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마루 2015. 10. 7. 20:22

운와기담

 

1. 부필(富弼)의 게송과 편지

 

 부정공(富鄭公 : 弼)이 희령(熙寧 : 1068~1077) 연간에 박주(亳州)를 다스릴 때 영주(潁州) 화엄선원(華嚴禪苑)의 옹(顒)선사를 초청하여 심법을 듣고 깨친 바 있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낙(洛)에 살면서 자신의 생각을 게송에 실어 옹선사의 전법 스승 고소사(姑蘇寺) 원조(圓照)선사에게 보냈다.

 

몸소 옹선사를 뵈옵고 깊이 깨달음을 얻어

그 인연으로 노스님의 심법을 전해 들었습니다

동남쪽 강산이 멀다고 말들하지만

스님의 모습과 목소리가 눈앞에 보이듯 하옵니다.

親見顒師悟入深  夤緣傳得老師心

東南謾說江山遠  目對靈光與妙音

 

 그리고는 편지도 함께 보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불조의 도에 마음을 두어왔지만 눈 밝은 스승을 만나 어리석음을 깨지 못한 점이 늘 안타까웠습니다. 선사의 훌륭한 덕망을 오래 전부터 들었으나 찾아뵈올 길이 없었는데 지난 해 다행스럽게 박주지방에 부임하니, 마침 그곳이 영주(潁州)와 인접하여 그 고을 비부 장경산(比部 張景山)의 소개로 옹선사를 초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방문으로 한 달 가까이 함께 지내오는 동안 자비와 방편의 힘을 입어 깨친 바 있었는데 때마침 여름 결제에 임박하여 사월 초에 갑자기 영주로 돌아갔습니다. 불법을 닦고 번뇌를 버리기에는 아무런 공부가 없는 데다가 계속 노쇠와 병마에 시달리느라 우매한 머리로 도에 들어가기 어렵더니 지난 날 고령(古靈)선사의 '생각치 않게 노년에야 궁극의 진리[極則]를 들었다'는 일을 오늘날 이 부필이 겪게 되었습니다. 천행 중 천행입니다. 제가 비록 옹선사에게 법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 근본은 노스님에게서 나온 것이니, 법맥이 매우 명백합니다. 그러나 기필코 완전히 성취하려면 다시 노스님께서 자비를 내리시어 저를 붙잡아 멀리 이끌어 주시사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게 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지난 날 남악(南嶽)선사의 문하에 방온(龐蘊)이 있었고 백장(百丈)선사의 문하에 배휴(裴休)가 있었던 일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의 벼슬은 신하로서 최고의 지위에 이르고 불도까지 밝게 깨쳤으니 헤아릴 수 없는 큰 인물이라 하겠다. 또한 원조(圓照)스님에게 법의(法義)를 강론하고 선문의 종맥을 말하면서 고령선사가 노경에 이르러 제일의제를 들을 수 있었다는 일을 스스로에게 빗댄 것이 어찌 사람을 속이는 말이겠는가.

 

 

2. 조수 자지(祖秀紫芝)스님의 문장

 

 촉승(蜀僧) 조수(祖秀)는 자가 자지(紫芝)이며 일찍이 문장으로 사대부 사이에 명성을 날렸고 숭 명교(契崇明敎)선사의 도풍을 추앙하였다. 그는 「구양문충공외전(歐陽文忠公(歐陽修)外傳)」을 저술하였는데 양직 소상(養直蘇庠)이 책머리에 서문을 썼다. 서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군자들은, 불교가 요 · 순 · 우 · 탕의 시대에는 뚜렷한 징후가 없었지만 공자 맹자 이후의 역대 선유(先儒)들이 국정을 담당하면서 조금치도 금하지 않았으며 국내에 횡행하는 것을 방관하였다고 말한다. 고금에 이러한 지론을 가지는 자가 없지 않았으나 조수스님만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요임금은 단주(丹朱 : 요의 아들)에게 국정을 맡을 자격이 없다고 순임금에게 양위하였고, 순 또한 아들 상균(商均)을 걱정하여 우(禹)에게 양위하였다. 탕과 무왕의 혁명에 이르러 이 가르침이 처음 생겨났으니 공자로 하여금 일을 처리하게끔 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요임금에서 무왕까지 부처님이 탄생하지 않았음은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성왕(成王 : 周代의 임금) 강왕(康王)이 죽은 뒤에 부처님이 자취를 나타내셨다. 그러나 그 가르침이 중국에 전해지지 않고 성인이 노나라에 태어나 옛 제왕의 가르침을 집대성 해주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러나 너무 심했다. 성인(공자)이 노 · 위 · 진 · 송(魯 · 衛 · 陳 · 宋)에서 어려움을 겪은 나머지 구이(九夷 : 東夷)에 살고자 하여 뗏목을 타고저 바다로 떠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국외 수 만리 밖의 가르침을 중국에 전하려고 한들 천자 제후 그 누가 들어주겠는가? 불법을 구차히 전하지 않았음은 불법의 감응을 멀리서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빠른 감응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서였다.

 

 이는 모두 조수스님이 서울[京師]에서 쓴 글이다. 고금을 놀라게 하는 그의 글은 수 만 마디가 넘으나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또한 조수스님은 소동파의 초상화에 찬을 쓴 적이 있다.

 

한(漢)나라의 사마천(司馬遷) 양진(楊震) 왕일(王逸),

당(唐)나라의 이태백(李太白) 진자앙(陳子昻)

이 다섯 분도 모두 촉땅에서 태어났지만

선생처럼 빛나는 기개는 없었다.

