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5. 9. 16. 08:07

37. 정성껏 시봉한 덕택에 얻은 법문 / 처응(處凝)선사

 

 보령 용(保寧仁勇)선사의 상수 제자인 처청(處淸)스님과 처응(處凝)스님은 함께 백운 단(白雲守端 : 1025~1072)선사에게 공부하였다. 처응스님은 가장 오랫동안 시자를 했었는데 수단선사에게 가슴앓이 병이 있어 처응스님은 항상 화롯불에 무우를 구워 두었다가 어느 때라도 필요하면 가져다 드렸다.

 수단선사는 부대사(傅大士 : 497~569)가 경을 강의한 일*에 대하여 송을 지었다.

 

대사가 언제 경을 강론할 줄 알았던가

보지선사 방편과 쌍벽을 이루었네

한차례 책상을 쳤을 뿐 아무일 없으니

양무제의 눈알이 휘둥그래질 만하다.

大士何曾解講經  誌公方便且相成

一揮案上俱無取  直得梁王努眼睛

 

 수단스님은 처응스님을 위해 이 송을 들려주고는 '휘둥그래질 만하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이 한 구절은 처응스님을 위하여 노파선(老婆禪)을 설한 것으로 처응스님은 이 말을 친히 들었다 하여 송의 아래에 덧붙여 두었다.

 처응스님은 후일 서주(舒州) 천주산(天柱山)의 주지를, 처청스님은 용서(龍舒) 태평사(太平寺)의 주지를 지냈는데 큰 기변(機辯)이 있어 오조 연(五祖法演)스님이 그들을 경외하였다. 처청스님이 처응스님에게 말하였다.

 "아우의 선은 노스님을 위하여 화롯불에 무우를 구은 정성의 대가로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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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대사가 양무제(梁武帝)의 청을 받고 경을 강할 때, 법상에서 책상을 한번 치고 그냥 내려오니 양무제가 어리둥절 하였다. 보지(寶誌)스님이 양무제에게, 폐하께서는 아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무제가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스님은 경전강론이 다 끝났다고 하였다.

 

 

38. 보고서도 만나보지 못한 부처님 / 웅수재 (態秀才)

 

 정화(政和 : 1111~1117) 연간에 웅수재(態秀才)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번양(鄱陽) 출신이다. 그가 홍주(洪州) 서산(西山)을 돌아다니다가 취암사(翠巖寺)를 지나가게 되었다. 장로(長老) 사문(思文)스님은 불인 원(佛印了元 : 雲居了元)선사의 법제자로서 역시 번양사람이었으므로 그에게 두 노비를 보내 가마에 태우고 불전[淨相]에 오게 하였다. 지나오는 도중에 짙고 깊은 숲 골짜기에서 우연히 한 스님을 만났다. 그는 옛 사람의 모습에다 정신이 맑아 보였으며 긴 눈썹과 새하얀 머리에 나무잎을 엮어 옷을 만들어 입고 반석 위에 앉아 있었는데 마치 벽 위에 걸려있는 불도징(佛圖澄 : 梵僧)의 초상화와 같았다.

 웅수재는 혼자서 생각했다.

 "요즘은 저런 스님이 없다. 양좌주(亮座主)가 서산에 숨었다고 하던데 아마 그가 아직껏 살아있는 성싶다."

 그리고는 가마 밖으로 나와 앞으로 공손히 나아가 여쭈었다.

 "혹시 양좌주가 아니십니까?"

 그 스님이 손으로 동쪽을 가리키기에 웅수재와 두 노비는 그의 손을 따라 바라보다가 뒤돌아 보니 스님은 간 데가 없다. 그 당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그치자마자 웅수재가 몸소 반석위로 올라가 그가 앉았던 자리를 살펴보니 그 자리는 말라 있었다. 이에 그곳에서 머뭇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전생의 인연이 두텁지 못하여 보고서도 만나지 못하였구나."

