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인천보감人天寶鑑

122. 종경록(宗鏡錄) / 영명 연수(永明延壽困)선사 <終>

쪽빛마루 2015. 7. 21. 07:15

122. 종경록(宗鏡錄) / 영명 연수(永明延壽) 선사


영명 연수(永明延壽 : 904~976, 법안종)선사의 조상은 단양(丹陽)사람이다. 그의 아버지가 전란에 휘말려서 오월(吳越)에 귀순하여 선봉이 되었다가 마침내 전당(錢塘)에 살게 되었다. 선사는 태어날 때부터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돌이 되었을 때 부모가 말다툼을 하여 사람들이 말려도 듣지 않자, 선사가 높은 책상에서 바닥으로 몸을 던지니 양친이 놀라서 안고 울며 말다툼을 그만두었다.

 커서는 유생이 되었는데 34세에 용책사(龍冊寺)로 가서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고행하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하루 한 끼 먹으면서 아침에는 대중들에게 공양하고 저녁이면 선을 익혔다. 이어 태주(台州) 천주봉(天柱峯)에 가서 90일 동안 선정을 익혔는데 종달새가 옷에다가 둥지를 쳤다.

 천태 덕소(天台德韶)국사를 뵈오니, 국사는 한번에 그가 큰 그릇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가만히 깊은 종지를 전해주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원(元)선사와 인연이 있으니 뒷날 불사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처음에는 명주(明州) 자성사(資聖寺)에 주지하다가 건륭(建隆) 원년(960)에 오월(吳

越) 충의왕(忠懿王)의 청으로 영은(靈隱)의 새로 지은 절에 머무니 그 절의 첫번째 주지가 되었다. 다음해에 청을 받아 영명사(永明寺) 도량에 주지하니 대중이 2천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모두 두타행을 잘 닦아 승려가 되려는 사람들이었는데 선사는 왕에게 아뢰어 도첩을 받게 하고 삭발하고 먹물옷을 입혀 주었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영명의 종지입니까?"

 "영명의 종지를 알고 싶은가. 서호(西湖)의 물이니, 해가 뜨면 빛이 나고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인다."

 또 한 스님이 물었다.

 "제가 오랫동안 영명도량에 있었으나 어찌하여 영명의 가풍을 알지 못합니까?"

 "알지 못하는 곳을 알아라."

 "알지 못하는 곳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소의 뱃속에서 코끼리 새끼가 태어나고 푸른 바다에 티끌 먼지가 일어난다."

 개보(開寶) 7년(974)에 주지를 그만두고 화정봉(華頂峯)으로 돌아가면서 송을 지었다.

 

목마르면 물 반국자 떠 마시고

배고프면 솔잎 한 입 따 먹으며

가슴속에는 한가지 일도 없어

높이 백운봉에 누웠노라.

渴飮半掬水  飢飡一口松

胸中無一事  高卧白雲峯

 

 우연히 「화엄경」을 읽다가 "만일 보살이 큰 원력을 내지 않으면 그것은 보살의 마장[魔事]이다" 한 대목에서 마침내 「대승비지원문(大乘悲智願文)」을 지어 미혹한 뭇중생들을 대신해서 날마다 한 번씩 발원하였다. 국청사(國淸寺)에서 참회법을 닦고 있을 때, 밤중에 절을 돌아보다가 보현보살상 앞에 공양한 연꽃이 홀연히 자기 손에 있는 것을 보고 이때부터 일생동안 꽃을 뿌리는 공양을 하였다. 또 관음보살이 감로수를 입에 부어주는 감응을 받고 설법하는 재주[大辯才]를 얻게 되어「종경록(宗鏡錄)」 100권을 저술하였다.

 적음(寂音 : 慧洪覺範)이 이에 대해 말하였다.

