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기민한 심부름꾼 / 영암 안(靈巖安) 선사 <終>
50. 기민한 심부름꾼 / 영암 안(靈巖安) 선사
정주(鼎州) 영암 안(靈巖安)선사는 인품이 뛰어나며 기변(機辨)이 있었다. 불성 태(佛性法泰)스님이 세상에 나가기 전에 안선사는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태스님이 덕산사(德山寺)의 주지가 되자 안선사를 장산(蔣山) 원오선사에게 보내 사서(嗣書)를 전하였다. 이때 원오선사가 방장실에 앉아 있는데 안선사가 서찰을 받들고
앞으로 다가가니 원오선사가 말하였다.
"천리길을 달려와 종풍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으나 공안이 뚜렷한데 어찌하여 서신을 보내는고."
안선사가 대꾸하였다.
"얼굴을 맞대고 꺼내 놓으니 더 이상 주고 받을 것[回互]이 없습니다."
원오스님이 말씀하셨다.
"이는 덕산(불성 태스님)이 보낸 것이니, 어느 것이 심부름하는 이의 것인가?"
"어찌 다른 사람[第二人]이 있겠습니까?"
"뒤에 있는 것은......."
안선사가 서찰을 건네주니 원오선사가 말하였다.
"작가 선객이 원래 여기 있었구나."
"장산의 분부를 내려 주십시오."
마침내 승당(僧堂) 앞에서 수좌와 대중에게 사서를 내려주니 수좌가 물었다.
"이 현사(玄沙)의 백지*를 어디서 가져왔는가?"
안선사가 그의 앞에 서찰을 들이대며 "보이느냐?" 하자 수좌가 손을 내밀어 받으려 하였다.
안선사는 도로 잡아당기면서 "오랜 침묵이 필요하니 빨리 말하려고 힘쓰지 마시오. 오늘 이 글을 바치니 한 번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수좌가 악! 하고 할을 하자 안선사가 "진정한 수좌로다" 하였다. 수좌가 또다시 할을 하자 안선사가 서찰로 한 대 쳤다. 수좌가 무어라고 하려는 찰나에 안선사가 "삼팔구도 모르니 끙끙대는 소리를 면할 수 없지" 하고는 또다시 서찰로 한차례 내려치면서 "받아라!" 하였다.
원오선사와 불안선사는 법당 위에 서서 무슨 일인가 하고 바라 보다가, 원오선사가 큰소리로 '우리 수좌를 때려 죽이는구나" 하고 야단치니 불안선사가 말하였다.
"관마(官馬)가 마굿간을 짓밟았는데 무슨 증거가 있겠는가."
이 말을 듣고 안선사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말이 마굿간을 짓밟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이는 분명 용상(龍象)이 짓밟은 것입니다."
원오선사가 "이리 불러 오너라" 하여 안선사가 다시 법당 위에 오르자 원오선사가 말하였다.
"우리 5백명 대중 속의 수좌를 그대가 무엇때문에 때리는가?"
"스님도 한차례 맛을 봐야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말에 원오선사는 불안선사를 돌아보며 혓바닥을 내밀 뿐이었다.
불안선사가 '아직 멀었다'면서 안선사를 돌아보고 물었다.
"빈 손에 호미자루를 쥐고 걸어갈 때 물소를 탄 사람이 다리를 건너 가는데 다리는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 이게 무슨 뜻인가?"
안선사가 몸을 굽히며 "말씀하신 바가 모두 사실입니다" 하니 원오선사가 웃으면서, "원래 집 식구였구나" 하였다.
그리고서 오조 자(五祖自)선사의 처소로 가니 자선사가 물었다.
"서찰 속에 무슨 말이 적혀 있는가?"
"문장이 훌륭합니다."
"결국은 무슨 말이라는 것인가?"
"당장에 보검을 휘둘렀습니다."
"앞으로 가까이 오너라 여기 몇자 모르는 곳이 있다."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이에 자선사는 시자를 돌아보며 "이 중은 어디 중인고?"라고 물었다. 안선사는 말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시자가 "일찍이 스님의 법회에 있다가 떠난 사람입니다" 하였다.
자선사가 "이상하다! 이렇게 재빠른 놈이 있었나?"라고 하니 안선사가 "이전에 우둔하다고 스님께서 내버려두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자선사가 서찰을 화로 위에 쬐이면서 "나무사만다못다남..." 하며 중얼거리자 안선사는 그 앞으로 다가서서 손가락을 튕길 뿐이었다.
그후 안선사가 다시 장산에 이르러 여름결제를 할 적에 원오선사는 그에게 분좌(分座)해서 납자를 받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 이를 그만두고 떠나가려 하자 원오선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무엇이 필요한가?"
"짧은 노래[短歌]로는 십여 수 정도, 긴 구절[長歌]로는 두서너 말씀이면 되겠습니다."
원오선사는 송을 지어 그를 칭찬하였다.
심부름꾼이 되어 스승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임기응변으로 대답을 잘도 했네
호랑이 수염을 뽑는 선(禪)으로
세상 바깥으로 초탈하니
가장 좋은 자리를 내줄 뿐만 아니라
선상(禪床)에서 험한 절벽에 부딪치네
백추를 들고 불자를 세우며 웅변을 떨치니
쇠소리 옥소리*는 우뢰와 같고
석달동안 우뚝이도 기강을 잡아주니
수많은 납자들의 그의 도풍을 따르도다
집착과 속박 풀어주는 수단은 매웠으나
소를 빼앗고 밥을 빼앗고도 오히려 태연했네
가을바람 건듯 불어 돌아갈 이 시간에
무릉의 일을 모두 마치니
심오한 이치가 가슴 속에 쌓여있는데
나를 알아주는 이 없다고 시름하지 말게나
떠나가는 마당에 송별시를 부탁하니
율극봉과 금강권이로다
짧은 노래로는 십여 수가 필요하고
긴구절로는 두 서너 마디면 된다 하였네
황금털사자가 몸 뒤집는 법을 알았으니
총림에서 뛰어난 인물이라
머지않아 높은 정상에서 크게 포효할 것이니
다섯 잎새 한송이 꽃,* 온누리에 봄이 왔네.
使乎不辱命 臨機貴專對
安禪捋虎鬚 著著超方外
不唯明牕下安排 掇向繩狀拶嶮崖
拈椎豎拂奮雄辯 金聲玉振猶奔雷
九旬落落提網宗 衲子濟濟長趨風
解粘去縛手段辢 驅耕奮食猶雍容
秋風忽作要歸去 了却武陵一段事
勃窣理窟乃胸中 行行不患無知己
臨行索我送行篇 栗棘蓬與金剛圈
短歌須要十數丈 長句只消三兩言
金毛獅子解翻身 箇是叢林傑出人
不日孤峰大哮吼 五葉一華天地春
예로부터 선종에서는 심부름하는 소임[專使]을 중책으로 여기는데, 예의와 기변이 함께 뛰어난 자만이 스승에게 욕을 끼치지 않는 법이다. 위의 안선사야말로 완전한 재주를 지닌 분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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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사스님이 한 스님을 시켜 설봉스님에게 글을 보냈는데, 설봉스님이 상당하여 뜯어보니 백지 한 장 뿐이었다. 설봉스님이 대중에게 '알겠는가' 하여 '모르겠습니다' 하자 '군자는 천리에 같은 가풍이니라' 하였다.
* 아악을 연주할 때 쇠소리로 시작하여 옥소리로 끝나는데, 여기서 연유하여 앞뒤 조리가 완전한 말을 의미함.
* 달마와 그 밑으로 종맥을 이은 다섯 제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