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림성사 上 39~45.
39. 달마스님 찬 / 정당 명변(正堂明辨)선사
정당 명변(正堂明辨 : 1085~1157)스님은 불조(佛照)스님의 법을 이었다. 처음엔 그의 도가 떨치지 못했는데 그것은 초학들 중에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가풍이 매우 엄하였으므로 대중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피하였다. 제삿날에는 패(牌)만 한 차례 걸어놓고 마니, 주사(主事)가 이에 대하여 언급하자 명변스님이 말하였다.
"내 이미 패를 걸어놓았는데 무엇하러 또 사찰의 자산을 낭비하는가? 금강권(金剛圈)과 율극봉(栗棘蓬 : 밤가시)을 삼켜버릴 줄 모르거든 평상시 공양처럼 해야 한다."
주사는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하였다.
그는 달마스님에 대해 찬(贊)을 썼다.
승원궁(양무제의 궁전) 앞에서 부끄러워 말 못하다가
낙양봉(洛陽峯 : 소림사) 아래에서 떠벌리도다
가죽과 골수 전하여 이야기거리가 되고
한쪽 신발을 묻을 곳이 없네
아! 보통 차가운 날씨가 아닌데
매화향기가 코끝에 스치는구나
昇元殿前懡㦬 洛陽峰畔乖張
皮髓傳成話霸 隻履無處埋藏
咦不是一番寒徹底 爭得梅華撲鼻香
설당(雪堂道行)스님이 이 찬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스승(先師)에게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다니, 이 찬(讚)만으로도 천하 사람의 혓바닥을 잘라 버릴 수 있겠다"라고 감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납승들이 앞을 다투어 그의 회하로 달려갔으며 후일 삽주(霅州) 도량산(道場山)에 있을 때는 대중이 500여 명에 이르렀다.
40. 죽원암주(竹原菴主)의 법문
죽원암주(竹原菴主 : 宗元)는 건령(建寧) 사람이다. 출가하여 묘희스님을 찾아뵙고 종지를 깨달은 뒤, 고향으로 돌아와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여러 사찰에서 주지로 그를 초청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일찍이 법어를 여러 차례 남겼다.
"여러 총림에서 학인들을 지도하는 방편은 그들의 마음에 박힌 못과 말뚝을 뽑아주고 달라붙은 것과 속박을 풀어주는 데 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한결같이 못과 말뚝을 더 깊게 박아주고 더욱 달라붙게 하고 속박하여 그들을 깊은 연못 속으로 들여보내 스스로가 알도록 한다."
"참선이란 반드시 이 하나[一着子]를 투철하게 뚫어야 한다. 큰 법을 깨쳐도 밝지 못한 자가 반드시 있다. 큰 법을 비록 밝혔다 하여도 자기 발 밑의 세속 인연을 끊어버리지 못한 자가 즐비한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여러 총림에서 이런 말을 듣고는 모두 이 노승에게 욕을 한다. '이미 큰 법을 밝혔는데 또 무슨 발 밑의 세속 인연을 끊지 못하였냐'고 그들을 이상하게 볼 수는 없지만 그들에겐 이 한 가지 깨달음이 부족하여 모든 게 의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 하나는 마치 살인자와 맞부딪치는 것과 같아서 그대들이 죽이지 못하면 그가 그대들을 죽일 것이다. 신통하구나. 대장부의 견해란 이런 것이다."
41. '한 번 찧은 쌀'이라는 별명이 붙은 스님 / 수암 사일(水菴師一)선사
수암 일(水菴師一 : 1107~1176)선사는 무주(婺州) 동양(東陽)사람이다.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여 총림에서는 그를 '일조(一糙 : 한 번 찧은 거친 쌀)'라 불렀다. 오랫동안 월암 선과(月菴善果)스님에게 공부하였는데, 선과스님은 늘 '운문화타(雲門話墮)'의 화두를 가지고 물었다. 하루는 그가 한마디를 던졌다.
"영산 회상의 수기는 모름지기 스님이라야 받겠습니다."
또한 일찍이 송을 지었다.
열여섯 곱디고운 아가씨 아름다운 몸매로
사뿐한 비단옷에 향기 휘날리며
꽃밭에 숨었다가 서서히 일어나니
노란 꾀꼬리 버들가지에 내려앉네.