 "내가 이 책을 깊이 읽어보니 방등부 계통의 경전을 누비며 넘나든 것이 60종이었으며, 중국과 외국 성현의 말씀을 관통해서 논한 것이 3백가(家)였다. 천태종(天台宗)과 화엄종(華嚴宗)의 핵심을 알았고 유식(唯識)을 깊이있게 논하였으며, 세 종파의 다른 이치를 대략 분석하여 하나의 근원으로 귀결시키려 하였다. 그러므로 의문이 마구 생기면 깊은 뜻을 낚고 먼 뜻을 길렀으며, 어두운 점을 쪼개고 파헤칠 때는 치우치고 삿된 견해를 쓸어버렸다.

 그의 문장은 아름답고 자유분방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자기 마음을 활짝 깨우쳐 성불하는 으뜸이며 달마가 서쪽에서 온, 전할 수 없는 바로 그 뜻을 분명히 알려준다."

 선사가 입적하고 나서도 총림에서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희령(熙寧 : 1068~1077) 연간에 원조(圓照)선사가 비로소 이 책을 들고 나와 널리 대중에게 알렸다.

 "예전에 이 보살께서는 스승없이 터득하는 지혜[無師智]와 저절로 터득하는 지혜[自然智]를 숨기고 오로지 보통지혜만을 써서 모든 종파의 강사들에게 서로 질문공세를 펴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심종(心宗)의 저울대를 가지고 그들의 이치를 고르게 달았으니 그 정묘한 극치는 가히 마음의 거울로 삼을 만하다."

 이로부터 납자들이 다투어 그 책을 전하고 읽게 되었다.

 원우(元祐 : 1086~1093) 연간에 보각조심(寶覺祖心)선사는 그때 이미 나이가 많았으나 손에서 이 책을 놓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 책을 늦게야 보게 된 것이 한스럽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글과 노력으로는 미칠 수 없는 이치가 그 속에 다 모여 있다."

 그리고는 그 요점만을 골라서 세 권의 책으로 만들어 「명추회요(冥樞會要)」라고 이름지으니 세상에 널리 퍼졌다. 후세에 이 두 분 노스님이 없었다면 총림은 숭상할 바가 없었을 것이다. 오래된 학인은 날로 속스럽고 게을러져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을 것이며 늦게 온 사람은 날로 숨이 막혀 공연히 근거없는 말만 할 뿐일 것이니 무엇으로 이 책을 알 것이며 그 뜻을 논하고 음미할 수 있겠는가. 설사 아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크게 마음에 두지 않고 그저 조사의 교외별전이거니 불립문자거니라고만 생각할 것이니 어찌 문자의 속까지를 찌를 수 있겠는가. 그런 이들은 달마 이전 마명(馬鳴)과 용수(龍樹)도 역시 조사였으나 논을 쓸 때는 백가지 경의 이치를 아울렀고, 광범위하게 보려 할 때는 용궁의 책까지도 빌려다 보았으며 달마 이후에 관음대적(觀音大寂 : 馬祖道一) ·․백장회해(百丈懷海) ·․황벽 희운(黃檗希運) 같은 분도 역시 조사였지만 모두 3장(三藏)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모든 종파를 널리 공부하였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그 분들의 어록이 모두 남아있어 가져다 볼 수 있는데 어찌하여 달마만을 이야기하는가.

 성인의 세상이 멀어질수록 중생의 근기가 낮아져 뜻과 생각이 치우치고 짧다. 도를 배우는 일이 간단한 것이라고는 하나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앉아서 이루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농부가 밭갈고 김매는 일은 게을리하면서 침을 흘리며 밥먹는 것만 쳐다보는 것과 같으니 웃을 일이다.

 영명선사는 늘 이렇게 발원하였다.

 "널리 발원하옵니다. 시방 모든 학인과 뒤에 오는 현인들이 도는 부자가 되고 몸은 가난하며, 정(情)은 성글고 지혜는 빈틈없게 되어지이다. 그리하여 불조의 마음 종지를 펼치고 인간 ·․천상의 안목을 활짝 열게하여지이다" 「실록등(實錄等)」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