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5. 9. 24. 13:13

19. 바른 안목으로 종지를 밝게 깨치다 / 수암 연(誰菴演)스님

 

 수암 요연(誰菴了演)스님은 민(閩) 사람이다. 처음 회안봉(回鴈峰) 아래에서 묘희스님을 찾아뵙고 종지를 밝게 깨치니 묘희스님이 말하였다.

 "이 원숭이가 뒷날 반드시 사람을 떠들썩하게 할 것이다."

 그 후 묘희스님의 회하를 떠나가면서 게를 지었다.

 

철마를 거꾸로 타고 소상강을 건너갈 제

바위틈새 풀꽃들도 숨지 않는구나

높고 높은 회안봉 꼭대기를 몸소 올라보니

다시금 헤아릴 불법이 없구나.

倒騎鐵馬度瀟湘  磵草巖華不覆藏

回鴈峰高親到頂  更無佛法可商量

 

 그는 뒷날 강상(江上) 용상사(龍翔寺)의 주지가 되었는데, 대중들이 많이 귀의하였다. 수암(水菴師一)스님이 이에 대해 게를 지었다.

 

요즘 강상에 뛰어난 인물이 있어

학인을 가르침에 그대로 끊어버리는 기봉만을 쓴다네

江上如今得白眉  爲人偏用截流機

 

 그러나 요연스님은 게송을 잘 지었고 안목 또한 발랐다. 스님이 신창(新昌) 석불(石佛)에 쓴 게송은 다음과 같다.

 

숱한 세월 우러러 본 석불상

오늘에사 다시 보니 모든 의심 사라졌네

모든 모습이 다만 이와 같으니

도리어 삼생을 뚫고 나왔나 생각했었지.

積念有年瞻石佛  今朝一見絶疑猜

都盧面目只如此  却謂三生鑿出來

 

 또한 용추(龍湫 : 폭포)에 쓴 게는 다음과 같다.

 

아라한 큰 용추에 눌러 앉았으니

그 기량 길 잘못 들 리는 없겠지만

오로지 높은 바위 위에 쏟아지는 폭포만을 보았으니

청산 밖에 맑은 경계 어찌 알았으랴.

詎羅坐斷大龍湫  伎倆却無錯路頭

只見高巖傾瀑布  那知碧嶂外淸幽

 

 

20. 선재동자를 노래함 / 별봉 운(別峰雲)스님

 

 별봉 운(別峰雲)스님은 소계 수정(少溪守淨)스님의 법제자이다. 순희(淳熙 : 1174~1189) 연간에 복주(福州) 지제사(支堤寺)의 주지가 되자 강제(江淛)일대에서 도에 뜻을 둔 사람들이 모두 귀의하였다. 선재동자가 남쪽에서 선지식을 찾아다닌 것을 송하였다.

 

쌍 상투도 또렷한 이 어린애가

뱃심 좋군! 네 아는 게 무엇이냐

53 선지식을 속여먹고

낭패본 걸 모두 그들에게 돌려주었네.

髽角分明者小兒  肚皮好待你聞知

賺他五十三知識  敗闕都盧納向伊

 

 총림에서 이를 다투어 애송하였다.

 뒷날 스님은 보양(莆陽) 화엄사(華嚴寺)로 옮겨가,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21. 우연지(尤延之)에게 대항해 주지를 내놓다 / 혜홍(慧洪)수좌

 

 홍(慧洪)수좌는 임천(臨川) 사람으로 불조(佛照德光)스님의 법을 이었다. 홍주(洪州) 광효사(光孝寺)의 주지로 세상에 나갔는데 이는 조운사(漕運使) 우연지(尤延之)의 부름에 응한 것이다. 그다음 우연지가 태수(太守)에 임명되었는데, 초하루와 보름의 공참(公參) 때에 여러 스님을 관청으로 불러들여 큰 절을 한 후 물러가게 하였다. 혜홍스님은 이 말을 전해듣고 불쾌하여, 천하에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북을 울려 대중을 모아놓고 법상에 올라가 주지직을 사임하고 떠나면서 송을 지었다.

 

조사의 살림살이 원래 큰 것이었는데

누가 감히 자질구레 허리 굽히랴

안녕하소서. 현명하신 예장태수님!