二八佳人美態嬌 繡衣輕整暗香飄
偸身華圃徐徐立 引得黃鶯下柳條
월암스님이 큰 그릇으로 여겼는데 뒷날 도반들과의 불화로 그를 모함하는 사람이 있었다. 월암스님은 그들의 말을 믿고 사일스님을 내쫓으니 절을 떠나면서 게를 지어 월암스님을 풍자하였다.
월암의 법장(法藏) 부처님께 머리숙여
황금의 오묘한 모습 실로 볼만 하였는데
희멀건한 도깨비 일곱 여덟 놈이
이리저리 소반 위의 구슬처럼 구르는구나.
稽首月菴藏裏佛 黃金妙相實堪觀
白面夜叉七八箇 推轉如珠走玉盤
후일 태주 자운사(慈雲寺)의 주지로 세상에 나아가 불지(佛智端裕 : 1085~1150)스님의 법제자가 되었는데, 이는 참정(參政) 전단례(錢端禮)의 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전단례는 불지 스님과는 속가의 친형제 사이다. 그러나 총림에서는 이를 스님의 단점으로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방장실에서 항상 "서천(西天)의 오랑캐는 어찌하여 수염이 없느냐?"는 화두로 학인들을 시험하였다.
42. 분양스님의 십지동진(十智同眞) 법문에서 깨치다 /
무명 법여(無明法如)선사
무명 여(無明法如)선사는 삼구(三衢) 사람이며 운개 지(雲盖守智)스님의 법제자이다. 분양(汾陽善昭)스님의 '십지동진(十智同眞)' 법문으로 도를 깨쳐 참선 이야기만 나오면 '십지동진'을 설법하니, 총림에서는 그를 '여십지(如十智)'라 일컬었다. 뒤에 도량사(道場寺)의 주지를 지냈는데 수암(水菴)스님, 원극(圓極彦岑)스님 등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원극스님은 무명스님의 찬을 지었다.
생철로 된 얼굴 머물기 어려워
무심코 걸음을 옮겨도 천지가 들먹들먹
장난삼아 들어 말하는 '십지동진' 화두는
황룡의 직계 손자임을 저버리지 않았도다.
生鐵面皮難溱泊 等閑擧步動乾坤
戱拈十智同眞話 不負黃龍嫡骨孫
후일 스님은 사계(思溪) 원각사(圓覺寺)에서 입적하였으며 지금도 부도탑이 남아 있다.
43. 차암 수정(此菴守淨)선사의 대중법문
서선사(西禪寺)의 차암 정(此菴守淨)선사는 묘희스님 회하에서 공부하여 크게 깨친 이로 종안(宗眼)이 밝았는데 일찍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싸움을 잘하는 자는 자신의 목을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을 잘하는 자는 반드시 공을 이룬다. 공을 이루면 편히 앉아 태평을 이루고 태평을 이루면 베개를 높이 베고 아무런 근심이 없다. 석 자[尺]의 칼을 뽑아들지 않고 한 벌의 활을 어루만지지도 않고 말은 화산(華山) 남녘으로 돌려보내고 소는 도림(桃林) 들녘에 방목하니, 때맞은 비바람에 어부는 노래하고 나무꾼은 춤을 춘다. 그러나 이러한 태평시대에 요순 같은 성군도 오히려 교화의 찌꺼기 있어 천지를 수용할 수 없음을 어찌하랴! 요순이 이름을 모르고 온 나라가 흥망의 일을 관여치 않아도 구름과 함께 동정호를 차지할 줄 알았으니…."
또 이런 법문을 하였다. "입을 꼭 닫아도 때때로 말을 하며 혓바닥을 잘라버려도 쉴새없이 재잘댄다. 가장 절묘한 것은 눈 속의 티끌이니 이미 절묘하다 해 놓고 어찌하여 눈 속의 티끌이라 하는가? 깨달았다, 깨달았다 할 때 그것을 깨달았다 할 수 없고, 현묘하다, 현묘하다 하는 곳도 역시 꾸짖어야 한다."
44. 만암 도안(卍菴道顔)선사의 대중법문
만암 안(卍菴道顔 : 1094~1164)스님은 사천 사람으로, 오랫동안 원오 극근(圓悟克勤)스님에게 공부하였다. 하루는 고금의 화두를 거론하는데 원오스님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는 참선을 하여도 바른 깨침을 구하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정신없이 지껄여대는구나."