 

선생의 시와 겨룰 수 있는 자는 오직 자미(杜子美 : 杜甫)이며

선생의 문장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는 오직 자장(司馬子長)이라

부(賦) 또한 굴원(屈原) 가의(賈誼)보다 훌륭하고

글씨는 종요(鍾繇) 왕희지(王羲之)보다 힘차니

이러한 선생의 뛰어난 솜씨는

아마도 지극한 도의 쭉정이리라

선생의 도는 후직(后稷), 이윤(伊尹)과 같으니

자기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참소로써 형벌을 내렸던 그 때에도

선생은 더욱 문장으로 그들을 풍자하였고

바다 밖으로 귀양살이를 떠나면서도

고향에 돌아가듯 태연하였다

참으로 촉군의 다섯 호걸은

선생의 담장을 엿보지도 못할 것이다.

 

漢之司馬楊王  唐之太白子昻

是五君子者皆生乎蜀郡  未若夫子而有耿光

 

夫子之詩抗衡者其唯子美  夫子之文並軫者其唯子長

賦亦賢於屈賈  字乃健於鍾王

此夫子之絶技  蓋至道之秕穅

夫子之道是爲后稷伊尹  可以致其君於堯湯

 

時議將加之於鈇鉞  而夫子尤諷於典章

海表之遷  如還故鄕

信蜀郡之五傑者  莫得窺夫子之垣墻

 

 조수스님의 논지와 풍모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 점의 고기를 맛보면 그 솥 속의 음식 맛을 알 수 있다. 정강(靖康 : 1126) 초에 조수스님은 서울에 머물면서 「화양궁기(華陽宮記)」를 지었는데 매우 자세히 썼고, 그의 「동도사략(東都事略)」에는 주면(朱勔)이 전한 찬(讚)이 붙어있다. 주면은 동도 땅 공사를 감독하면서 이를 읽은 자이다. 이른바 '수산 간악(壽山艮嶽)을 보는 듯 훤하니' 어찌 꼭 보아야만 알겠는가.

 승상(丞相) 장덕원(張德遠)이 복당(福唐) 판윤(判尹)으로 있을 무렵 조수스님을 장락(長樂) 광엄사(光嚴寺)의 주지로 청했다. 뒤에 늙어서는 촉산으로 돌아와 한가롭게 살았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불법을 위하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복이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고 세상 사람들은 안타까워 하였다.

 

 

3. 동산 길(東山吉)선사의 게송

 

 신감(新淦) 동산사(東山寺)의 길(吉)선사는 민(閩) 사람이며 불조 광(佛照德光)선사를 가르친 은사이다. 도와 학문이 높고 논변이 말쑥하여 고명한 사대부들이 즐겨 왕래하였다. 이조청(李朝請)이란 자는 향림거사(薌林居士)의 외삼촌으로, 향림거사와 함께 선사를 찾아와 불법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이씨가 선사에게 말하였다.

 "집안 도적이 사람을 괴롭힐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집안 도둑이 누구냐?"

 이씨가 주먹을 세워 보이자 길선사가 말하였다.

 "도적의 몸이 이미 드러나지 않았는가?"

 "스님께선 사람을 바보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것이요."

 "증거로 장물이 눈앞에 있지 않는가?"

 이씨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자 길선사가 입에서 나오는대로 게송을 읊었다.

 

집안 도둑이 사람을 괴롭히니 이를 어떻게 할까

많은 성인이 기연을 돌리는 것은 오로지 그것을 위하는 일

온누리에 그림자도 발자취도 없고

의지함도 머뭄도 없고 얽매인 바 없는데

도적 도적 하니, 맹장과 힘센 병사도 잡아들일 수 없어

천하의 노선사를 의심케 하네

시끄러운 저자 속 옛 미륵이 배꼽잡고 깔깔댄다

그만! 그만!

 

마음으로 밖에서 구하지 마오

고개만 돌리면 별안간 도적의 몸이 드러나고

장물까지 얻었으니 세상에 짝할 이 없도다

세상에 짝할 이 없으니 참으로 우러러 볼 만하다

이제부터 다시는 기량을 자랑하지 말지어다

집에서 편안히 기쁜 마음으로 일할 때

삼라만상이 모두 다 손뼉을 치리라.

 

家賊惱人孰奈何  千聖回機只爲佗

徧界徧空無影跡  無依無住絶籠羅

賊賊猛將雄兵收不得  疑殺天下老禪和

笑倒鬧市古彌勒  休休

 

不用將心向外求  回頭瞥爾賊身露

并贜捉獲世無儔  世無儔眞可仰

從玆不復誇技倆  怗怗安家樂業時

萬象森羅齊撫掌

 

 길선사는 또한 두 수의 송을 지어 덕산(德山)스님의 방(棒)과 임제(臨濟)스님의 할(喝)에 대해 뜻을 밝혔다. 

 

문에 들자마자 몽둥이 맞으니

일곱번 엎어지고 여덟번 자빠지며

하늘 땅 온 누리를

일시에 감파하였네.

入門便棒  七顚八倒

帀地普天  一時勘破

 

문에 들자마자 할을 당하니

야차와 나찰들이

산하 대지에서

일시에 발악을 하도다.

入門便喝  夜叉羅刹

大地山河  一時惡發

 

 길선사는 바로 도량산(道場山) 임(琳)선사의 법제자이다. 노년에 남민(南閩) 개원사(開元寺)의 수좌승으로 있다가 운당(雲堂 : 식당)에서 점심 공양을 하던 차에 게를 설하였다.

 

향년 84세 늙은 비구가

온갖 일을 해보아도 쉬느니만 못하네

오늘아침 미련없이 모든 인연 잊고서 떠나가

다리는 흘러가고 물은 흐르지 않는 소리를 들으리.

八十四年老比丘  萬般施設不如休

今朝廓爾忘緣去  任聽橋流水不流

 

 게송을 마치고 잠자듯 서거하니,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도 이렇게 날달랐다.