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5. 9. 24. 13:47

44. 총림을 압도하는 기개 / 보안 가봉(保安可封)스님

 

 보안 봉(保安可封 : 1133~1189)스님은 칠민(七閩) 사람이며, 월암(月菴善果)스님의 법제자이다. 어린 나이로 대중에 들어와 이름이 빛났으며, 자금산(紫金山)의 수좌로 있다가 양주(楊州) 건륭사(建隆寺)의 주지로 세상에 나온 뒤 상주(常州) 보안산(保安山)으로 옮겨왔는데 이는 주대참(周大參)의 청에 의한 것이다. 가봉스님은 주대참과 인연이 있어 비록 당시에는 작은 사찰이었지만 주인과 객이 서로가 잘 맞아서 줄곧 15년 이상 살았으며 제방의 큰 사찰에서 여러 차례 초청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그러나 가봉스님의 기개는 여러 총림을 압도하였고, 입만 열면 통렬한 어조를 휘둘러 조금치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순희(淳熙) 말년에 앉은 채 입적하였는데, 그의 열반송은 다음과 같다.

 

다행히도 쉰 일곱해 잘 지내오다가

까닭없이 파계하여 큰스님이 되었구나

이제는 땅을 파서 산 채로 묻어다오

이미 사람 앞에 말끔히 쓸었으니

五十七年幸自好  無端破戒作長老

如今掘地且活埋  旣向人前和亂掃

 

 또한 우스갯소리로 글을 지어, 검소한 생활을 하지 않고 옷치장에만 힘쓰는 후생을 꾸짖은 글이 있는데 여기에 함께 싣는다.

 

물레 저어 뽑은 실로 장삼에 털덮게

곱게 차리고 나온 모습 정말 좋다만

막상 조사의 관문을 물을 양이면

영락없이 동촌의 주모 꼴이군, 하하하!

紡絲直裰毛段襖  打扮出來眞箇好

驀然問著祖師關  却似東村王太嫂

呵呵

 

 

45. 건상(建上) 사람 원통 영(圓通永)선사

 

 원통 영(圓通永)선사는 건상(建上) 사람이며 호는 백정(栢庭)이다. 오랫동안 밀암(密菴咸傑)스님에게 귀의하여 일옹(一翁慶如) · 송원(松源崇岳)스님 등과 함께 수행하였다. 후일 같은 고향의 한 노스님이 장산사(蔣山寺)의 주지가 되어 영선사를 그곳의 수좌로 머물게 한 후 장간산(長干山) 천희사(天禧寺)의 주지로 천거하여 세상에 나오게 하였다. 밀암스님과는 대중승으로 있을 때 사이가 좋지 못하여 밀암은 그가 자기의 법을 잇지 못하도록 하였다. 마침내 그는 삭발은사 회암 광(晦菴光)스님을 위하여 향을 올렸으며, 얼마 후 신계사(信溪寺)로 옮겨와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스님은 평소에 시랑(侍郞) 무일거사(無一居士) 왕개(王慨)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서로 주고받은 시구들이 간행되어 세상에 널리 유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법맥이 분명하지 않았고, 총림의 형제 또한 그를 믿으려는 이가 적었다. 이는 허수룩한 몇 칸 절을 얻기 위하여 법맥을 따지지 않는 스님에게 깊은 교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송원스님은 일찍이 그에 대하여 송을 지었다.

 

총림에 만난 지도 어느덧 몇 해

좋은 인연이 바로 나쁜 인연이라

영산의 수기를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콧구멍은 변함없이 그곳에 붙어 있겠구나.