나는 죽장에 짚신 신고 마음껏 노닐려 하오.

祖翁活計元來大  誰敢區區謾折腰

珍重豫章賢太守  芒鞋竹杖任逍遥

 

 태수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부끄럽게 여겨 사람을 보내 다시 청하였지만 혜홍스님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강서 땅 모든 사찰이 그 후로부터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뒷날 스님은 길주(吉州) 상부사(祥符寺)의 주지를 지냈고 개복사(開福寺)로 자리를 옮긴 후 그곳에서 입적하니, 시랑(侍郞)우연지는 몸소 스님의 전기를 썼다.

 

 

22. 자칭 '시골뜨기 중' / 설소 법일(雪巢法一)스님

 

 설소 법일(雪敖法一 : 1084~1158)스님은 스스로를 '시골뜨기 중(村僧)'이라 하였으며 초당 선청(草堂善淸)스님의 법제자이다. 오랫동안 평전사(平田寺)의 주지를 지냈고 뒤에 장노사(長蘆寺)의 주지가 되어달라는 간곡한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다가 여회 교(如晦皎)스님의 서신 한 장을 받고서야 부임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절은 결코 작은 절이 아니고 '시골뜨기 중' 또한 그저 그런 중이 아닙니다. 당우가 죽 이어져 있고 게다가 경치 좋고 우수한 인재가 있는 곳을 얻으려 하십니까? 생철면피(生鐵面皮)라는 아무 스님은 명성이 하늘까지 뻗칩니다.

 그는 온누리를 주물러 하나의 사원을 만든다 하여도 전부가 아니라 하고 항하수 모래로 납승을 만들고도 할(喝) 한번 하지 않습니다. 자, 광화(光火)보살의 얼굴을 보십시오. 또한 타거나한(跥距羅漢)을 후려쳐 보십시오.

 이곳에 오시어 밑없는 배를 버티어 주시고 갈대꽃 숲(절이름 長蘆寺)에 길고 긴 물결을 일으켜, 향상구(向上句)를 들고서 금지옥엽 귀하신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어줌이 좋을 것입니다."

 

 설소스님은 그곳에서 일년 동안 주지하다가 그 이듬해 다시 만년사로 돌아온 후 얼마되지 않아 관음원(觀音院)에서 입적하였는데 입적할 무렵 미리 널 속으로 들어가 자물쇠를 채우면서 게를 읊었다.

 

올해 나이 일흔다섯

돌아와 암주가 되었으니

안녕하소서, 관세음보살!

진흙뱀이 돌범을 삼켰도다.

今年七十五  歸作菴中主

珍重觀世音  泥蛇呑石虎

 

 스님이 평전(平田) 땅에 있을 무렵 대중은 항상 5백명쯤 되었다. 그때 강서 늑담사에 한 화주가 나타나 대적탑(大寂塔 : 마조스님의 탑)을 수리하자 대중들은 모두 송을 지어 이를 찬양하였다. 그당시 한 좌주(座主)가 처음 선종으로 전향하여 대중으로 들어왔다가 이를 계기로 게송 한 수를 지었다.

 

강서 땅 늙은 스님에게 이르노니

그날부터 날씨가 무덥고 비바람이 불어오리라

자손들의 헤아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얼음 녹듯 기왓장 무너지듯 할 때를 보아야 하리

寄語江西老古錐  從他日炙與風吹

兒孫不是無料理  要見氷消瓦解時

 

 또한 '동짓날에(冬日卽事)'라는 시를 읊었다.

 

모진 삭풍은 사람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 듯

바위 앞 고목가지에 불어온다

깊은 밤 화로 가득히 불 주시니

도리어 내 마음 게을러집니다.

朔風也解知人意  吹落巖前古樹枝

惠我一爐深夜火  轉敎心性懶趨時

 

 설소스님은 이 시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납자들이 30년 동안 이곳 대중의 밥을 먹었지만 이런 시를 짓지 못했다. 뒤에 그는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이다."

 뒷날 과연 스님의 말대로 그 좌주(座主)는 동액사(東掖寺)의 주지가 되어 남악 천태(天台)의 가르침을 크게 일으켜 세웠는데, 그가 신조(神照)스님이다.

