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림고경총서/나호야록羅湖野錄

29. 고향사람 알아 뭘해 / 굉철면(宏鐵面)스님

쪽빛마루 2015. 8. 21. 13:40

29. 고향사람 알아 뭘해 / 굉철면(宏鐵面)스님

 

 명주(明州)의 계하 굉(啓霞德宏)선사는 수봉 상(秀峰祥)선사의 법제자이다. 그는 인품이 강직하고 까다로워 쓸데없이 말하거나 웃지 않으니 총림에서 '철면(鐵面)'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일찍이 「법보전(法寶傳)」 3권을 지었는데 오거사(烏巨寺)의 행(道行) 스님이 서문을 써서 그 첫머리를 장식하였다. 대략 다음과 같다.

 

 "선문의 정법안장을 모두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때로는 기연을 인용하기도 하고 게송으로 종지를 드러내기도 하니 배우는 이가 읽어 보면 종지를 알고 기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법보전이 어떤 책인가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계하스님은 천동사와 육왕사를 왕래하면서 산문을 지나는 스님이 있으면 으레 시험해 보았다. 하루는 한 스님이 형양(衡陽) 사는 사람이라 하면서 스님과 같은 고향이라 한다고 시자가 전했다. 굉선사는 주장자를 끌고 걸어가면서 "가서 참선해서 도는 배우지 않고 와서 고향사람은 알아 무얼 찾겠다는 건가?"라고 하니 그
스님이 대답하려고 머뭇거리자 주장자로 후려쳐 내쫓아 버렸다. 그는 이와같이 사람을 다스렸던 것이다.

 절의 숲이 깊고 수려하여 어느 높은 사람이 묘지를 택해놓고 친히 관을 가지고 왔다. 그런데 굉선사가 그 묘지 구덩이에 반듯이 누워 있으니 장례를 치를 수가 없었다. 이에 군수 구대제(仇待制)가 사람을 보내 설득하였다.
 '천년의 상주물이요 하루 아침 승려다' 하는데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이처럼 굳이 다투십니까?"
 "하루 아침 승려로 해서 천년 상주물을 파괴해서는 안됩니다."

 그 귀인 역시 현명한 사람이라 그 말을 수긍하고 다른 곳에 장지를 마련하였다. 그의 일 처리는 이와 같았다. 굉선사는 비록 수승한 인연은 없었지만 천년 상주하는 절 일로 자기의 사명을 삼았으니 연줄로 자신의 위치를 굳히려는 자의 얼굴을 부끄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강직한 지조와 근면한 덕에 매서운 조사의 면모가
뛰어나니 대위 철(大潙喆)선사에게 손자가 있다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