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5. 9. 24. 11:47

33. 나한상을 닮은 스님 / 자항 요박(慈航了朴)선사

 

 자항 박(慈航了朴)선사는 민(閩)사람으로 훤출한 기골에 검은 얼굴로 마치 나한(羅漢)처럼 생겼다. 무시 개심(無示介諶)스님의 법을 이어, 처음엔 명주(明州) 여산(廬山)의 주지로 있다가 육왕사로 옮겼으며 얼마 후 세력있는 자의 주선으로 해하(海下) 만수사(萬壽寺)로 옮겨왔다.

 응암(應菴曇華)스님이 천동사에서 입적하자 태수가 그의 소문을 듣고 그 자리를 잇도록 하였는데, 그날 밤 태백산의 노스님들이 모두가 무쇠 나한[鐵羅漢]이 배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으며, 또한 그와 같은 옷을 입은 자가 글을 지어 올렸다.

 

예전에 무봉(鄮峰 : 育王寺)에 오를 때는

나뭇잎새처럼 몸이 가벼워

내 얼굴 부끄러웠는데

지금 장경산(長庚山 : 천동사가 있는 太白山)에 올라오니

그의 도가 삼산(三山)보다도 무거워

사람들의 얼굴에 기쁜 빛이 있구나

흔쾌히 불계산(佛髻山)을 떠나

큰 파도를 건너

깊은 골짜기에서 큰 아름드리 나무로 옮겨가니

우리 불교 빛나도다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나라를 조그맣다 하니

그때는 정말로 그랬지만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昔去鄮峰而身輕一葉我無靦

今上長庚而道重三山人有喜色

快離佛髻

利涉鯨波

出幽谷而遷喬木

光乎此道

登東山而小魯邦

允也其時

自此以還未知

 

 그 후 22년 동안 그곳에 주지를 하였는데 황제의 아들 위왕(魏王)을 비롯하여 사위공(史魏公)이 모두 그의 도덕을 존중하였으며, 순희(淳熙 : 1174~1189) 초에는 효종(孝宗)이 태백명산(太白名山)이라는 네 글자를 몸소 써서 하사하였다.*

 요박선사가 여산의 주지로 있을 때 상당법문을 하였다.

 "덕산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몽둥이질을 하였고, 임제는 문에 들어서자마자 할을 하였다. 덕산의 몽둥이에 귀가 먹고 임제의 할 소리에 눈이 멀었다. 그러나 한 번 누르고 한 번 쳐들어 그런 가운데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구나."

 그리고는 할을 한번 하고 주장자를 높이 들어 탁자를 내려친 뒤, "여러 사람에게 묻노니 이것이 살리는 것이냐 죽이는 것이냐?"하였다.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군자가팔(君子可八)이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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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의 錫은 賜인 듯하다.

* 군자가팔(君子可八) : 군자가 행할 만한 8가지 덕목, 인의예지효제충신.

 

 

34. 운문의 도가 그에게서 끊기다 / 이암 심(已菴深)선사

 

 이암 심(已菴深)선사는 영화(永和) 사람이며, 치선 원묘(癡禪原妙)스님의 법제자이다.

 한번은 치선스님이 송을 지어 그를 전송하였다.

 

그대 보내려니 회심(懷深 : 1077~1132)사숙 그리워라

두 눈엔 예전처럼 두레박 소리 선하구나.

送君還憶深師叔  兩眼依前聽轆轤

 

 후일 그는 온주(溫州) 보은사(報恩寺)의 주지를 지냈는데, 동짓날 소참 법문을 하였다.

 

1 2 3 4 5

5 4 3 2 1

찬 바람이 얼굴을 후려치는데

울타리에 바람소리 을씨년하구나.

一二三四五  五四三二一

寒風劈面來  籬頭吹觱栗

 

 그리고는 법좌에서 내려왔다.