 

 

23. 송원 숭악(松源崇岳)스님의 게송

 

 송원 숭악(松源岳 : 1132~1202)스님이 동호사(東湖寺)에 살 때, 다른 법당을 맡은 이가 송을 청하자 스님은 큰 글씨로 써 주었다.

 

황금 부처님 아래로 눈 내리감은 채

온갖 방법으로 편의를 찾네

이제 나의 몸 붙일 것 없어

도리어 자손에게 덮어달라 보채네.

黃面瞿曇眼目答目蚩  千方百計討便宜

于今無著渾身處  却要兒孫盖覆伊

 

 한 관리에게 지어준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선과 도와 문장까지 얘기하며

숲 아래에서 만나 웃은 지 그 몇 번이런가

우리집 빗장문을 밟고

평민이 재상을 뵈는 일 또한 예사 일.

說禪說道說文章  林下相逢笑幾場

踏著吾家關棙子  白衣拜相也尋常

 

 세상사람들은 이 게송을 앞다투어 애송하였다.

 

 

24. 담광 남(曇廣南)스님의 '소금을 만들며'라는 게송

 

 담광 남(曇廣南)스님은 오랫동안 밀암(密菴咸傑)스님에게 귀의하였다가 뒤에 불조(佛照德光)스님의 회중에서 요원(寮元 : 大衆寮의 監事)을 맡아보았다. 그는 '소금을 만들며[化鹽頌]'라는 게송을 지은 적이 있다.

 

물과 진흙 뒤섞어 한 곳에 끓이니

물과 진흙 사라진 곳 새하얀 소금꽃 피네

하늘에 닿을 듯 높은 값 불러대나

공정한 값 분명하니 누가 감히 다투랴

 

合水和泥一處烹  水泥盡處雪華生

便能索起遼天價  公驗分明誰敢爭

 

 불조스님은 이 송을 보고 기뻐하여, "이 광남(廣南)땅 오랑캐 역시 거칠구나!"라고 하였다. 후일 그는 삽주(霅州) 도량사(道場寺)의 주지를 지내다가 그의 도가 떨칠 무렵 어느 세력자에게 쫓겨났으며, 얼마 후 냉천사(冷泉寺)에서 입적하였다.

 

 

25. 책 만들며 암자에 살다 / 뇌암 정수(雷菴正受)수좌

 

 뇌암 수(雷菴正受) 수좌(首座)는 평강(平江)사람이다. 용모가 훤출하였으며, 오랫동안 월당(月堂道昌 : 1089~1171) · 요당(㑃堂)스님 등 여러 큰스님들에게 귀의하였다. 「보등록(普燈錄)」 30권을 편집하였고, 「능가경(楞伽經)」에 주석을 붙이기도 하였다. 삽주(霅州) 조씨암(曹氏菴)에 주석하면서 서산거사(抒山居士) 유계고(劉季高)의 조카 유평(劉平)과 가장 가까이 지냈는데, 경원(慶元 : 1195~1200) 연간 초에 다시 서호(西湖)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유공이 단구(丹丘)에 부임하자 건자봉(巾子峰) 보은사(報恩寺)의 주지로 그를 부르니, 송을 지어 마다하였다.

 

띠풀집 짓고서야 기뻐서 소나무에 기대니

베갯머리 맑은 바람에 단잠을 잔다.

참선이란 도리를 터득하는 것에도 무심함을 높이 사는데

어이하여 이내 몸을 시끌대는 절간에 넣으려 하오.

 

結茆方喜倚長松  一枕淸風睡正濃

禪道尙無心理會  肯將身入鬧藍中

 

 유공이 이 글을 보고 매우 기뻐하여 다시 사람을 보내 굳이 청하며 아울러 화답의 시를 보냈다.

 

높고 깊으신 모습 우뚝한 소나무에 기대어

노년에 맑은 그늘 스스로 무르익네

홍진세계에 잠시 발 붙이시어

웃음지며 얘기한들 무엇이 나쁘겠소.

 

昻藏骨相倚喬松  晩歲淸陰只自濃

好向紅塵姑著脚  何妨都在咲談中

 

 그러나 스님은 끝까지 가지 않았고 당시 사람들은 그를 고상하다고 하였다. 주지가 되려고 꼬리를 흔들어대며 아첨을 하는 오늘날, 어떻게 이런 사람이 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