林下相逢知幾年  好因緣是惡因緣

雖然不受靈山記  鼻孔依然著那邊

 

 

46. 상락화산주(常樂和山主)

 

 상락화산주(常樂和山主)는 삼구(三衢) 사람이며 오랫동안 밀암 스님에게 공부하였다. 스님의 견처(見處)는 확실 타당하여 송원(松源崇岳) · 조원(曹源道生)스님 등에 견주어 뒤지지 않았으며, 그의 「법화이십팔품송(法華28品頌)」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이 청산사(靑山寺)에 있을 때, 밀암스님은 게를 지어 그를 놀려준 적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차례의 기봉에 기량이 궁색하여

고개돌려 바라보는 고향 땅 난가봉

인간과 천상을 누가 안다 하더냐

만나보니 조계의 바른 법맥 통달했네

一拶當機伎倆窮  故鄕回首爛柯峰

人間天上誰知否  會見曹溪正脈通

 

 그러나 스님은 일생동안 고생을 하면서도 복이 없음을 스스로 알고, 여러 고을에서 명산에 주지하라는 초청을 모두 응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거사 왕씨(汪氏) 부자와 함께 귀봉(龜峰)의 남쪽에 암자를 짓고 산전(山田)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면서 편안히 스스로를 즐기니 그 경계는 방온거사와 단하(丹霞天然)스님에 견주어 손색이 없었다. 과연 일대의 대단한 일이다.

 

 

47. 황룡봉(黃龍峰) 4세조사(四世祖師) 산당 도진(山堂道震)선사

 

 산당 진(山堂道震)스님은 승주(昇州) 사람이다. 처음 단하 자순(丹霞子淳 : 1064~1117)스님을 찾아뵙고, 조동종의 종지를 밝혔는데, 다음과 같은 송을 남겼다.

 

흰 구름 깊은 골 차가운 옛 바위에

이름모를 풀꽃들을 오색빛 봉황이 바치고

한밤중에 날 밝아 중천에 해가 뜨니

소잔등에 올라타 신발신고 옷입네.

自雲深覆古寒巖  異艸靈華彩鳳銜

夜半天明日當午  騎牛背上著靴衫

 

 또한 대위산(大潙山)에 이르러 '삽추정송(揷鍬井頌)' 을 지었다.

 

모두들 위산의 부자 화목하다 말하더니*

가래를 꽂아둔 채 각기 창칼 들고 있네

여지껏 작은 우물 거울처럼 빛났는데

바람없는 수면엔 때때로 작은 파도 여울진다.

盡道潙山父子和  揷猶自帶干戈

至今一片明如鏡  時見無風匝匝波

 

 후일 스님은 소산(疎山)에서 초당(草堂善淸)스님을 찾아뵈었는데, 사제간에 도가 맞아 이를 계기로 초당의 법을 이었으며, 처음 백장산(百丈山)의 주지로 있다가 뒤에 황룡산으로 옮겨가면서 도를 크게 떨쳤다. 그는 황룡봉(黃龍峰) 4세조사(四世祖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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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산 스님이 앙산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느냐?" "밭에서 옵니다."

"밭에는 사람이 얼마나 되더냐?"

앙산스님이 삽을 꽂고나서 손을 모으고 서 있었더니 위산스님이 말하였다.

"남산에 풀 베는 사람이 많더라."

그러자 앙산스님은 삽을 뽑아들고 가버렸다.

 

 

48. 도(道)보다 시(詩)의 경지가 널리 알려지다 / 야당 보숭(野堂普崇)선사

 

 야당 숭(野堂普崇)선사는 사명(四明) 사람이다. 그는 오랫동안 천동사(天童寺) 굉지(宏智正覺)스님에게 귀의하였으나 생사대사를 깨치지 못하고 마침내 강서로 가서 초당(草堂善淸)스님을 찾아뵙고는 얼마 후 과연 깨친 바 있었다. 그 뒤 육왕사의 주지가 되자 향불을 사르고 초당스님의 법제자가 되었다. 설두 지(雪竇持)스님은 네 구절의 게를 지어 굉지 스님을 놀려 주었다.

 

종(宗 : 翠巖宗頭)*하나 얻더니

숭(崇 : 野堂普崇) 하나 잃었네

면전에선 합장하지만

등 뒤에선 가슴을 치네.

