 제도하는 나룻배가 아니라 지

옥의 씨앗으로서 설사 미륵이 하생할 때가 되어 머리를 내밀고 나올 수 있다 해도 몸은 이미 소우리 안에 빠져 온갖 형벌의 아픔이 하루아침 하룻저녁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지금 이런 자들이 백천, 혹은 만이나 되는데, 겉으로 승려의 옷만 걸쳤을 뿐, 그 속을 까놓고 말해보면 승려라 할 수 없다. 그것이 소위 솔개의 날개를 달고 봉 울음을 운다 하는 것이다. 이들은 길에 굴러다니는 돌이지 옥(玉)은 아니며, 풀 무더기 속에 우거진 쑥대지 설산(雪山)의 인초(忍草)는 아니다.

 나라에서 승려에게 도첩(度牒)을 주는 것은 본래 복을 빌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부역 면제 받는 것을 따지면서 승려에게 평민이 되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 승려들에게 심한 푸대접을 하고 있다.

 오직 지난날 육왕 회련(育王懷璉),* 영안 설숭(永安契嵩),* 용정 원정(龍井元淨), 영지 원조(靈芝元照)* 같은 분은 한 마리 여우털처럼 빛나는 보배라 할 수 있겠지만, 나머지 양가죽 같은 보잘것없는 자들이야 말할 가치가 있겠는가. 아! 불법의 바다가 오늘날처럼 더럽혀진 적은 없었다. 이런 말도 지혜로운 이와 할 수 있을 뿐, 속인들과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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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팽이 뿔 : 장자(莊子)에 나오는 우화. 달팽이 뿔 위에서 만씨국(蠻氏國)과 촉씨국(觸氏國)이 다투어 수만의 희생자가 생겼다는 이야기로서, 보잘 것 없는 명리나 소유욕을 두고 다툼을 비유한 말이다.

* 십과 : 번역(飜譯) · 해의(解義) · 명률(明律) · 감통(感通) · 유신(遺身) · 독송(讀誦) · 호법(護法) · 흥복(興福) · 잡과(雜科).

* 육왕 회련(1009~1090) : 운문종 늑담스님의 법제자. 인종(仁宗)황제의 존경을 받아 왕에게 불법을 설하고 대각(大覺)이라는 호를 받았다.

* 영안 설숭(1007~1072) : 운문종 효총스님의 법제자. 「보교편(輔敎編)」을 저술하여 선문(禪門)의 계통을 밝혔고, 「원교론(原敎論)」을 지어 유불일치(儒佛一致)를 주장하면서 한퇴지의 배불론을 반박하였다.

* 영지 원조(1048~1116) : 율(律)과 천태교관을 배워 강론하면서 여러 종파의 학문을 두루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