도안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땀을 흘리고 그 길로 법당으로 돌아가 새벽까지 자지 않고 좌선하다가 갑자기 크게 깨달았다. 원오스님에게 달려가 뵙고서 조금치도 막힘없는 논리를 휘두르자 그제서야 원오스님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에 도안스님이 말하였다.
"어제도 그처럼 대답을 하였는데 스님께서 수긍하지 않으시더니, 오늘도 그처럼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머리를 끄덕이십니까?"
"이 바보야! 너는 어제 망상 속에 잡혀 있었다."
도안스님이 절을 올린 후 말하였다.
"원래 석가모니도 신통한 것은 없었군요!"
원오스님이 촉으로 돌아간 뒤에는 묘희스님에게 귀의하여 최상의 경지를 깨치고 경산사의 수좌가 되니, 그의 이름이 총림에 널리 퍼졌다. 그 후 변산사(卞山寺)의 주지로 나갔으며 그 다음엔 동림사(東林寺)의 주지를 지냈다. 일찍이 대중 법문을 하였다.
"조사들의 지침이나 성인들의 수단은 밭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고 배고픈 걸인의 밥을 낚아채듯 호시탐탐하고 날쌨으니, 상앙(商鞅 : ?~BC 338)의 형법이나 손무(孫武)의 명령처럼 법에 걸리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오랫동안 모래밭에서 싸우고 칠사(七四) 기연을 갖춰 형세를 바라보고 결단을 내어, 진퇴존망을 아는 자만이 애오라지 한가닥 실마리가 트이리라. 만일 자기 눈을 뜨지 못하고 두꺼비처럼 눈만 껌벅이는 자는, 무리에 끼어서 밥이나 먹지 자유자재할 능력이 없다. 지금 여기에는 결단코 빼앗아 보겠다는 중이 없느냐? 이 산승의 목숨은 오직 그대들의 손아귀에 있다."
또 이런 말을 하였다.
"법이란 일정한 형상이 없으므로 사물을 만나야 그 형태가 나타나며, 일이란 반드시 정해진 것이 없으니, 공이 이루어짐에는 주체가 없다. 때때로 바람이 높아 고요하고 텅 비어 가까이도 멀리도 할 수 없고 때로는 자신이 물러나 남에게 굽히면 얕보거나 희롱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하면 쉽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려우니, 세속법이나 불법이나 모두가 우스꽝스러운 희론이다. 그러므로 노승은 이곳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말해보라. 어디에 있는가를. 도롱이 걸쳐 입고 일천 봉우리 밖에 비스듬히 섰다가 물을 끌어대어 오로봉(五老峰) 앞 채소밭에 부으리라."
45. 모르는 공안이 없었어도 / 무암 법전(無菴法全)선사
무암 법전(無菴法全)스님은 고소(姑蘇) 사람으로, 야보 천금강(冶父川金剛)스님의 제자이다. 오랫동안 육왕사(育王寺) 불지(佛智端裕)스님에게 귀의하여 자각 진(慈覺眞)스님과 도반이 되었다. 고금의 공안을 거론할 때는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방장실에서의 기연은 깨치지 못하여 밤낮으로 슬피 울며 잠을 자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세속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 없었다. 이와 같이 몇 해를 지내던 어느 날, 불지스님이 방장실에서 그의 멱살을 붙잡고 말하였다.
"유구무구(有句無句)는 나무에 얽힌 등넝쿨과 같다 하는데 말해 보아라. 빨리!"
법전스님이 무어라고 입을 열려 하는 순간, 불지스님이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이에 밝게 깨치고 연거푸 큰소리로 윽! 윽! 하고 소리쳤다. 단유스님이 그제서야 멱살을 놓아 주니, 송을 지어 올렸다.
북소리 피리소리 울리는데 한쪽 어깨 가사 벗고
용루에서 향기 뿜는 익주의 배
때로는 발을 담가 밝은 달을 희롱하고
5호의 물결 아래 하늘을 밟아 나가네.
鼓笛轟轟袒半肩 龍樓香噴益州船
有時著脚弄明月 蹈破五湖波底天
후일 그는 세상에 나아가 큰 사찰의 주지를 두루 지내다가 호구산(虎丘山)에서 입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