 내가 그 당시 객실에 있다가 그 법문을 듣고 그가 운문종(雲門宗)의 종지를 얻었음을 알았는데 애석하게도 그를 이을 법제자가 없어 소양(韶陽 : 운문)의 도가 그에게서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35. 너무 준엄하여 제자를 두지 못하다 / 월당 도창(月堂道昌)선사

 

 월당 창(月堂道昌 : 1089~1171)선사는 묘담(妙湛思慧 : 1071~1145)스님의 법제자로 고고한 기풍이 매우 준엄하여 스님을 찾는 학인이 드물었다. 도창스님은 여러 절 주지를 두루 역임하다가 남산(南山) 정자사(淨慈寺)에서 입적하였다. 지문 광조(智門光祚)스님의 법의(法衣)가 7대를 전해 내려오다가 도창스님이 열반한 후 아무도 그의 법통을 이을 만한 사람이 없어 고이 법의를 접어 보관한 채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러므로 할당 혜원(瞎堂慧遠)스님이 세운 부도에 이런 구절이 있다.

 

30년 동안 용을 잡고 봉을 잡으려고 헛고생만 하였으니

불조의 혜명이 발바닥에 바르는 기름처럼 되었고

운문의 정종이 버선줄기 터지듯 끊어졌구나.

三十載羅龍打鳳勞而無功

佛祖慧命如塗足油

雲門正宗如折襪線

 

 아!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36. 선림의 장원감 / 귀산 미광(龜山彌光)선사

 

 귀산사(龜山寺)의 미광(邇光)선사가 양서암 묘희 스님에게서 공부할 무렵, 반년이 지나도록 입을 열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하루는 입실하자 묘희스님이 물었다.

 "죽을 먹고 바리때를 씻었거든 이것 저것 가릴 것 없이 한 마디 해 보아라."

 미광스님이 "찢어버리겠다!"라고 소리치자, 묘희스님은 무서운 얼굴로 "또다시 여기와서 선을 말할테냐?"라고 하였다. 미광스님은 그 말에 크게 깨치고 온몸에 땀을 흘리며 절을 올리니 묘희스님은 게를 지어 인가하였다.

 

거북이 털을 뽑고 나서 하하하 웃는구나

일격에 만겹의 관문사슬을 열었도다

평생에 경사스러운 날 바로 오늘이로세

누가 말하랴, 나를 되팔아먹으려고 천리 길을 왔었다고.

龜毛拈得笑哈哈  一擊萬重關鎖開

慶快平生是今日  孰云千里賺吾來

 

 이에 대하여 미광스님은 「투기송(投機頌)」을 지어 올렸다.

 

기연만나 부딪치고 천둥소리 으르렁대니

놀라 일어난 법신 북두성에 몸 숨기네

드넓은 물결 위에 성난 파도는 하늘에 닿고

콧구멍을 뽑아내니 입을 잃었구나.

當機一拶怒雷吼  驚起法身藏北斗

洪波浩渺浪滔天  拈得鼻孔失却口

 

 묘희스님이 보고서, "이것이야말로 선림의 장원감이다" 하여 이를 계기로 미광스님은 '광장원(光狀元)'이라 불리게 되었다.

 

 

37. 난리가 났는데도 / 자득 혜휘(自得慧暉)선사

 

 자득 휘(自得慧暉 : 1097~1182)스님이 장노 조조(長蘆祖照 : 1057~1124)스님의 회하에 있을 무렵, 난리가 일어나 대중이 모두 흩어졌는데 스님과 종백두(宗白頭 : 1085~1153)스님만이 꼼짝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스님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참선이란 본래 생사와 대적하는 것이니 어찌 이러한 난리로 도망할 수 있겠는가, 또한 나의 몸은 허약하니 피난을 간다 해도 도중에 잡힐 것이 아닌가 하였다. 폭도가 쳐들어와 보니 대중들은 모두 떠나갔는데 오직 혜휘스님만이 법당 안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기에, 다투어가며 화살로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혜휘스님은 고요히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화살 한 개가 스님의 소맷자락을 뚫고 궤짝에 맞았다. 이로부터 스님은 사지를 덜덜 떠는 병을 얻게 되었다. 종백두는 창고에 앉아 있었는데 도적이 그를 발견하고 결박지어 쏘아 죽이려 하자 한 직세승(直歲僧 : 회계를 맡아보는 스님)이 곁에 있다가 그들 앞으로 다가서며, 자기를 대신 죽여달라고 여러 차례 간청하니, 도적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저 사람과 어떤 관계냐?"

 "이 스님은 참선을 해 마친 분이다. 뒤에 큰 선지식이 되어 세상에 나아가 중생을 제도하실 터이지만 나는 참선을 하지 못하였으니 죽는다 하여도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대신하고자 한다."