 

 

39. 「선상명」 / 개선 선섬(開先善暹)선사

 

 개선 섬(開先善暹)스님은 귀종사의 남(慧南)선사를 위하여 「선상명(禪牀銘) 」을 지었다.

 

진주는 조개에서 나오고

옥토끼는 둥근달을 잉태하는데

이 선상을 보아하니

도를 깨쳐주는 중매장이로다.

明珠産蚌  涼兎懷胎

觀此禪牀  證道之媒

 

 그 다음에 남선사가 귀종사명(歸宗寺銘)을 지었는데 '놓아버리니 편안하다[放下便穩]'는 구절에 개선스님은 깊이 수긍하였다.

 

 

40. 흥교사의 새 주지 / 탄(坦)선사

 

 선주(宣州) 흥교사(興敎寺)의 탄(坦)선사는 온주우씨(溫州牛氏) 자손으로, 집안 대대로 은(銀) 세공업을 하였다. 그는 은병을 갈고 닦다가 홀연히 깨달은 바 있어 드디어 출가하여 비구계를 받고 사방을 돌아다니다가 낭야 광조(瑯瑘廣照 : 慧覺)선사의 법제자가 되었다.

 회(天衣義懷, 운문종)선사가 흥교사에 주지로 있을 무렵 탄선사는 그곳 수좌로 있었는데, 의회선사가 다른 곳에 주지가 되어 떠나면서 탄선사를 후임 주지로 추천하려 하였다. 그 당시 조경순(刁景純)이 완릉(宛陵)태수로 있었는데 의회선사는 조경순이 외부의 논의에 따를까 두려워하여 관세음보살 앞에서 축원하였다.

 "만일 탄선사의 도안(道眼)이 밝아 주지를 맡길 수 있다면 조학사의 꿈에 현몽하여 주소서."

 조태수는 그날밤 소 한마리가 흥교사의 법좌 위에 앉아 있는 꿈을 꾸었다. 의회선사가 아침 일찍 관아에 나아가 이별을 고하는데 조태수가 간밤의 꿈이야기를 하자 의회선사는 크게 웃었다. 조태수가 그 까닭을 물으니 의회선사가 의회선사가 말하였다.

 "탄수좌의 성이 우씨(牛氏)이니 그것도 소는 소가 아니겠소?"

 조경순은 그 자리에서 공문을 보내 탄선사를 청하니 탄선사는 청을 수락하고 법좌에 올라 갔다.

 설두(雪竇重顯)선사의 회하에 있던 화주(化主) 성종(省宗)스님이 그곳에 있다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사람마다 콧대가 하늘을 찔렀는데 세상에 나온 뒤로는 무슨 까닭에 깜깜무소식인가?"

 탄선사가 말하였다.

 "계족산(雞足山) 봉우리 앞에 바람이 쓸쓸하다."

 "아직은 안된다, 다시 말하라."

 "장안(長安) 가득 큰 눈이 내렸다."

 "그 누가 이 뜻을 알리오. 나로 하여금 남전(南泉)선사를 생각나게 하는구나."

 성종화주는 이 말을 마치고 소매자락을 떨치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절을 올리지 않았다. 이에 탄선사는 "흥교사 새주지는 오늘 손해를 보았구나" 하고는 바로 방장실로 돌아간 후 사람을 보내 성종화주를 데려오도록 하였다. 그가 이르자 따져물었다.

 "좀 전에 한 마디를 잘못 대답하였다. 그렇다고 많은 대중 앞에서 절 하지 않은 것을 덮어둘 수는 없지 않느냐?"

 "대장부로서 무릎 앞에 황금이 있다 하더라도 안목 없는 장로에게 어떻게 절을 올릴 수 있겠는가?"

 "나에게 또다른 말이 있다."

 이에 성종화주가 조금전에 물었던 말을 되풀이 하는 가운데 '아직은 안된다. 다시 말하라!'라는 구절에 이르자 탄선사가 말하였다.

 "나에게 몽둥이 30대가 있는데 너에게 주어 설두스님을 치도록 하겠다."