收得一宗  失却一崇

面前合掌  背後搥

 

 이 게송을 전해 들은 이는 모두 크게 웃었다.

 보숭스님은 어릴 때 시에 대하여 공부를 많이 하였는데 한번은 여산(廬山) 삼협교(三峽橋)에 제(題)를 지어 붙였다.

 

쓸쓸한 자갈길 푸른 솔밭 둘러싸이고

산허리엔 홀연히 찬바람 몰아친다

추위 속에 앉았는데 저문 눈 내리려 하고

인적이 고요한데 산 숲엔 범종소리 울려온 듯

 

가파른 절벽 위엔 천고의 맑은 물이 쏟아지니

수백길 떨어지는 폭포 두 눈이 아찔하다

난간에 기대 지난 십년을 돌이켜보며

앉아서 오로봉 뒤덮는 흰구름을 바라본다.

 

蕭蕭石徑蟠蒼松  山腰忽斷來悲風

坐寒欲作暮天雪  人靜似發山林鐘


落崖千古流寒玉  眩眼百丈飛長虹

倚欄深省十年夢  坐看雲呑五老峰

 

 후일 어사(榮史) 안국(安國)이 이 시를 보고 크게 칭찬하며 그곳에 걸려있던 많은 사람들의 시를 모조리 뜯어버리고 이 한 편만을 남겨 두었다. 그 후 그 도는 사방에 알려지지 못하였지만 시만은 세상에 널리 전해졌다. 후학들은 보승스님을 보고서 조심해야 할 것이다. 제이(齊已) · 관휴(貫休)는 그의 경지보다도 시의 명성이 더 높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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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종(嗣宗, 1085~1153), 조동종 스님. 굉지 정각의 법을 이음. 머리카락이 희었으므로 종백두(宗白頭)라고 불리웠다.

 

 

49. 꿈속에 지은 게송 / 용구 혜인(龍丘慧仁)법사

 

 용구 혜인(龍丘慧仁)법사가 꿈속에 다음과 같은 게를 지었다.

 

잠방이는 벌써 떨어지고

바지도 다 떨어졌네.

얼음처럼 옥처럼 깨끗한데

지팡이 들어 금을 그어 놓으니

천지에 하나도 남은 게 없구나

그만두어라

호로박이며 경쇠를 칠 게 없구나.

棍旣破袴又送  多少氷淸玉潔

一條藜杖劃斷  天地更無殘闕

別別  不須擊胡蘆磬鐵

 

 초연거사(超然居士)는 이 시를 보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까치집에 비둘기가 사는구나,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이다."

 이 말을 듣고 설당(雪堂道行)스님은 그에게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 큰스님들도 교종에 있다가 깨친 사람이 많으니, 이를테면 백장(白丈懷海) · 대주(大珠慧悔) · 동산(洞山良介)스님 등이 모두 그러한 분들입니다."

 초연거사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거렸다.

 

 

50. 고소사(姑蘇寺) 비구니 조근(祖懃)선사

 

 고소사(姑蘇寺)에 조근(祖懃)비구니 한 분이 있었다. 어린나이에 혹암(或菴師體)스님에게 귀의하여 생사대사를 깨치고자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정진한 지 오랜 뒤에야 깨달은 바 있었다. 하루는 어느 관리가 종이를 펴놓고 게를 써달라 청하니 다음과 같은 게를 써 주었다.

 

진종일 관아를 다스려도 관아를 모르니

일생동안 아전에게 많이도 속는구나

아전을 꾸짖어 내쫓으니 관아 모습 스스로 드러나

북두를 흔들어 뒤집고 남쪽을 보노라.

終日爲官不識官  終年多被吏人瞞

喝散吏人官自顯  掀翻北斗面南看

 

 그는 많은 곳에서 주지로 초빙했지만 굳게 거절하고 나가지 않은 채, 풍교(楓橋) 이씨(李氏)의 암자에서 세상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