 도적들은 그의 말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두 사람 모두 풀어 주었다.

 후일 종백두가 명주(明州) 취암사(翠巖寺)의 주지로 있을 때 그의 도가 크게 떨치게 되었다. 지난 날 목숨을 대신하겠다던 자도 그의 회하에 있었는데 종백두는 항상 그 사람이 자신을 다시 낳아 준 부모라고 하였다. 진실로 참선하는 이에게 바른 발심만 있다면 반야에 어찌 영험이 없겠는가.

 

 

38. 개선 도겸(開善道謙)선사의 전기

 

 개선 겸(開善道謙)선사는 건령(建寧)사람이다. 처음 서울로 가서 원오 극근(圓悟克勤)스님을 찾아뵈었으나 깨친 바 없었다. 그 후 묘희스님을 따라 천남산(泉南山)에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묘희스님이 경산(徑山)에 주지로 가자 도겸스님은 묘희스님을 모시고 그리로 갔다. 얼마 후 묘희스님이 그를 장사(長沙)에 보내 자암거사 장위국공(紫巖居士 張魏國公 : 張浚)에게 편지를 전하도록 하자 도겸스님이 스스로 생각해 보았다.

 '내, 20년 동안 참선을 했지만 아무 것도 깨친 바가 없는데 다시 이 길을 가게 된다면 결정적으로 나의 공부가 황폐해질 것이다.' 내심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그의 도반 죽원암주(竹原菴主) 종원(宗元 : 1100~1176)스님이 "길을 간다고 참선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대와 함께 가겠다."하며 꾸짖었다.

 이에 도겸스님은 마지못해 길을 떠났는데 길가는 도중에 종원스님에게 울면서 하소연하였다.

 "내, 일생동안 참선을 했지만 하나도 얻은 바 없었는데 또다시 길 위를 분주하게 돌아다니니, 어떻게 깨칠 수 있겠느냐?"

 "그대는 어찌해서 여러 총림에서 참구했던 것과 깨친 것과 또한 원오 · 묘희 두 스님이 그대에게 말씀해 주신 이치를 모두 이해하지 않으려고만 하는가. 가는 길에 그대를 대신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 모두 대신해 주겠다. 그러나 오직 다섯 가지 일만은 대신해 줄 수 없으니 네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 다섯 가지 일이란 무엇인가? 그 말을 듣고 싶다."

 "옷입고 밥먹고 똥누고 오줌누고 이 시체를 끌고 길을 가는 일이오."

 도겸스님이 이 말에 크게 깨치고 자신도 모르게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사형이 아니었다면 내 어떻게 이러한 경지를 얻었겠소"라고 하니, "그대가 이제야 비로소 자암거사에게 편지를 전할 수 있겠으니, 나는 돌아가겠다" 하고 종원스님은 곧바로 건상(建上)으로 돌아가고 도겸스님은 그 길로 장사에 이르러 그곳에서 반년을 머물렀는데 진국부인(秦國夫人 : 장위국공의 어머니)도 스님으로 인하여 대사(大事)에 큰 마음을 일으켰다.

 마침내 쌍경사(雙徑寺)로 돌아오자 묘희스님은 지팡이를 짚고 문에 기대 기다리고 있다가 도겸스님을 보자마자 말하였다.

 "건주 아이야! 이번 길에 떠나갈 땐 이 노승을 원망만 했을 것이다마는 그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매일 더욱 깊은 경지를 쌓아 뒤에 현사산(玄沙山)의 주지로 나갔다.

 한번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서축 땅 큰 신선의 마음은 동과 서가 은밀하게 맞는다고 하였는데 은밀히 맞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하였다.

 "8월 가을날 어디가 덥단 말인가?"

 다시 말하였다.

 "부처를 설하고 법을 설함은 소경과 귀머거리를 속이는 일이며, 성품을 논하고 마음을 논함은 스스로 함정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몽둥이와 할은 세력을 힘입어 사람을 속이는 일이며, 눈을 깜박거리고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것은 들여우가 사람을 홀리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아니라 해도 그것은 고함지르면서 산울림이 멈추기를 바라는 격이며, 별달리 대단한 일이 있다 하여도 그것 또한 허공에 하소연하는 격이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인가? 흰구름 다한 곳이 푸른 산인데, 저 길손, 또 다시 청산 밖에 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