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나호야록羅湖野錄

3. 황소를 타고 다니다 / 유정(惟正)선사

쪽빛마루 2015. 8. 21. 13:27

3. 황소를 타고 다니다 / 유정(惟正)선사

 

 유정(惟正 : 법안종)선사의 자는 환연(煥然)이며 화정 황씨(華亭 黃氏) 자손이다. 어려서 임안부(臨安府) 북산(北山)의 자수사(資壽寺) 본여(本如)선사에게 공부를 하였다. 관청에서 기술시험을 려할 때 본여선사가 관음상에 기도를 드려 도움을 구해보라 하였으나 어떻게 사사로운 일로 기도수 있겠느냐며 사양하였다. 그 고을 주소안(朱紹安)이 이 말을 전해 듣고 가상히 여겨 자기 돈을 털어 도와주려 하였지만 유정스님은 화를 내며 거절하였다.

 "옛사람은 청정한 일과 비밀스런 종지로 사람들을 제도했는데 오늘날은 반대여서 옛날과 거리가 멀다. 내가 삼보 중에 끼게 되는 데는 마땅한 때가 있는 것이다."

 얼마 후 상부(祥符)의 큰 은덕으로 평소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천태사에서 삼관(三觀)을 배우고 다시 경산사(徑山寺)에 가서 거소(居素)노스님을 찾아뵙고 종지를 얻었다. 거소선사가 정토원(淨土院) 주지가 되자 유정스님이 오랫동안 그를 돕다가 그 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인품이 고매하고 계율이 엄하여 명망있는 대신들의 존경을 받았다.

 내한(內翰) 섭청신(葉淸臣)이 금릉을 다스릴 때 스님을 맞이하여 도를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좋은 날을 가려 손님을 모아 놓고 예의를 갖춰 받들고자 하였으나 그날이 돌아오자 스님은 게를 지어 사양하였다.

 

어제는 오늘 만나자 기약했지만
문을 나서며 주장자에 기대 곰곰히 생각하니
승려되어 산골에 사는 것이 합당하지
벼슬아치 모인 자리는 걸맞지 않는구려.

昨日曾將今日期  出門倚杖又思惟

爲僧只合居巖谷  國土筵中甚不宜

 

 또한 도중에서 진산주(進山主)를 만나 게송을 지어주었다.

 

옛스러운 모습에 엉성한 차림으로 주장자에 기대시니
분명 수보리(須菩提)를 그려 놓은 듯 하여라
공이란 성색을 떠나서 아는 것 아니니
달빛아래 원숭이 소리를 듣는 것과 같구나.

貌古形疏倚杖藜  分明畫出須菩提

解空不許離聲色  似聽孤猿月下啼

 

 유정스님은 말쑥한 식견으로 세상에 끄달리지 않았다. 평소 누렁 송아지를 타고 다니기 좋아하니 임안 태수인 시랑(侍朗) 장당(蔣堂)이 시를 지었다.

 

선객이 항상 옛도읍을 출입할 때는
황소 뿔 위에 바리때 걸어놓고
때로는 눈 맞으며 구름 속에 사라져가니
구름 속에 쌓인 한폭의 그림일세.

禪客尋常入舊都  黃牛角上掛缾盂

有時帶雪穿雲去  便好和雲畫作圖

 

 스님은 명사들에게 이와같이 존경을 받았다. 평소 지은 글을 모아 「금계집(錦谿集)」이라 이름하였는데 30권으로 되어 있으며 앞에 소개한 두 수의 게송도 이 문집에 나와 있고, 그의 생애는 탑명(塔銘)에 대략 실려 있다.

 아! 세상에는 삭발하고 승복만을 걸치고서 승려가 되었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 중에 스님이 말한 청정한 일과 비밀스런 종지를 안다고 할 수 있는 이는 정말 드물 것이다. 유정스님은 말을 어리숙하게 하는 듯하지만 오히려 넘치고 잡된 우리들의 병폐를 다스려 줄 약이 되니 불법 문중에 보탬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