 성종화주는 마침내 절을 하였다.

 

 

41. 30년 이상을 참구하다 / 원오 극근(圜悟克勤)선사

 

 원오(圜悟)스님이 위산사(潙山寺)에 있을 때 진여(眞如)스님이 그에게 물었다.

 "어떤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꺼졌다 합니다."

 "그것이 온갖 번뇌에 매여있는 범부의 경지임을 알아야 한다. 이 노승도 그 속에서 30여 년을 있었지만 비슷한 경지를 얻었을 뿐이다."

 그 다음 회당(晦堂祖心)선사를 친견하자 회당스님이 말했다.

 "내 12년 동안 절의 주지를 했어도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와서야 발끝으로 부처를 걷어찰 줄 알게 되었다."

 원오선사는 후일 소각사(昭覺寺)의 주지가 되었는데 한 장로가 그에게 물었다.

 "유철마(劉鐵磨)가 위산스님과 문답한 일과 설두스님이 지은 어가행송(榮街行頌)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40년을 더 참구한다해도 여전히 설두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오."

 장로는 탄식을 하였다.

 "소각사의 스님께서도 오히려 이처럼 말하는데 더구나 다른 사람이야 어떻겠는가!"

 

 

42. 동사(東司)라 하니 동쪽에서 찾지만 / 진정선사

 

 낭중(郎中) 전익(錢弋)이 진정(眞淨)선사를 방문하여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낭중이 변소에 가려고 하니 진정스님이 행자를 보내 서쪽으로 안내하도록 하였는데 전익이 느닷없이 말하였다.

 "동사(東司 : 화장실을 가리키는 말)라 하고서 어째서 서쪽으로 가라 합니까?"

 "많은 이들이 동쪽에서 찾지."

 이에 대하여 스님(대혜)께서 말하였다.

 "아! 조주선사가 투자(投子大同)선사에게 물었을 때 '밤길을 걷게 할 수는 없고 동이 트면 찾아오라'고 대답했던 말도* 이보다는 훌륭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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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주선사는 대동선사에게, 크게 죽은 사람이 문득 살아날 때에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43. 여러 절 주지 모임에서 / 진정선사

 

 남강(南康) 땅 여러 사찰의 주지 모임에 불인(佛印 : 雲居了元)선사가 뒤늦게 이르자 진정선사가 물었다.

 "운거는 어찌하여 이처럼 늦었습니까?"

 "짚신 신고 귀종(歸宗)의 뱃속을 지나오느라고 늦었소."

 "귀종에게 도리어 먹혀버렸구나."

 "토해내지 못한 건 어찌하려오?"

 "토해내지 못했으면 똥으로 싸버렸나?"

 

 

44. 노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 진정선사

 

 진정(眞淨)선사가 수시로 갑자기 시자를 불러 노스님을 모셔오라고 하면 시자는 혜남(慧南)선사의 영정을 가져다가 펼쳐 놓았다. 그러면 손을 이마에 얹고서, "이 분은 우리 노스님이 아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하면서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렇게 반나절쯤 있다가 다시 거둬들이도록 하는데 번번히 이처럼 되풀이 하였다.

 그러나 잠암 원(潛庵淸源)스님은 혜남선사의 영정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또한 스님(대혜)은 매년 새 곡식과 과실을 얻으면 반드시 불상과 원오선사에게 공양한 뒤에야 맛을 보았다. 그리고는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과 노스님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이처럼 될 수 있었겠느냐."

 

 

45. 「신심명」의 주석 / 낭야 혜각(瑯瑘慧覺)스님

 

 도위(都尉) 이화문(李和文 : 李導勗)이 낭야 각(瑯瑘慧覺)스님에게 「신심명(信心銘)」의 주석을 부탁하였다. 낭야선사가 큰 글씨로 한 구절을 쓰고 아래에 작은 글씨로 한 구절을 써주자 이화문은 한 번 보고서 몹시 칭찬하고 감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