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인천보감人天寶鑑

105. 황룡 심(心)선사의 행적

쪽빛마루 2015. 7. 21. 07:03

105. 황룡 심(心)선사의 행적


황룡 심(黃龍祖心 : 晦堂祖心, 1025~1100)선사는 남웅(南雄)사람이다. 유생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열아홉살에 눈이 멀어 부모가 출가를 허락하자 홀연히 다시 보게 되었다. 행각하면서 남(黃龍慧南)선사를 찾아뵈었는데 비록 이 일을 깊이 믿기는 하였으나 깨닫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하직을 하고 운봉(雲峯文悅)선사의 회하에 갔는데 운봉선사가 세상을 떠나자 석상(石霜楚圓)선사에게 가서 머물렀다. 거기서 전등록(傳燈錄)을 보다가 한 스님이 다복(多福)선사에게 묻는 것을 읽었다.

 

 "무엇이 다복의 한 줄기 대(竹)입니까?"

 "한두 줄기는 비스듬하다."

 "잘 모르겠습니다."

 "서너 줄기는 굽었다."

 

 선사는 이 대목에서 문득 두 분 선사의 면목을 보게 되었다.

 그 길로 혜남선사에게 돌아와 제자의 예를 올리고는 좌구를 펴고 앉자 혜남선사가 "그대는 내 방에 들어왔다"라고 하였다. 선사도 역시 뛸 듯이 기뻐하면서 응수하였다. "큰 일이란 본래 이런 것인데 스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화두를 들게 하십니까?"

 "만일 네가 깊이 참구해서 마음 쓸 곳 없는 경지까지 가게 하고, 거기서 스스로 보고 스스로 긍정하도록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너를 매몰시키는 것이다."

 마침 혜남선사가 입적하자 스님들과 신도들이 선사에게 그 뒤를 이어달라고 청하였고, 사방에서 귀의하여 혜남선사가 있을 때 못지 않았다. 그러나 선사는 진솔함을 숭상해서 일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이나 그만두겠다고 해서 마침내 주지를 그만두게 되었다. 얼마 안돼서 사사직(謝師直)이 담주(潭州) 태수가 되어 대위산(大潙山)에 주지자리가 비었다고 선사를 초청하였다. 선사가 세 번이나 사양하자 또 강서(江西)의 전운사(轉運使)인 팽기자(彭器資)에게 부탁해서 장사사(長沙寺)를 마다하는 이유를 알려달라고 청하니 선사가 말하였다.

 "마조나 백장스님 전에는 주지란 것이 없었고, 도인들은 서로 고요하고 한가한 곳을 찾아 다녔을 뿐이다. 그 후에도 비록 주지란 제도가 있었으나 왕처럼 존경을 받아 인간과 하늘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이름을 관가에 걸어 놓고 바로 심부름꾼을 보내 오라가라 하니 이 어찌 다시 할 짓이겠는가."

 팽기자가 그대로 전하자 사사직은 다시 편지를 보내 "한번 만나보고자 할 뿐 감히 주지 일로 서로를 궁색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선사는 사방의 공경대부와 사귀는 데 있어서 뜻이 맞으면 천 리라도 가지만 뜻이 맞지 않으면 수십 리밖에 안되는 곳도 가지 않았다. 선사는 불전(佛典)뿐 아니라 다른 책들을 가지고도 자세히 따져가면서 법문하여, 저마다 공부해 온 것을 바탕으로 욕심을 극복하고 스스로 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깨닫게 되면 같은 길로 돌아오게 하고, 돌아오면 가르칠 것이 없었다. 이 일로 제방에서는 다른 책과 불전을 뒤섞어서는 안된다고 비난하니 선사가 말하였다.

 "견성을 못하면 불조의 비밀한 말씀도 모조리 바깥 책이 되고, 견성을 하면 마구니 설이나 여우 선[狐禪]도 불조의 비밀한 말씀이 된다."

 이런 까닭에 40년 동안 그의 도풍을 듣고 깨달은 사대부가 많다. 황정견(黃庭堅 : 1045~1105)은 오래 전부터 수기를 받은 일로 큰 법을 맡아볼 만한 사람이었으나 안목이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그는 선사의 탑을 찾아와 보고서는 크게 우러러보는 마음으로 깊은 탄식을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단단한 옥돌에 글을 새겨 선사가 남기신 아름다운 자취를 공경히 송하였다. 「탑명(塔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